57. 소년 탐정 빅터
벤프리의 집에 찾아가기 위해 아침부터 조금 준비를 했다. 그랬더니 슬라이트가 달라붙었다.
“나도 간다.”
“너는 왜?”
“나도 벤프리씨와 안면이 있으니까.”
슬라이트가 벤프리씨와 딱히 친하게 지냈던 기억은 없는데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간다고 하니 말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 둘이 밖에 나간다고 하자 나머지도 따라붙었다.
“안돼 너무 많아. 한꺼번에 너무 우르르 몰려가면 민폐잖아. 개인적으로 따로 찾아가는 것은 막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해.”
철권단도 벤프리와 안면이 있으니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는 벤프리씨와 안면도 없지 않나.
“그 벤프리라는 정원사가 재배한 영초로 내가 큰 이득을 봤으니 나도 가서 감사를 전해야 한다.”
마그나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네가 먹은 건 내가 기른 건데?
[혹시 특별한 영초 재배에 대한 비법을 남겨 두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냐. 그런 거 없어.
“호, 혼자 남으면 좀···.”
더럽게 소심한 놈.
그런데 스테이시에 대한 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다. 이것이 진짜 연쇄살인범에 의한 범행일까? 모방범이 아닐까 하는 것 말이다.
“저는···.”
“공주님은 안 되는 것 아시죠?”
“네, 아쉽네요.”
뭐가 아쉽다는 거지? 아이브 공주까지 가면 일행이 너무 많아진다. 그리고 가는 곳이 마탑 같이 나름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된 곳이 아니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 끝에 결국 명문가 4종 세트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렇게 네명을 데리고 도착한 벤프리의 집은 빈민가와 중산층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었다.
벤프리의 미망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미 장례는 치러서 벤프리의 시신을 볼 기회는 없었다.
“제가 너무 늦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해요.”
벤프리의 미망인은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갑자기 가장이 사라진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엄마아아···.”
문을 반쯤 열고 네다섯살쯤 먹은 꼬맹이 두 명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벤프리의 자식들인 듯 싶었다.
“손님 오셨잖니? 방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네에에”
형으로 보이는 꼬맹이가 작은 아이의 손을 붙잡고 사라졌다.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격변 이후 초기 생존자 중에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갔을까?
반년도 가지 못했다. 대충 그때쯤부터 나는 아이가 홀로 생존하는 경우는 봤어도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생존자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울면서 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는 인간들 그리고 남겨진 아이들을 수없이 많이 봤다. 스스로 자기 자식을 죽이는 인간들도 숱하게 봤다. 미망인의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과 표정에서 나는 그들을 겹쳐보았다.
“이제 어떻게 생활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이가 남겨놓은 돈으로 어떻게든 버티면서 제가 뭐라도 일을 해야겠죠.”
나는 준비해왔던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얼마 되진 않지만, 생활에 보태도록 하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순식간에 미망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금 미망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것이었을 것이다. 내가 주머니를 꺼내놓자 따라왔던 일행들이 앞다투어 주머니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그나의 주머니가 제법 두둑한 것이 좀 많이 넣은 모양이다. 미망인은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혹시 일자리가 필요하시면 찾아오십시오. 아직 저택에 고용인을 뽑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미망인이 진짜로 찾아올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그런데 혹시 벤프리씨가 남긴 것은 없나요?]
뒤에서 기회를 보고 있던 스테이시가 끼어들었다. 벤프리가 진짜 숨겨진 재배법이라도 가지고 있는 줄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아, 네 그이가 남긴 것이라면 조금 있어요.”
스테이시의 얼굴이 밝아졌다. 미망인이 다른 방으로 잠시 건너가 이것저것 꾸러미를 가져왔다. 물론 스테이시가 원하는 재배 비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유품으로 보이는 몇 가지 물건이었다. 스테이시가 눈에 띄게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것은?”
“그이가 항상 몸에서 떼놓지 않고 가지고 다니던 물건이에요. 반으로 잘렸는데도 차마 버리질 못하겠더군요.”
나도 몇번은 본 기억이 있다. 벤프리가 늘 손에 들고 있거나 허리에 차고 다니던 작은 모종삽이었다. 손잡이까지 철로 만들어진 물건인데 그것은 손잡이 부분이 반으로 잘려있었다.
매끈하게 잘린 단면을 보니 오러로 자른 느낌이 난다. 거기에 삽 부분에는 미약하게나마 벤프리의 것으로 보이는 혈흔도 남아있었다.
“수사관들이 이것을 봤습니까?”
“네, 모두 확인하시고 돌려주셨어요.”
나는 반으로 잘린 모종삽을 손에 들고 집중했다. 이제 하루에 한 번쯤 사이코 메트리를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번을 사용하면 심한 두통이 생기고 세 번째가 되면 예전처럼 이틀 정도는 드러누울 각오를 해야 한다.
시야가 바뀌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추측하기에 이것은 아주 오래전 기억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벤프리가 다시 고용해달라고 찾아왔던 날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기꾼놈!”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사내가 벤프리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어이쿠!”
제대로 얼굴을 한 대 얻어맞은 벤프리가 뒤로 벌렁 쓰러졌다. 사내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쓰러진 벤프리에게 사내는 연신 발길질을 했다.
“죽어! 죽어!”
“살려주십시오! 처음부터 제가 비법 같은 것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코에서 피가 터져 순식간에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벤프리가 몸을 웅크리고 사내의 앞에 엎드려 빌었다.
“그럼 알아 왔어야지!”
“어윽!”
사내는 계속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고 계속 맞던 벤프리는 어딘가를 잘못 맞았는지 큰 신음소리를 냈다. 사내는 그제야 자신이 조금 지나쳤다는 것을 느꼈는지 구타를 멈추고 벤프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알아 와라 일주일을 주마!”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냅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처참하게 죽여주마. 네 가족까지 모두!”
벤프리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벤프리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시야가 돌아왔다.
사내는 누구일까? 옷차림이나 말투를 보면 분명 귀족일 것이다. 고용했었다는 말을 들어보면 분명히 벤프리를 스카우트해갔던 귀족 집안일 가능성이 높았다. 벤프리가 큰돈을 받고 옮겨갔을 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어떤 가문이 벤프리를 데려갔는지 따로 조사는 하지 않았었다.
“부인, 혹시 벤프리씨가 근래에 크게 얻어맞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까?”
“아뇨. 그런 일은 없었는데요?”
그럼 이건 벤프리가 죽었던 날의 기억인가? 그럼 이건 범인이 아니다. 일주일의 시간을 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크게 다친 일은 있어요. 옮겨갔던 귀족가에서 해고된 다음 날인가 술을 먹고 계단에서 굴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며칠 앓아누웠었죠.”
“그게 언제죠? 벤프리씨가 그 귀족가에서 해고된 게 언제입니까?”
“하네스 가문에 다시 고용해달라고 찾아가기 닷새 전인가 그럴 거예요.”
하루 이틀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 대충 시간이 맞는 것 아닌가?
“왜 그래? 왜 그런 걸 물어봐?”
나름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이상한 것을 물어보는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옆에서 슬라이트가 초를 쳤다.
“그럼 부인, 우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급하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일행을 보고 말했다. 이 말을 안에서는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급하게 밖으로 나온 것이다.
“범인, 잘하면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뭐?”
슬라이트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제는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한다는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이라도 걸었어야 했나?
“그거 흥미롭군. 어떤 근거로 말을 하는 거지?”
[연쇄살인범을 잡는 건가요?]
“나, 나쁜 놈은 잡아야 해요.”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슬라이트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일단 추리를 완성하기 위해서 정보가 더 필요해.”
나는 용의자를 알고 있다고 해도 무턱대고 가서 심문하거나 범인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증거를 모아 혐의를 입증해야 한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 있지.”
“설마 거기?”
“그래 거기.”
슬라이트가 짐작하는 바로 그곳, 오랜만에 검은형제단의 정보력이 필요했다.
일행을 이끌고 예전에 방문했던 애완동물 가게에 들어섰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엔 가게 안에 손님들이 꽤 있었다.
“오랜만에 방문하셨군요. 다른 손님들도 모시고요.”
지난번과 정말 머리카락 한 올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노신사가 나를 맞이했다.
“예, 혹시 안되는 겁니까?”
“아닙니다. 어차피 저희 존재를 모르시는 분들도 아니니까 말이죠. 그리고 도련님도 계시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색이 보이긴 했다. 시선을 따라가니 마그나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가문이니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슬라이트를 제외하고는 이곳에 왜 왔는지 모르는 다른 일행들에게서 잠시 멀리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슬라이트는 웬일로 눈치 빠르게 나머지 일행의 관심을 동물들로 돌리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벤프리를 고용했던 귀족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얼마 전에 사망한 정원사 말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얼마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노인이 가게 안쪽의 문을 열고 사라지자 나는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어때 마음에 드는 녀석이라도 있어? 똘똘이도 여기서 데려온 녀석이야.”
[귀여운 아이들이 너무 많네요. 전부 제 사역마로 기르고 싶어요.]
스테이시는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미친 마법사의 기질이 드러나고는 했다.
“과연 공주님이 총애하시는 견공을 길러낸 곳인가?”
마그나는 이상한 부분에서 감탄했다.
“가, 강아지는 무서워요.”
5성 기사가 강아지를 무서워한다니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다. 하기야 가끔 똘똘이가 자기를 무서워하는 자칼을 보고 웃는 것처럼 입꼬리를 올리고는 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이곳에는 왜 데려온 것인가?”
[그래요. 정보가 필요하다면서요?]
나는 여기가 검은형제단의 비밀장소라는 것을 알려줘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여기가 정보상이야.”
그런데 슬라이트가 스스럼없이 옆에서 바로 불어버렸다.
“오, 그런 곳이었군. 과연 빅터는 다재다능하군.”
[여기가 검은형제단인가요? 아니면 어둠?]
“저, 정보상이요? 깡패들 있는 곳 아닌가요?”
얘들은 뭔가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반응이 다양해서 보는 재미가 있다.
“검은형제단이야.”
내 대답에 마그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검은형제단의 부단장이 왕실 측 인사를 가장한 내무대신 쪽 사람이었던가?
[그렇군요. 저도 필요할 때 이용해야겠어요.]
“거, 검은형제단이 뭐에요?”
스테이시도 평범한 반응이었고 자칼은 슬라이트가 구석으로 끌고 갔다. 이러면 괜히 나 혼자 고민했던 모양이다.
금세 노신사가 다시 문을 열고 매장 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것은 가져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뭘요. 요금을 지불하시는 손님이신데요.”
지그시 웃는 노신사가 조금 얄밉게 느껴졌다. 그보다는 조금 두려웠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요구할 생각이지?
“금화 10개입니다.”
지난번보다는 적은 액수다. 금화를 지불하자 노신사가 새끼들이 모여있는 울타리로 가더니 특이하게도 붉은색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왔다.
“미토클라시 종의 고양이입니다. 쥐를 잘 잡죠.”
저번에도 그렇게 말해서 데려간 똘똘이는 쥐는 안 잡고 공주를 잡고 있는데요? 노신사가 건네주는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눈이 똘망똘망한 것이 이 녀석도 제법 똑똑할 것 같았다.
“네 이름은 똘망이다.”
무의식적으로 한 말에 바로 옆에 있던 스테이시가 마치 나를 때릴 것처럼 달려들었다.
[아니 왜요? 왜 이름을 그렇게 지어요?]
“자네가 다재다능한 것은 인정하네만 작명 솜씨는 정말 형편없네. 똘똘이, 똘망이가 뭔가? 그 정도면 동물 학대라네.”
마그나와 스테이시의 비난에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새끼고양이를 스테이시에게 떠넘겼다.
“그럼 알아서 지어줘.”
스테이시가 대단히 중대한 사명을 맡은 것처럼 결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귀찮아서 대충 지었던 게 맞기 때문에 할 말은 없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와 노신사에게 받은 봉투를 열어 정보를 읽기 시작했다. 봉투 안에 있던 서류에는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자세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그런데 그 방향이 반대였다.
“아니 이게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