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추적
벤프리가 고용되었던 곳은 바로 가라이 자작가라는 곳이었다. 서류에 나와 있는 그곳 구성원들의 나이와 성별을 보니 내가 봤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딱 한명이 있는데 그 사람이 문제였다.
크레타 가라이, 가라이 자작가의 장남이다. 그리고 어제 살해당했다. 범인은 벤프리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럼 크레타 가라이가 벤프리를 죽인 범인이 아닌건가? 진짜 우연히 연쇄살인범에게 당한 것인가?
나 혼자 생각해선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이니 나머지 정보를 읽었다.
- 내무대신 나단 오페르의 파벌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어제 살해당했다면 귀족이니 아직 장례는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번 찾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연쇄살인범을 우리가 잡는다? 물론 활약 여부와 관계없이 나보다 명문가 4종 세트가 더 주목을 받겠지만 그렇다고 내 공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그나, 너 가라이 자작가라고 알고 있어?”
“알고 있다. 아버지와 꽤 친밀한 가문이지, 아버지와 친밀하다는 것은 그리 깨끗한 귀족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제는 아버지의 치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마그나였다.
“거기 장남은 알고 있어?”
“음, 기억이 날 것도 같군. 기억하기로 평판이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 사람도 연쇄살인범에게 죽었다는데? 너와 함께 찾아가면 조문은 할 수 있겠지?”
“죽었다고? 쓰레기 귀족이 하나 줄었다니 그것참 잘된 일이군. 물론, 나와 함께 간다면 박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음 날 다시 일행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수련을 자꾸 빼먹는다는 이유로 스승님에게 한 소리를 조금 듣긴 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마그나를 앞세워서 가라이 자작가를 찾아갔다. 가라이 자작가는 제법 화려한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왕도에 이 정도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면 상당히 부유한 귀족이라고 봐야 한다.물론 그 돈은 나쁜짓을 해서 모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서 오십시오. 마그나 공자님 다른 분들도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기억 속에서 보았던 크레타라는 사내와 매우 닮은 중년인이 우리를 입구까지 나와서 맞이했다. 아마도 이 사람이 현 가주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무대신처럼 썩은 느낌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것이 이 세계 귀족의 표준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마그나의 아버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니만큼 이곳의 주인공은 마그나였다.
“큰일을 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신경을 써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역시 정치인의 자식이라고 해야 할까? 크레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잘 죽었다는 소리를 했던 것치고는 마그나는 평소의 바른 생활 사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내뱉었다.
자작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기 전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흉수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진전이 있다고 합니까?”
“아닙니다. 아직 꼬리도 못 잡은 것 같더군요. 치안대의 수사력이 이렇게 형편없을 줄 몰랐습니다. 제 아들이 무려 24번째 피해자라고 하더군요. 치안대의 무능에 대해 위에 강력히 항의할 예정입니다.”
연쇄살인범 소리를 들으니 사람을 꽤 죽인 줄은 알았지만 24명째라니 생각보다 훨씬 많이 죽였다. 그런데 그러고도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가라이 자작은 울분을 터트렸지만, 치안대의 수사력이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다. 지구에 과학 수사대가 있다면 이쪽은 마법이 있다.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이런 사건의 경우에는 마법 수사가 훨씬 효율이 높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이런 큰 사건의 경우라면 수사대에 실력 있는 마법사도 꽤 여러 명이 붙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범인을 잡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범인이 그만큼 실력이 좋다는 이야기다.
“고인의 평안을 빌어도 되겠습니까?”
“저도 부탁드리지요.”
시체에서 무엇이라고 읽어낼 수 있을까 해서 부탁한 말에 마그나가 눈치 빠르게도 나를 지원하고 나섰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마그나의 부탁을 자작은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권력의 힘이 이래서 좋은 거다.
관 안에 누워있는 크레타는 역시 내가 기억 속에서 본 그 사내가 맞았다. 대충 명복을 비는 시늉을 하고 시신을 살폈다. 깨끗이 씻기고 옷도 갈아입혀서 살해당했을 때의 흔적은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너무 깨끗해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살해당한 것은 확실한데 외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 아마 옷으로 가려져 있는 부분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손이나 얼굴에 자잘한 생채기라던가 저항한 흔적이 없는 걸로 봐선 심장을 일격에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시신이 착용하고 있는 물건 중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 가문의 문양이 박혀있었다.
나야 준남작의 차남이니 저런 반지를 낄 일이 없지만, 정식으로 인정된 후계자들은 몸에서 떼어내지 않는 것 중에 하나다.
자작의 시선이 잠시 다른 곳에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슬그머니 손끝을 반지에 갖다 댔다.
시야가 바뀌었다.
반지의 시야인데 하늘이 보인다. 아마 길바닥에 누워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익숙한 차림새의 사람들이었다.
눈구멍 하나 없이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전신 타이즈를 입은 사람 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실 특무대.
이 사람들이 왜 여기서 나오지? 설마 연쇄살인범의 정체가 왕실 특무대인가? 그렇다면 치안대가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특무 대원들은 아마도 이미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크레타의 시체를 이리저리 확인했다.
“확인.”
그 한마디를 끝으로 특무 대원들이 허공에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그 장면을 끝으로 시야가 돌아왔다. 특무대가 범인인가? 아니면 특무대도 범인을 쫓고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왕실 특무대가 손을 댄 사건이라면 괜히 나서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인을 추모하는 흉내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가라이 자작가로 우리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조금 간사해 보이는 인물이었다.
“집사장이 여긴 웬일이지요?”
마그나가 앞으로 나섰다. 저 사람이 오페르 후작가의 집사장인가? 권력가의 집사장이라는 것은 절대로 쉽게 볼 수 없는 위치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다름이 아니라 가주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가라이 자작가로 사람을 보냈다는 것은 우리가 이곳에 찾아온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집사장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가주께서 이번 사건을 개인적으로 수사하시는 것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치안대와 경비대 어느 곳에 방문하셔도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전의 약속을 지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에게 하는 말 같지만 나에게 하는 말이다. 내무대신의 뜻은 무엇일까? 범인을 마음대로 수사해도 좋다는 것은 최소한 이번 사건에 대해 자기는 결백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에 왕실 특무대가 연관된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어쩌면 내무대신이 나를 왕실을 치는 칼로 이용하겠다는 계략일지도 모른다.
“배려에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내 답을 들은 집사장은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집사장이 무시한 사람에는 마그나도 포함되어있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오페르 후작가 내부는 이미 미들턴 쪽으로 기울어진 모양이다.
마그나가 이를 갈며 떠나가는 집사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집사장은 오늘 마그나가 차기 가주가 되었을 때 숙청 일 순위를 예약한 모양이었다.
“이제 어쩔 생각인가? 아버지가 허락했다는 것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 아버지의 모든 행동에는 숨은 뜻이 있다.”
과연 아버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아들이라고 해야 할까. 나를 말리는 마그나였다.
“마그나,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해보라.”
“오페르 가문의 정보력은 어느 정도 수준이냐? 검은형제단보다 위인가?”
마그나는 턱에 손을 대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전반적으로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왕궁 내부의 일이라면 검은형제단보다 위겠지. 왕국 어느 기관보다 위다.”
마그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검은형제단은 공작가가 운영하는 것이지만 왕실의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왕궁 내부의 정보에 누구보다 밝은 것은 왕실이다. 왕가가 무능하다면 모를까. 현 국왕에 왕세자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러니 가장 정보력이 뛰어난 곳은 에인프라흐 공작가도 오페르 후작가도 아닌 왕실이라고 봐야 했다. 그런데 그런 왕실이 오페르 후작이 나를 이용해서 왕실을 공격하려는 것을 내버려 둔다? 이것도 좀 이상한 일이다.
“기왕 손을 써두셨다고 하니 치안대까지는 가보자.”
만약 내가 사이코 메트리를 통해 특무대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낸다고 해도 밝히지 않으면 그만인 일이다.
일행들과 치안본부를 향했다. 입구에서 신분과 용건을 밝히자 곧바로 연쇄살인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부서로 안내받았다.
사실 이 정도는 굳이 내무대신이 손을 써두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일행의 이름값만으로도 가능한 일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건 담당자인 아인 콜러라고 합니다.”
담당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이는 느껴지기로는 4 서클의 마법사였다. 아인 콜러는 바로 스테이시에게 목례했다.
“탑주님의 제자분을 이렇게 뵙는군요.”
[아인 콜러님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예의상 하는 말인지 진짜 많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에서는 스테이시의 덕을 좀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례지만 내무대신께 들은 말씀은 없으십니까?”
“그런 연락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높으신 분이 저희에게 따로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하여튼 정치인 놈들이란, 전폭적인 지원이니 뭐니 해놓고 결국 공치사였나? 집사장까지 따로 보낸 것을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쪽으로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인 콜러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군요. 저희 고용인이 연쇄살인범에게 당하는 바람에 수사 과정을 확인해보려고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중이떠중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쟁쟁하신 분들이 오시는 것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지금 저희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라서요.”
하지만 말로는 바쁘다고 하는데 보기에는 그리 바빠 보이지 않았다.
“간략하게라도 수사 현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현재까지 저희가 확인한 피해자는 25명입니다. 하지만 저희가 파악하지 못한 피해자도 있을 수 있으니 실제 피해자는 더 많을 겁니다.”
그사이에 한 명을 더 죽인 건가? 꽤 간이 큰 범죄자다. 아니면 왕도의 수사력을 무시할만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건가?
“범인의 능력이 대단한가 봅니다.”
“범인은 실력은 아마도 4성 기사로 추측됩니다. 그것뿐이라면 잡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빠져나가는 것은 저의 짧은 식견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아니 있긴 있다. 왕실 특무대가 쓰고 있는 그 전신 타이즈 그것이 있다면 범행을 저지르고 흔적 없이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은 왕실 특무대인가?
“조금 전에 가라이 가문의 피해자를 보고 왔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특별한 외상이나 저항한 흔적이 없더군요. 그럼 아마도 일격에 즉사할만한 곳을 공격했을 텐데 다른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입니까?”
“관찰력이 좋으시군요? 맞습니다. 모든 피해자의 특징이 일격에 심장을 찔렸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배를 갈라서 간을 꺼내 갑니다.”
무슨 여우 요괴라도 되는 건가? 왜 간을 꺼내 가지? 하기야 연쇄살인범들은 트로피 개념으로 신체 일부를 모으는 놈들도 있다. 대격변 이후 법이 사라진 세상이라서 연쇄살인범으로 몰리지는 않았지만, 생존자 중에서도 죽인 사람의 신체 일부를 챙기는 놈들도 있었다.
“혹시 피해자들의 유품이라거나 그런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유품을 보내줄 사람이 없는 피해자의 물건만 남아있지만, 그것이라도 보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아인 콜러를 따라간 곳에는 피해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상자들에 나눠서 보관되어 있었다.
피해자의 물건들은 각양각색이었다. 이것은 범인이 특정 계층을 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냥 재수 없게 그날 걸린 사람을 죽이는 거다. 애초에 귀족을 죽이면 일이 커질 것을 뻔히 아는데도 귀족을 죽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물건들을 고급품들이 있었다. 부유한 상인 혹은 귀족의 것이다.
“죽은 귀족이 크레타 가라이 하나가 아닙니까?”
“네, 여태까지 귀족 3명이 죽었습니다.”
귀족을 죽이고도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놈은 겁이 없다.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제정신인 놈이 연쇄살인범이 될리는 없고 완전히 정신을 놓은 놈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실 특무대가 범인일 가능성이 조금 멀어진다.
널려있는 십여 개의 상자 중에서 귀족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상자 안에 반으로 잘린 단검이 보였다. 저것은 벤프리의 모종삽처럼 오러에 의해 잘린 것으로 보인다.
‘제길, 오늘 두 번째인데.’
분명히 이것을 사용하고 나면 오늘은 두통에 시달릴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반 토막이 난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