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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62화 (62/206)

62. 하늘 위에서

이미 여러 번 경험했던 일이라 딱히 긴장이 되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가지고 싶었다. 영체화는 확실히 탐이 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있으면 목숨이 여벌로 하나 생기는 것이나 다름없다.

손끝이 시체에 닿는 순간.

느껴졌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역시 반푼이였기 때문일까. 영체화를 얻게 된 것은 맞는데 불완전한 각성이었다.

각성은 하지 못했는데 억지로 능력을 가지게 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자세한 것은 직접 사용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기 좋지 않게 널려있는 시체를 수거한 뒤 새로 얻은 능력을 사용해 보았다. 연달아 몇번을 사용해 보고 얻은 결론은 연쇄살인범이 쓰던 능력보다는 못하다. 정확히는 내가 알던 생존자의 수준과 비슷했다. 역시 직접 변이체의 무언가를 받아들인 것과 일반적인 생존자의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10초라면 대단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다. 통로가 열려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공벌레들은 아직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몸을 말고 있었다.

이것도 먹을까 궁금해서 연쇄살인범의 시체를 던져줬더니 꼬물거리며 다가와서 먹긴 먹는데 뭔가 지난번 변이체의 시체를 먹을 때처럼 정신없이 먹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이들이 맛없는 것을 억지로 먹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이 마신교라는 것들은 변이체, 이쪽 세상에서는 악마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을 만드는 놈들이다. 모든 국가들이 악마라면 치를 떨지만 개인적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다.

과거 용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말살했던 마왕교도 어쩌면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렇게 지독히 추적해서 마지막 한명까지 죽였을 것이다. 다만 기록으로 나미 않은 것은 그런 마왕교의 힘이 알려지는 것을 우려해서가 아니었을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한밤중이었다. 슬라이트 놈이 어딜 갔다 왔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대충 여러 사업 얘기로 둘러댔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 집에서 조금 다른 의미의 졸업자가 나왔다.

바깥에서 급보로 전해진 소식에 마그나가 급하게 짐을 싸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와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 일이었다.

“미들턴 오페르가 연쇄살인범에게 당했다고 하더군요.”

우리에게 자세한 전말을 알려준 것은 아이브 공주였다. 이야기를 들은 우리 모두 깜짝 놀랐다.

“심지어 집에서 자다가 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여태까지 사건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던 대귀족들도 난리가 났어요.”

밖에서 평민이나 하급 귀족을 죽이는 것과 집 안에 있던 대귀족의 후계자를 죽이는 것은 명백히 다른 이야기다.

“그래서 마그나가 인사도 없이 집으로 돌아간 것이었군.”

“그럴 만도 하지 이건 생각 이상으로 큰 사건이야.”

확실히 왕도가 뒤집어질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치안대를 맡고 있던 아인 콜러가 단번에 경질되었고 마탑으로 돌아간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스테이시가 지난 번 일로 뭔가 준비해둔것 같으니까.

국왕은 공식적으로 연쇄살인범에 대한 수배를 내렸고 왕도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덕분에 왕도의 치안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 그동안 암암리에 봐주고 있던 범죄자들과 재주껏 몸을 숨기고 있던 범죄자들이 수없이 잡혀 들어갔다.

우리는 며칠 후 미들턴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마그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동생이 죽었지만, 오히려 마그나의 얼굴은 예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내무대신은 아들이 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가 죽었으니 후계자는 완전히 정해진 셈이다.

어딘가에 숨겨둔 자식이 갑자기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확실한 정실의 장남인데다 젊은 나이에 4성 기사가 된 마그나의 입지를 흔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군.”

겨우 며칠 만이지만 마그나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우리 집으로 돌아올 일은 없는 거지?”

“그래, 아쉽지만 그렇게 되었다. 이제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하니까.”

마그나는 정말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보낸 시간이 그에게는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수사에 진전은 좀 있어?”

가장 난리가 난 곳은 당연히 오페르 후작가였다. 크게 분노한 오페르 후작은 가문의 모든 역량 동원해 왕도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이건 비밀이다만 그날 가문의 하인 중에 범인의 얼굴을 본 자가 있다. ”

“그래?”

“전에 아버지의 더러운 일을 맡아서 하다가 실종된 기사가 있다고 하더군. 그놈의 얼굴을 그날 미들턴의 방 근처에서 본 하녀가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더욱 분노하셨지.”

“원한 관계인가? 그럼 연쇄살인범의 범행이 아니지 않나?”

“수법을 모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살해 수법이 완전히 같다고 하더군. 저택 안에 어떻게 침입해서 어떻게 빠져나갔는지도 의문이고 말이야. 어쩌면 녀석이 진범일지도 모르지.”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극악무도한 사람도 아니지만 이번 일을 후회하진 않는다.

마그나와 작별 인사는 그렇게 미들턴의 장례식장에서 이뤄졌다. 물론 영원한 작별은 아니기에 슬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그나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니까.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며칠간 고민했던 일을 스승님에게 털어놓고 상의하기로 했다. 암테일 영지에 관한 일이었다. 어지간한 일이라면 혼자 해결해 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스승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스승님의 방을 찾아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래 이제 이야기해 보거라.”

오러를 사용한 기막으로 방음이 이뤄진 것이 느껴졌다.

“요즘 그 떠들썩한 연쇄살인범 있잖습니까?”

“그래, 대귀족의 후계자를 해쳤으니 당연한 일이지.”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직도 이게 최선의 방법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가족들이 걸린 문제다.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그놈 제가 죽였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큰 포상을 받게 되겠구나.”

스승님은 크게 기뻐하셨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녀석이 마신교라는 곳의 소속이었으며 이미 왕실의 추적을 받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마신교의 지부가 암테일 영지에 있다는 것을 스승님에게 알렸다.

이야기를 다 들은 스승님은 기막이 조금 흐트러질 정도로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그래, 보통 일이 아니다. 잠시만 생각하자꾸나.”

스승님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시더니 다시 눈을 뜨셨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네가 비밀을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너를 추궁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일이 조금 꼬였을 뿐이지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지 않으냐? 나는 너를 믿는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저는 또 스승님을 속였습니다.’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숙인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뒤처리는 제대로 했고?”

“그것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겁니다.”

“그럼 되었다. 큰 상을 받아야 할 네가 오히려 죄인이 된 것 같구나. 그리고 내 영지에 사악한 종교가 있다는데 영주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당장 가야겠구나.”

그렇게 암테일 영지로 가는 것이 확정되었다. 다음 날 스승님이 영주로서 처음으로 암테일 영지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알렸고 나도 따라간다고 했다.

“나는 따라간다.”

슬라이트놈이 제일 먼저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죄송해요. 저는 이곳에 남아 연구를 하고 싶어요.]

스테이시는 왕도에 남는 것을 택했다.

“어···.”

소심한데다 판단 장애가 있는 자칼은 그냥 데리고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곳에 혼자 남아봐야 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평소엔 저래도 막상 대련 같은 것을 하면 뛰어난 5성 기사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전력은 확보하는 것이 좋다.

철권단도 의견이 갈려서 일부는 따라오고 일부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폴켄도 이번에는 저택에 남기로 했다. 아무래도 꼬꼬들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빠진 사람이 꽤 있는데도 열명이 넘어 마차를 타고 가긴 좀 그래서 마도 기차를 예약하려고 할 때 슬라이트가 끼어들었다.

“기다려봐라 형님에게 연락 좀 해보겠다.”

그렇게 슬라이트가 사라지더니 잠시 후 저택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날아왔다. 비공정이었다. 왕실을 제외하곤 진짜 부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교통수단이라고 해야 할까.

비공정 자체의 가격도 엄청나지만, 유지비가 어마어마하고 들었다. 가끔 왕도의 하늘 위로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형님이 잠시 빌려주신다고 하더군.”

슬라이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지만, 은근히 어깨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

“큰 도련님에게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스승님은 또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셨다. 가까이에서 본 비공정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우리 집에 남는 땅이 넓어서 망정이지 잘못하면 착륙도 못 할 뻔했다.

떠날 사람들은 각자 빠르게 개인물품을 챙겨 비공정에 탑승했다. 비공정 내부에는 꽤 많은 승무원이 있었고 우리의 안내를 도왔다.

비공정에 타고 자리에 앉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전생에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다. 해외여행은커녕 제주도도 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이렇게 비공정도 타보게 되었으니 조금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공정이 중력을 거스르고 두둥실 떠오르자 철권단의 일부 왕도 촌놈들이 탄성을 질렀으나 나는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만약 그랬다간 옆에 앉은 슬라이트 놈이 며칠은 놀려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창밖으로 내다보는 왕도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수직으로 떠오르던 비공정이 멈추고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슬라이트가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영지는 왜 방문하시기로 한 거야?”

“영주로서 여태 한 번도 방문하신 적이 없으니까.”

“보고는 자주 올라오지 않아?”

“영지 운영은 잘 되고 있지.”

아버지와 벤 행정관은 예상대로 영지 운영을 잘하고 있었다. 임시로 영지를 관리하고 있던 왕실 소속 관리가 생각보다 영지 관리를 잘하고 있었고 그것을 문제없이 이어받았다.

아무리 관리가 운영을 잘하고 있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임시다. 여러 가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기는 어렵다. 아버지와 벤 행정관이 부임한 후로 영지의 사정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영주로서 한번은 방문하셔야지.”

“그건 그런데 너무 갑자기라서”

“왕도가 어수선하니 잠시 떠나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건 그렇군.”

지금 왕도는 여전히 쑤셔놓은 벌집과 같았다. 연쇄살인범을 잡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으나 미들턴을 마지막으로 연쇄살인범은 종적을 감췄다. 왕실을 비롯해 정치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던 모든 귀족이 힘을 합쳐 범인을 잡으려고 왕도를 들쑤시고 있었으니 민심은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무수한 용의자들이 잡히고 있으나 결국 진범은 잡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왕실이 마신교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조용한 것을 보면 뭔가 대책이 있을 것이다.

암테일 영지는 왕도에서 가깝다고는 하나 마차로 가면 6일 정도의 거리고 마도 기차로 가면 3일이고 이렇게 비공정으로 간다면 하루가 조금 더 걸린다.

하지만 아직 비공정을 군사용으로는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비공정을 군사용으로 사용하려면 마법 포대나 고위 마법에 대한 방비가 필요한데 그러려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돈이 들기 때문이다.

빠르긴 했지만, 마도 기차처럼 편의 설비가 잘 갖춰진 것이 아니어서 하루 동안 자리에 앉아있기만 한 것은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돌아갈 때는 그냥 마도 기차를 타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암테일 영지에 도착했다. 갑자기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비공정을 보고 암테일 영지의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훤히 보였다.

하지만 비공정이 하강하자 비공정의 하단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상징을 알아봤는지 이내 소란은 잦아들었고 영주성에서 급하게 뛰어나오는 아버지와 형이 보였다.

비공정이 착륙하고 스승님이 선두로 내려서자 아버지는 깜짝 놀라 병사들에게 영지의 진짜 주인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영지에 소속된 병사들과 기사들이 도열한 가운데 우리는 그 사이을 지나 영주성으로 입성했다. 그리고 나는 가족들과 오랜만에 재회하여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즐거움은 거기까지였다.

아버지와 벤 행정관 말고도 영지에 소속된 관리는 꽤 많다. 그리 큰 영지가 아니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비교적 그렇다는 것이지 사는 사람이 적다는 것은 아니다.

영지에 소속된 많은 관리가 처음으로 방문한 진짜 영주에게 인사를 올렸고 소영주나 다름없는 나도 옆에 장식처럼 앉아있어야 했다.

그렇게 관리들과 인사를 하고 평소에 서신으로 받는 간략한 보고가 아니라 자세한 보고를 받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이거 직접 해보니 보통 일이 아니로구나. 공작님이 큰 도련님에게 일을 모두 맡기고 여행을 다니시는 것이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어.”

영주 업무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처음인 스승님은 며칠 만에 눈이 퀭하게 보일 정도였다. 기사단장이셨다고는 해도 평생 검이나 휘둘렀지, 본격적으로 행정업무를 보는 것은 처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옆에서 최대한 도왔으나 이때다 하고 기회를 잡은 벤 행정관이 내미는 업무량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다른 일거리도 가져왔다.

“그런데 우리가 할 일이 생겼구나.”

“네, 이럴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마신교의 지부만 찾아서 박살 내고 돌아갈 생각으로 온 것인데 스승님과 내가 할 일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이것은 당장 찾을 수도 없는 마신교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스승님은 퀭한 얼굴로 밝게 웃으셨다. 스승님의 입장에서는 그럴 것이다. 이건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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