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생존자?
기억 속으로 들어왔다.
단검의 착용자였던 귀족은 술을 거하게 걸쳤는지 비틀거리며 밤거리를 걷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음습한 뒷골목 같은 곳은 아니라서 군데군데 가로등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이것은 왕도라서 가능한 일이다. 지방 영지라면 가로등? 꿈도 꾸지 못 할 일이다.
본인이 죽을 날인줄 알았던 걸까? 귀족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걷는 도중에 몇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밤거리에는 저 멀리 보이는 행인이 한명 있을 뿐 귀족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두세번 뒤를 돌아보고 다시 걸어가려는 찰나 앞의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검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아까부터 잔뜩 경계하며 이미 허리에 찬 단검에 손을 갖다 대고 있던 귀족의 반응은 빨랐다. 하지만 오러를 잔뜩 머금고 찔러 들어오는 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검은 힘없이 반으로 잘리며 주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검은 정확히 귀족의 심장을 꿰뚫었다.
“끄으으윽”
귀족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끝나기도 전에 검이 뽑히며 그대로 가슴과 배를 갈랐다. 이미 범인은 자기 모습을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제법 큰 덩치와 조금 험악해 보이는 인상의 30대 남성이었다. 기사라는 것을 감안하면 평범하다고 할 수도 있는 외형이었다.
범인이 손을 뻗어 아직 쓰러지지도 못한 귀족의 뱃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안을 뒤적거리더니 그대로 간을 뽑아냈다. 심장을 찔리고 배가 갈라진 채로 간이 뽑힌 귀족이 바닥에 쓰러졌다. 멀리 있던 행인이 그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멀리있었고 가로등이 있다고는 해도 밤이라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는 있지만 목격자까지 있는데도 여태 범인을 여태 잡지 못했다는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범인은 갑자기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왕실 특무대처럼 전신을 가리는 타이즈를 입은 것도 아니다. 범인의 차림새를 살펴봤지만 딱히 마법 물품으로 보이는 목걸이나 반지 같은 것도 없었다. 애초에 범인을 마법사가 추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것은 마법이나 마법 도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대체 무슨 능력을 사용한 것일까? 내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범인은 입을 크게 벌리더니 뽑아낸 간을 밀어 넣었다.
사람의 간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크다.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한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범인의 턱은 마치 뱀처럼 크게 벌려지더니 간을 꿀꺽 삼켜버렸다.
이 자식 어쩌면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렇게 완벽하게 사람으로 위장해서 오러까지 쓸 수 있는 괴물이 있던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안에서는 없다.
“으흐흐흐!”
한입에 간을 삼킨 녀석이 기분 나쁜 음색으로 낮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그리고 나타날 때처럼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전신에 살짝 푸른빛이 감돌면서 모습이 사라져간다. 그리고 그 푸른빛 잔상이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남았다가 사라졌다.
범인이 사라지자마자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이 있었다. 역시나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튀어나오는 검은색 전신 타이즈를 입고 있는 이들이었다.
왕실 특무대다. 아주 간발의 차이였다. 범인이 조금 전까지 있던 곳의 여러 방향을 막은 채 나타난 특무대는 나타나자마자 여러 가지를 확인했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대원도 있었고 피해자와 주변을 살피는 대원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어 보였다. 놀랍게도 범인은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다. 추적 마법이라는 것은 지구의 과학 수사대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단순하게 마법의 사용 유무를 찾아 추적하는 것부터 오러나 마나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은 물론 발자국이나 혈흔을 찾아 추적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범인이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상적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확인”
이러니 치안대에서도 못 잡는 것이 당연하다. 왕실 특무대에서도 못 잡는 범인을 치안대에서 어떻게 잡겠는가? 특무대는 나타났을 때처럼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저쪽 멀리 특무대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광경을 목격한 행인이 보였다. 그것이 기억의 끝이었다.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동시에 지독한 두통이 함께 찾아왔다. 뇌가 달궈지는 불쾌한 느낌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불쾌한 것이 있었다.
푸른빛이 감돌며 사라지는 기술, 나는 저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을 영체화라고 불렀었다. 아무리 깊은 방공호나 쉘터에 숨어도 변이체를 막지 못했던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이천시의 생존자들을 전멸시켰던 변이체가 사용했던 기술이다. 처음에는 순간이동 같은 것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것은 이천시를 탈출하고 한참 후에서야 알았다.
증평에서 만난 생존자 중에 같은 기술을 쓰는 사람이 있었다. 영체화라는 이름도 그 생존자가 자기 능력을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었다.
영체화는 도망치는 것에 무적인 기술 같지만, 변이체가 쓰는 것과 다르게 생존자가 쓸 때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다. 일단 이동 거리가 그리 길지 못했고 자주 사용하지도 못했다. 영체화를 가지고 있던 생존자를 죽인 것은 변이체가 아니었다. 영체화의 약점을 잘 알고 있던 같은 쉘터의 생존자였다.
만약 연쇄살인범이 쓴것이 영체화가 맞다면 특무대가 아무 흔적도 찾지 못한 것이 설명된다. 그리고 여러가지 의문이 생긴다.
범인은 생존자인가? 어쩌면 나보다 일찍 통로를 열고 이쪽 세상으로 건너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간을 먹는 것을 보면 정상인 인간 같지는 않았다. 이것을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내가 알던 생존자는 저렇게 영체화를 연달아서 사용하지 못했었다.
간을 먹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인육을 먹는 생존자를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턱을 그렇게 벌리는 것은 나처럼 신체 변형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나도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누군가 다른 사람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일단 생각을 그만두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머리가 아프다. 내가 머리를 부여잡고 엉거주춤하게 일어서자 슬라이트가 재빨리 다가와 나를 부축해줬다.
“왜 그러냐? 또 어디 아프냐?”
“그래, 갑자기 머리가 아프네.”
“넌 은근히 약골이군.”
능력을 사용하면서 요즘 자주 아팠던 것은 맞지만 슬라이트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왠지 열이 받는데 화를 내려고 하니 머리가 더 아파서 그만두었다.
“빅터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부축한 슬라이트가 아인 콜러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니 갑자기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사건 현장이라도 보여드리려고 했는데요.”
“다음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치안대를 벗어났다. 치안대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스테이시에게 질문을 했다.
“저 아인 콜러라는 마법사에 대해서 잘 알아?”
[이야기는 조금 들어봤어요. 유능한 수사관이라고 들었어요.]
유능하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수사를 잘하는 것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처세를 잘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아인 콜러도 마탑 소속인 거지?”
[네, 그럴 거예요.]
“그럼 저 사람에 대해서 조금 알아봐 줄 수 있겠어?”
[기한이 있는 건가요?]
“빠를수록 좋아.”
[바로 가보도록 할게요. 마탑에 가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내가 볼 때 아인 콜러는 우리에게 숨기는 것이 있었다. 목격자가 있었다면 분명히 특무대에 대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 부탁을 받은 스테이시는 바로 자리를 떠나 마탑을 향했고 마동차를 따로 가져오지 않은 스테이시를 위해 마그나가 함께 따라갔다.
그리고 우리는 붕붕이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다. 슬라이트가 운전을 하려는 것을 억지로 빼앗아 자칼에게 맡겼다. 가뜩이나 머리가 울리는데 폭주족보다는 답답하더라도 안전 운전이 나은 법이다.
집에 돌아와 두 시간쯤 쉬고 있을 때 마탑으로 향했던 스테이시와 마그나가 돌아왔다.
“그 아인 콜러라는 수사관, 아버지와 선이 닿은 사람이었더군. 그러나 상당히 유능한 수사관이라고 했다.”
“역시 그런가?”
소파에 누워있는 내 옆으로 다가온 마그나가 힘없이 말했다.
“너는 그것을 눈치채고 알아보라고 한 것인가?”
“그렇지.”
“난 전혀 짐작도 못 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또 아버지에게 이용 당할 뻔했군. 그래 자네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속셈은 뭐지?”
“그건 사람을 모아놓고 한 번에 얘기하는 것이 낫겠어.”
잠시 후 명문가 4종 세트를 모두 모아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내가 알아낸 모든 것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적당히 각색해야만 했다.
“아마도 오페르 후작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무엇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범인이 왕실 혹은 에인프라흐 공작가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정확히는 특무대겠지만 거기에 에인프라흐 공작가를 끼워 넣었다. 원래 잘 먹히는 거짓말은 사실에 가짜를 적당히 섞어 넣는 것이다.
“뭐라고?”
슬라이트가 발끈했다. 반면에 마그나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를 치안대 쪽으로 보낸 거지. 우리 손으로 범인을 잡도록 유도한 거야. 오페르 후작가과 연이 있는 아인 콜러는 그래서 거짓말을 한 거고.”
[그럼 연쇄살인범이 왕실 쪽 사람이라는 건가요?]
“아니, 그래서 착각이라고 말한 거야. 왕실이나 에인프라흐 공작가가 왕도에서 그런 짓을 벌일 이유가 있어? 범인들이 정치적으로나 무엇으로나 제거 대상이라면 모를까. 피해자들은 공통점도 거의 없는데? 오페르 후작가는 뭔가 잘못된 정보를 입수했던 거야. 그래서 유능한 수사관이라는 아인 콜러가 적극적으로 수사를 하지 않고 있던 거고. 우리에게 떠넘긴 거지.”
내 설명에 다들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이제 무엇을 할 생각이지?”
“확실한 것은 내무대신님의 계략에 넘어가 줄 생각은 없다는 거지.”
“그래서 뭘 할 거냐고.”
화가 난 슬라이트가 나를 다그쳤다.
“아무것도 안 한다.”
“뭐?”
“우리가 뭔가를 하기를 원하는 거잖아? 그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맞지.”
“그, 그런가?”
슬라이트가 당황했다.
“나도 동의한다. 아버지가 파놓은 계략에 일부러 넘어가 줄 필요는 없지.”
마그나도 내 말에 동의했다.
[아인 콜러의 행동은 스승님에게 보고하겠어요. 같은 마탑의 동료를 이용하려 했다니 용서할 수 없군요.]
스테이시의 눈에 잠시 광기가 보였다. 미친 마법사 모드에 들어간 모양이다.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는 밖에서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마탑이 우선이다. 아인 콜러의 행동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고로 일단 휴식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것은 애들을 떼어놓기 위한 수단이었고 나는 범인을 계속 찾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생존자일 수도 있는 사람이다.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지구에 가는 것도 포기하고 하루를 푹 쉬고 나자 두통이 사라졌다. 오전에는 며칠 빼먹은 수련에 참여하고 나서 오후에는 집사를 통해 부른 찰리 데커를 만났다.
“오랜만입니다.”
찰리 데커의 눈에는 약간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내가 불렀을 때는 항상 상단에 이득이 되는 제안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한 가지 부탁을 드릴 일이 있어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무엇이라도 말씀하십시오. 제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업 제안이 아닌데도 찰리 데커는 조금의 실망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동안 수행을 많이 쌓은 모양이다.
“돌턴골드 상단은 외식 사업이나 먹거리 쪽도 손을 많이 대고 계시죠?”
“네, 덕분에 그쪽 방면으로 사업이 제법 커졌지요.”
육류의 유통과 치킨의 판매로 인해 먹거리 쪽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룬 돌턴골드 상단이었다. 물론 그 성장에 상당한 지분은 나에게 있었다.
“혹시 관련된 다른 상단과 연락도 가능하십니까?”
“물론입니다. 모든 상단은 아니지만, 친분이 있는 상단은 많이 있지요.”
“한 달 정도 기간 내에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많은 양의 음식을 먹거나 식재료를 주문한 기사를 찾을 수 있을까요?”
“기사들은 대부분 그렇게 먹지 않습니까?”
활동량이 많은 기사는 보통 사람들보다는 확실히 많이 먹는다. 당장 우리 집에서 기생하고 있는 식충이들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상식을 넘어설 정도로 많이 먹는 기사를 찾고 있습니다. 사탕이나 설탕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기사도 부탁드립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왜 찾으십니까?”
나 혼자 영체화를 마음대로 쓰는 생존자를 이 넓은 왕도에서 찾을 방법은 없다. 그리고 특무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왕실에서도 뭔가를 눈치채고 움직이는 것인데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다.
다만 두 가지 능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나처럼 능력을 전승받은 사람일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사탕을 잔뜩 쌓아놓고 먹듯이 영체화나 신체 변형을 사용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특별히 대사량이 높은 기사와 승급에 관한 연구를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것을 도와줄 기사를 찾고 있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둘러대었다. 나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기사들을 승급시키는 것으로 왕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그것에 관한 연구를 하겠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것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제가 아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찾아드리겠습니다.”
찰리 데커는 활짝 웃으며 승낙했다. 승급에 관한 것으로 돌턴골드 상단도 상당히 재미를 보았다. 내가 의뢰해서 미리 갖춰두었던 토끼꼬리 풀의 씨앗이라든지 모두의 왕국 판매도 있었다.
며칠 후 찰리 데커로부터 한 장의 문서가 배달되었다. 찰리 데커가 왕도의 모든 식료품점을 탈탈 털어 수집한 정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