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61화 (61/206)

61. 정체

놈이 생존자라면 외모는 아시아계라고 생각할 수는 없기에 일단 영어로 말을 걸어보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공격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검을 꺼내 몇 합 상대해주고 다시 거리를 벌렸다. 아무리 몸을 부풀리고 힘이 늘어난 녀석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내 상대는 아니었다. 놈도 그것을 느꼈는지 바로 공격해 들어오지 않고 숨을 골랐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난 너와 이야기만 하려고 온 것이었어.”

물론 거짓말이다. 녀석이 생존자이거나 나와 같은 전승자라고 해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구에 데리고 들어온 이상 녀석은 죽어야 한다. 애초에 사람 간을 빼먹는 미친 연쇄살인범을 세상에 다시 풀어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뭐?”

녀석은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내가 치안대 사람으로 보여? 일단 밖에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이곳에서 몇 번 싸웠더니 방 안이 남아나는 것이 없었고 당장 벽이 무너질 지경이다. 그리고 구석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공벌레들도 신경 쓰였다.

그리고 녀석에게 기상연구소 밖의 풍경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녀석이 만약 통로를 열어 지구를 오갈 수 있는 전승자라면 이곳이 지구라는 것을 당장 알아챌 것이다.

녀석이 생존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전승자일 가능성도 조금 낮게 보고 있었다. 만약 녀석이 통로를 열 수 있었다면 이미 문을 열고 도망쳤을 것이다.

“너 그 능력을 써서 도망치려면 밖이 더 편하잖아?”

내가 먼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듯이 손을 들어 올리고 천천히 밖으로 나가자 녀석도 잔뜩 경계하며 천천히 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복도를 지나 바깥으로 나왔다. 지구의 기괴한 풍경을 보고 녀석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확신했다. 이놈 전승자도 아니다. 지구에 와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환각 마법이 아니었던 건가? 여기는 어디지?”

“지구”

“지구? 그게 어디지? 장거리 이동마법이라도 쓴 것인가?”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녀석은 생존자도 아니고 전승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저 생존자와 변이체들이나 가지고 있던 영체화를 어떻게 손에 얻은 것일까?

“너 그 능력을 어떻게 얻은 거지?”

“그게 왜 궁금한가?”

잠시 풀어졌던 녀석이 밥을 빼앗긴 고양이처럼 날을 잔뜩 세우며 경계했다.

“나도 너하고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

그러면서 나는 왼쪽 팔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팔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녀석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팔을 돌려놓는 와중에 녀석이 공격하지는 않을까 조금 신경 쓰였지만 녀석은 변신 매너를 지켜주었다.

“아오 씨, 더럽게 아프네”

왼쪽 팔만 빅터 하네스가 된 기괴한 모습이 되었지만, 녀석에겐 오히려 지금 이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녀석에게서 느껴지던 적대감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고통은 금세 사라졌지만, 능력을 사용하자 밀려오는 공복감에 사탕을 한 주먹 꺼내 우둑우둑 씹어먹었다.

“너도 교단에서 탈출한 건가?”

“교단?”

녀석의 입에서 처음으로 정보라고 할만한 것이 튀어나왔다.

“아닌가? 너야말로 그 힘을 어떻게 손에 넣은 거지?”

교단이라고 하면 무슨 사이비 종교에서 녀석에게 영체화나 신체 변형을 쓰는 힘을 줬단 말인가? 이 세상에는 신성 왕국이 멸망한 이후로 공식적인 종교가 없다. 그렇다고 아예 종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사이비 취급이고 실제로도 사이비 종교가 맞다.

그리고 이런 힘을 줄 만한 종교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단 하나밖에 없었다.

“마왕교 말하는 거야?”

“아니다. 마신교다.”

이건 또 뭐지? 한단계 업그레이드한 건가? 어차피 그게 그거인 것 같아서 따지지는 않았다.

“아니야, 난 마왕교도 마신교도 아니다. 이 힘은 그냥 갑자기 얻게 됐어, 우리 집 공사를 하던 중에 아무도 모르던 지하실이 하나 발견됐거든 거기 악마의 팔이 하나 있었지. 악마의 팔인 줄도 모르고 손을 댔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이런 능력이 생겼다.”

사람을 잘 속이는 거짓말은 8할의 진실에 2할의 거짓을 섞는 것이다.

“그런 경우도 있는 건가?”

“그럼 너는 그 마신교라는 곳에서 힘을 준 거야?”

“그렇다. 너와 다르게 나는 이 힘을 얻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했지.”

희생이 있거나 말거나 마신교라는 곳에서 이런 힘을 줄 능력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럼 간을 먹는 것도 힘을 얻기 위한 과정인가?”

“아니다. 그건 그냥 맛있어서 먹는 거지.”

역시 미친놈이었다. 원래도 살려놓을 생각이 없긴 했지만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 마신교라는 곳은 어디에 있는데?”

“그게 왜 궁금한가?”

조금 누그러졌던 녀석의 경계심이 다시 발동되었다.

“너도 그 마신교에서 탈출했다며? 별로 좋지 않으니까 그런 것 아니야? 나도 눈에 띄면 잡혀갈까 봐 그러지.”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많은 것을 생각하는 눈치였다. 제정신이 아닌 놈이지만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니다. 진짜 멍청한 놈이었다면 진즉에 특무대에게 잡혀 끌려갔을 것이다.

“알려주기 싫어?”

“아니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응?”

“듣기로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조직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은 이 능력을 얻은 지부뿐이다. 왕도에도 지부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딘지도 알지 못한다. 실제로 있는지도 의문이다.”

점조직 형태라는 건가? 뭐 사이비 종교는 보이는 대로 척결하는 것이 이 세계 모든 나라의 공통점이니 그런 식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마신교라고는 하지만 마왕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종교인데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렇군. 그런데 뭐가 의문이지?”

“내가 지부를 탈출해서 왕도까지 온 것은 당연히 추적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단에선 나를 추적하지 않았지, 왕도에 있다는 지부에서도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추적한 것은 이상한 검은색 옷을 입은 놈들 뿐이지.”

이상한 검은색 옷이라면 이놈도 특무대가 추적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교단에선 이 녀석을 왜 추적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추적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워낙 도망치는 것에 특화된 녀석이다.

“그래서 그 지부는 어디에 있었는데?”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다. 암테일 영지라고 아는가?”

순간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왜 많고 많은 영지 중에 하필이면 거기인가? 스승님의 영지이자 내 가족들이 내려가 있는 곳이다.

“왜 그런가? 아는 곳인가?”

“알고 있지. 나도 그곳 출신이거든. 왕도에 올라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

내 거짓말에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어쩌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교단의 영향을 받아서 마신의 힘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너는 어떻게 힘을 얻었는데?”

“교단의 신관이 내리는 축복을 받았지. 사실 축복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신관이 주는 약을 먹었으니까.”

희생이 어쩌고 했지만, 별거 아니잖아? 약만 먹으면 변이체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라.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과연 왕실은 어디까지 알고 특무대를 보내 이 녀석을 잡으려고 했을까?

“희생이 크다며 생각보다 쉬운데?”

“그 약을 만드는 데 재료로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을 갈아서 만드는 약이거든 재료로 내 가족을 사용했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꽤 들어갔고 그런데 뭐 그게 희생이라는 것은 아니야. 어차피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

이것은 생각 이상으로 미친놈이다. 사람을 재료로 만드는 약이라... 그렇다고 해도 이해는 되지 않는다. 단순히 사람을 갈아먹는 것으로 이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 그랬다면 대륙 남부 어딘가에 아직도 있다는 식인종들은 전부 능력자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대체 어딘가? 지구? 들어본 적이 없는 영지인데. 풍경도 이상하고 말이야.”

“이건 내가 얻은 능력 중에 하나야. 여기가 어딘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내가 그냥 그렇게 부르는 거야. 하지만 근처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확실해 아마 북부 어딘가가 아닐까 싶어.”

대충 시간을 끌며 녀석에게 어떤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너도 나처럼 몸을 변화시키지?”

“그렇다. 너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하지, 나는 고통이 없거든.”

“그것참 부럽네. 나는 제대로 약을 먹고 능력을 얻은 것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부러운 일이다. 신체 변형을 두세번 더 흡수하면 나도 고통이 사라질까?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군. 하지만 내가 몸을 부풀리는 것은 능력이 아니다.”

“그럼 뭔데?”

“신관의 말로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더군. 약을 계속 먹으면 완전히 본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했다.”

그거 약을 계속 먹으면 결국 나중에는 변이체가 된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구나. 그런데 너도 사라지는 기술 쓰면 배가 고프지?”

“그렇다. 지금도 매우 배가 고프지.”

“나도 그래서 이렇게 사탕을 많이 가지고 다녀, 다른 것 먹는 것보다 이게 더 낫더라고”

나는 사탕을 한 주먹 꺼내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너는 꽤 부자인 모양이군.”

“응, 돈이 부족하진 않지. 사채업을 하고 있거든. 너도 한자리 끼워줄까? 그럼 다리 밑에서 고기 부스러기 같은 것 먹지 않아도 된다.”

녀석의 입에 처음으로 미소가 띄워졌다.

“그거 좋군.”

누구라도 가난한 것은 싫다. 인간이라면 그렇다. 조금 더 좋은 곳에서 잠을 자고 싶고 좋은 것을 먹고 싶다.

내가 건네주는 사탕을 받으려고 녀석이 손을 내밀 때 다른 한손에 들고 있던 슈바르거트가 녀석의 심장을 찔렀다.

“크으윽! 네놈!”

역시 변이체 찌꺼기 같은 것이라서 심장을 찔려도 한 방에 죽지 않은 건가? 녀석은 완전히 검이 관통한 것을 확인했는데도 녀석은 뒤로 빠르게 물러나 분노하며 싸울 자세를 취했다.

정보는 얻을 만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쉽게 처리하려고 했는데 녀석의 생명력이 생각 외로 뛰어났다. 이것마저도 변이체를 따라갈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완전히 인간의 탈을 벗지 못했기 때문인지 심장을 관통당한 것은 녀석에게도 상당히 치명상인 모양이었다. 뚫린 가슴에서 뿜어지는 피를 손으로 막고 있는 녀석의 눈동자가 쉴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영체화를 써서 도망을 가야 할지 아니면 나와 싸울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 고민을 덜어주면 된다.

내가 빠르게 다시 공격할 것처럼 앞으로 짓쳐들어가자 녀석이 결국 판단을 내렸다. 녀석이 푸른색의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정면으로 부딪쳐서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아까 몇 번 검을 나눴을 때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녀석의 선택은 어차피 둘 중의 하나다. 영체화를 써서 멀리 도망가거나 아니면 영체화를 이용한 암습을 시도해서 나를 죽이거나.

하지만 내가 영체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녀석은 알지 못한다. 약한 푸른색의 잔상이 특정 방향으로 이동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아마도 녀석이 도망보다는 나를 죽이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나는 뒤로 물러나 초감각에 집중했다. 설사 내 예상을 깨고 도망가더라도 상관없다. 녀석은 어차피 죽는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미래다. 도망가서 운 좋게 도시를 찾아낸다면 그곳에 있는 변이체에게 죽을 것이고 먹을 것을 찾아 이곳에 돌아온다면 내 손에 죽는다.

어차피 공격할 때는 녀석도 영체화를 풀고 공격해야 한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내가 스승님에게 배운 검술과 훈련은 반응속도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녀석의 실력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길어야 30초, 녀석이 쓸 수 있는 시간은 그것뿐이다. 심장을 뚫린 것이 영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더 짧을 것이다.

쉬이익!

역시나 녀석은 공격을 택했다. 극도로 집중하고 있던 초감각이 뒤쪽에서 강렬한 위험 신호를 보낸다. 몸을 뒤틀며 검을 피해냈다. 옆구리 쪽에 살짝 검이 스치기는 했으나 상관없다. 나에겐 재생력도 있으니까.

놈은 내가 공격을 피해내자 매우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 차례다. 놈은 이미 능력을 사용했다. 재사용하기 전까지는 나의 시간이다.

쾅!

아까와는 다르게 오러를 가득 머금은 신검 슈바르거트가 녀석의 검을 쳐냈다. 단번에 녀석의 검이 부러지며 동강 난 검이 저 멀리 날아간다. 다리 밑에서 부산물이나 주워 먹던 녀석의 검이 제대로 된 검이었을 리 없다. 이래서 장비빨이 중요한 거다.

녀석의 시선이 부러진 검을 쫓아간다. 그 사이에 두 번째 검격이 녀석의 팔을 잘라내고 세 번째 검격이 도망치려는 녀석의 다리를 잘라냈다. 변이체는 이렇게 죽여야 한다. 물론 녀석이 완전한 변이체는 아니지만, 심장을 뚫리고도 죽지 않는 것을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

네 번째 검격이 마침내 녀석의 목을 잘라냈다. 하늘 높이 치솟았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느어···.”

바닥에 떨어진 머리통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기에 힘을 가득 실은 발로 밟아 터트려주었다.

“괴물 새끼가 사람 말을 하고 지랄이야.”

머리가 터지고 나자 느껴지던 위험반응이 완전히 사라졌다. 죽은 것이다. 녀석은 예상보다 훨씬 약했다. 그러나 이 녀석은 겨우 4성 기사이고 그중에서도 단련을 게을리한 녀석이다. 마신교라는 곳의 숨겨진 힘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으나 6성 기사쯤 되는 인물이 내가 알고 있는 변이체의 능력 중 전투에 특화된 것을 얻기라도 한다면 변이체의 끈질긴 생명력과 더해져 스승님이라고 해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실험해볼 시간이 왔다. 반의반 쪽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지만, 과연 이 되다만 변이체 놈도 나에게 능력을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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