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왕관을 쓴 새
“괜찮아? 뛸 수 있겠어?”
아직 쓰러져있는 자칼에게 묻자 자칼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서는데 검을 들었던 한쪽 팔이 불편해 보였다. 나도 자무새의 공격을 막아내고 팔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곧바로 작동한 재생력이 아니었다면 나도 자칼과 비슷했을 것이다. 수십미터를 날아갈 정도로 강한 충격을 검으로 받아냈으니 멀쩡하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럼 빨리 튀자!”
자칼이 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 뒤를 따라 뛰며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자무새가 뿜어낸 보라색 독무를 그대로 맞고 계신 스승님이 보였다.
“스승님···.”
스승님을 부르려는 찰나 보라색 독무가 일정 거리 이상 스승님의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기야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가.
당장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여전히 자무새의 입에서 고압으로 뿜어지고 있는 보라색 독무에 닿는 물체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고압의 독무에 직격하는 물체들은 부식되거나 녹는 것이 아니라 마치 소멸하는 것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뿜어졌던 독무가 넓게 퍼지고 있었다. 당장 그것에 닿고 있는 바위 같은 것들이 멀쩡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저것에 닿거나 한 모금이라도 들이킨다면? 내 위험 감각이 알려주건대 아마 지옥행 로켓배송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보라색 독무가 짙어지며 스승님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초감각에는 스승님이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가까스로 독무의 영향권 밖으로 피신한 우리는 재빨리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내리고 가지고 있던 해독제와 포션을 마셨다.
슬라이트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딱히 외상은 없어 보이지만 내상이 있을지도 몰라 바닥에 눕혀놓고 강제로 입을 벌려 약병을 거꾸로 박아 넣었다.
포션과 해독제가 꿀렁거리며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슬라이트가 깨어났다.
“쿨럭! 뭐, 뭐야?”
“뭐긴 뭐야? 한 대 맞고 기절한 거지. 어때 괜찮아?”
“자무새는? 내가 한칼 먹였는데?”
슬라이트는 자신이 목숨을 걸고 했던 공격의 결과를 알고 싶은 모양이었다.
“피 두방울쯤 흘리더라. 정신차려.”
슬라이트는 분한 표정으로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인상을 쓰며 옆구리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갈비뼈가 몇 대 나간 모양이다. 하지만 5성 기사에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스승님과 대련할 때도 그 정도 부상은 셀 수도 없이 당했다.
그때 스승님이 드디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 움직임은 마치 빛과 같았다. 우리를 상대로 대련할 때는 결코 보여주지 않았던 속도와 움직임이었다.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자무새의 앞에 도달했고 도착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검이 움직이고 있었다.
쩌엉!
굉음이 울려 퍼졌다. 놀라운 것은 자무새가 그것을 날개로 받아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스승님의 검은 이미 다시 자무새의 목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스승님의 검은 마치 시간을 거스르는 것처럼 조금의 틈도 없이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무새는 그런 공격을 받아냈다. 쉴 새 없이 굉음이 울려 퍼지며 그 충격파로 인해 주변에 깔렸던 독무가 더 멀리 퍼지기 시작했다.
“더 멀리 떨어져야겠다.”
우리는 독무에 닿지 않기 위해 자리를 이동했다. 질 좋은 포션 덕분인지 그 사이에 자칼과 슬라이트가 이미 많이 회복한 것이 느껴졌다.
“넌 저게 느껴지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보라색 독무 때문에 확인이 되지 않는 슬라이트가 물었다. 거리가 꽤 벌어져서 슬라이트의 감각으로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지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안에서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스승님과 자무새의 공방에 의한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응, 느껴지지”
“어떠냐?”
어떠냐고? 저걸 인간의 전투라고 할 수 있을까? 7성 기사가 진심으로 내는 힘을 처음 보는 나로서는 그 힘에 경악하고 있었다. 저 정도라면 전성기의 변이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7성 기사가 이 정도라면 초월의 경지에 들었다는 과거의 용사들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일까? 어쩌면 전설처럼 내려오는 허황된 이야기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무새가 그런 7성 기사와 거의 백중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상급 마수의 힘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전성기의 변이체에는 조금 미치지 약할지 몰라도 지금 지구에 살아 남아있는 약해진 변이체들보다 강하다.
“보기에는 백중세, 그런데 아무래도 스승님은 여력이 있으신 것 같다.”
확실히 그렇게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고 있으나 자무새가 사력을 다하고 있다면 스승님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아무리 상급 마수라고 해도 성체도 아닌데 7성 기사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7성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니까. 즐기시는 것 같다.”
슬라이트가 웬일로 이치에 맞는 말을 했다. 스승님은 벽을 뛰어넘으신 후 제대로 힘을 사용해보신 적이 없다. 기껏해야 5성 기사 몇놈을 상대하신 것이 전부였으니 얼마나 답답하셨겠는가?
그런데 이상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자무새는 죽는다. 자무새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직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도망은커녕 아직 자무새는 그 자세 그대로 일어서지도 않고 있었다.
대체 저 자무새가 품고 있는 것은 무엇이기에 저렇게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하는 거지?
자무새와 스승님은 전투는 길게 지어졌다. 이제 자무새가 뿜어냈던 보라색 독무도 많이 흩어져 슬슬 눈으로 둘의 전투를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스승님은 여태까지 사용해보지 못했던 기술을 모두 시험해보고 계셨고 아직도 여유로워 보였다. 반면에 자무새는 패색이 짙은 모습이었다. 아름다웠던 깃털은 엉망이 되어 빛을 잃었고 전신의 크고 작은 상처에서 보라색 피가 흘러내려 신비로운 초록색이었던 전신이 이제 보라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5성 기사를 일격에 날려버렸던 강력한 날개는 망가져 흉한 모습이 되어 있었고 길고 아름다웠던 꽁지깃은 반쯤 잘려서 볼품이 없어졌다.
“이제 끝내자꾸나.”
제법 먼 거리였지만 스승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똑똑히 들렸다. 일부러 우리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신 모양이었다. 아마도 강한 공격을 하실 것 같다. 그것을 보고 배우라는 의미일 것이다.
끼우우우!
자무새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낮은음의 울음소리를 내며 준비했다.
스승님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승님의 검이 사라졌다. 검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분명 천천히 움직였는데도 불구하고 움직임을 놓친 것이다.
검이 그려낸 완벽한 반원의 궤적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자무새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변이체도 아닌데 머리가 떨어진 생명체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자무새 또한 스승님의 검을 놓쳤고 최후의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목이 잘렸다.
내가 자무새 대신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지 못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피할 수는 있었을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비록 느려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저 검을 막거나 피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몇명 되지 않을 것이다.
스승님은 뒤로 돌아 검을 몇 번 더 휘두르셨다. 그러자 검이 만들어낸 바람에 의해 아직 남아있던 독무들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온갖 이능을 가진 변이체와 생존자들이 지배했던 대격변 이후의 지구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던 나의 생각으로도 이것은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한 힘이다. 7성 기사가 이 정도다. 그렇다면 8성 기사인 국왕이나 에인프라흐 공작은 얼마나 강할까?
“이리 가까이 오거라”
스승님의 부름에 우리는 재빨리 다가갔다. 스승님이 왜 우리를 불렀는지는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쓰러진 자무새가 목숨을 걸고 지켰던 둥지 내부가 보였다. 바위가 움푹 파여 안에는 제법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보통 닭과 비슷한 크기의 새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외형은 아직 병아리처럼 솜털이 가득 나있었지만, 깃털의 색이나 생김새를 봤을 때 그것은 자무새의 새끼였다.
“새끼입니까? 아직 성체가 아니라면서요?”
“맞습니다. 직접 낳은 새끼는 아니겠지요.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발아한 형제일 겁니다.”
슬라이트의 물음에 스승님이 답하셨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겠지만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서 발아한 동족인 것이다. 성체가 된 마수는 번식하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아직 어린 개체였다.
“그런데 목숨을 바쳐가면서 지킬 이유가 있었을까요?”
마수라는 것이 이 정도로 동료애가 강한 녀석들이 아니다. 그런 내 물음에 스승님이 검으로 새끼 자무새의 머리를 가리켰다.
“여기를 봐라.”
녹색 솜털이 가득한 정수리 부근에 은색의 깃털 몇 개가 솟아있었다.
“특수 개체군요.”
“그렇다. 이것을 보통 관이라고 하지 지금은 작은 깃털 몇가닥이지만 성체가 되면 이것이 마치 왕관처럼 변한다. 관을 쓴 마수는 보통 마수보다 몇 배는 강하지 만약 이놈이 보호받고 성장했다면 좀 전의 자무새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했을 거다.”
종족의 왕으로 태어나는 녀석들이다. 일반 마수들은 이런 특수 개체를 왕처럼 섬기며 복종하고 보호한다. 옆 나라인 제멜아크 왕국 동쪽 끝의 사막지대를 지배하고 있는 크락슈라는 마수 무리의 왕이 금색 왕관을 쓰고 있다는 기록을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이런 특수 개체는 굉장히 낮은 확률로 태어나는데 그것도 상급 마수의 특수 개체가 상급 마수와 함께 동시에 발아했다니 역사를 뒤져봐도 몇 없을 정도로 희귀한 일이었다.
만약 두 마리가 성체가 되었다면 스승님으로서도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국가적 재앙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암테일 영지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런데 이 녀석들 이미 사람도 사냥했었군.”
이동을 멀리하지 않았으니 그것을 보충할 다른 먹이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단순하게 사냥이나 열매 같은 것을 구할 것이라면 얼마든지 날아서 구해올 수 있지 않았을까? 어째서 자무새는 이곳을 떠나지 못했을까?
둥지 안에는 동물과 사람의 뼈가 이리저리 널려있었고 그들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물건들도 보였다.
스승님이 검이 무정하게 한 번 더 움직였고 겁에 질려있던 은색의 관을 가지고 태어난 새끼 자무새가 숨을 거뒀다.
“일단 뒷정리를 좀 하겠습니다. 너희도 도와라.”
“알았다.”
“으, 응”
슬라이트와 자칼이 따라나섰다. 스승님이 한껏 즐기신 덕분에 자무새의 깃털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저것 하나마다 극독이 발라져 있으니 당연히 치워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로는 비싸다. 자무새의 독은 여전히 고가의 상품이다.
상급 마수의 시체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자무새들의 시체들을 챙기고 깃털을 빠르게 수거하기 시작했다.
“크흠, 나도 거들어주마.”
“아닙니다. 스승님은 쉬십시오.”
잔뜩 어질러놓은 것이 미안하셨는지 스승님도 헛기침을 하며 나서려고 하셨지만 나는 그 정도로 배은망덕한 제자가 아니기에 스승님에게 노동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둥지 안에 널려있는 사람의 유골과 소지품들도 수습했다. 비록 값나가는 물건은 없어 보이지만 어쩌면 유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품을 정리하는 도중 특이한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제법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마감이 된 작은 수첩이었다. 나는 수첩을 들어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유족을 찾을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수첩은 이곳에 버려진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지 안의 종이가 피에 절어 쓰인 글자가 다 번져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었지만 간혹 남아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단어 몇개 사이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신교
다른 설명이 뭐가 필요한가? 내가 우려했던 부분 중 하나가 들어맞을지도 몰랐다.
마신교는 정말 마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가? 혹은 조종이 가능한가? 나는 근처에 있던 유품들을 모조리 챙기고 일어서서 멀리서 우리가 뒷정리를 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시던 스승님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스승님 잠시 이것 좀 보십시오.”
나는 수첩을 펼쳐 그 부분을 스승님에게 보여드렸다. 스승님의 미간이 심하게 좁혀졌다.
“일단 비밀로 하자꾸나. 성으로 돌아가서 얘기하자.”
“예.”
아직 슬라이트나 자칼에게도 비밀로 해야 했다. 비밀이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엄연히 슬라이트나 자칼은 자신들의 가문이 우선인 사람들이다.
이 이야기가 에인프라흐 공작가나 에르하트 후작가에 전해져 나에게 좋은 것이 없다고 판단했고 스승님도 같은 생각을 하신 모양이었다.
비록 수첩의 내용을 거의 알아볼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수첩에 사이코 메트리를 걸었다.
정리를 완벽하게 마치고 우리는 산을 내려갔다. 자무새를 처치한 이상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산 아래에는 듀라 경이 우리와 헤어졌던 그 자리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자세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내려오셨군요.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네, 덕분에 잘 해결되었습니다.”
듀라 경의 물음에 내가 대답하자 평생 그대로일 줄 알았던 듀라 경의 표정이 변화가 생겼다.
“영주님과 소영주님은 암테일 영지의 축복입니다.”
노기사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나 나는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