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암행
산 위에서 읽은 수첩의 기억이 문제였다.
끼루루루룩!
스승님에 의해 처치된 자무새가 거칠게 홰를 치며 울었다. 그러나 수첩의 주인을 포함한 일단의 무리는 자무새가 두렵지도 않은지 거침없이 자무새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빨리하시오.”
혼자서 움직이지 않고 가장 뒤에 남아있던 한 중년인이 사람들을 독촉했다. 그러자 젊은 사내들이 서둘러 자무새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봐도 자무새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만약 정상이었다면 이미 근처에 다가간 사내들은 자신과 동료들의 몸으로 조각모음을 해야 했을 것이다.
아무리 자무새가 정상이 아니라고 해도 사내들은 믿는 구석이 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자무새가 보인 틈을 타서 둥지 안으로 파고들었다.
수첩의 주인도 둥지 안으로 뛰어내렸다. 그런데 안에 보이는 내부의 풍경이 문제였다.
둥지 안에는 우리가 죽인 은색의 관을 쓰고 있던 새끼 자무새보다 훨씬 작은 거의 병아리 수준의 자무새 두 마리가 있었다.
분명히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였다. 아직 병아리였지만 머리 위에 오롯이 솟아오른 은색의 깃털은 분명히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금색의 깃털이 있었다.
“어서 잡으라고, 저 금색 털 가진 놈부터.”
잡은 병아리를 담으려는 듯 자루를 꺼내든 사람의 명령에 수첩의 주인이 금색 깃털을 가진 병아리를 잡으려고 했다.
키이이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자무새가 스승님과 싸우며 온몸이 피범벅이 됐을 때도 내지 않았던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긴 꽁지깃을 둥지 안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별다른 실력이 없어 보이는 둥지 안의 사내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재앙이었다. 5성 기사를 일격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던 공격이다. 설령 어느 정도 실력이 있었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첩의 주인의 주인을 포함한 몇 명의 사내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쓸려나갔다. 확인할 필요도 없는 즉사였다. 몸이 반토막이 나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나 둥지에 뛰어든 사내들은 많았고 남은 사내들이 금색 털을 가진 병아리를 자루에 담는 것이 보였다.
수첩의 기억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상급 마수 하나가 나타난 것 이상이었다. 마신교 놈들이 잡아간 자무새의 새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마신교가 잡아간 것은 일반적인 상급 마수도 아니다. 금색의 관을 쓰고 태어난 왕의 자질을 가진 자무새다.
자무새가 왜 둥지에서 멀리 떠나지 않고 은색 관을 가지고 태어난 자무새를 지켰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이미 금색 관의 자무새를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은색 관을 쓴 자무새는 무슨 수를 써서 지켰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으로 치면 눈뜨고 자신의 왕을 잃은 신하랄까.
왕을 잃은 경험이 있는 자무새는 홀로 남은 왕자만은 무슨 수를 쓰든 지키려고 했을 것이다.
자무새를 혼란에 빠지게 했던 마신교의 사내도 문제였다. 나는 그것과 비슷한 능력을 알고 있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변이체 중에 그와 비슷한 능력을 쓰는 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부산 쪽에서 올라온 생존자가 해준 이야기였다. 그곳에 나타난 변이체는 스스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수천 명에 이르던 대형 쉘터의 생존자들을 죽였다고 했다.
정신 교란, 상대의 정신에 간섭하는 능력이었다. 자무새가 정신 못 차리고 금색 관의 자무새를 빼앗긴 이유였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능력이다. 차라리 물리적인 능력이라면 스승님이 상대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마법이나 오러 어떤 방법으로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본인의 강한 의지 혹은 강한 충격이 있으면 정신 교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만났던 생존자는 정신 교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가락 세 개를 잘라냈다고 했다. 재생력이 잘린 손가락도 붙일 수 있을까? 시험해본 적이 없기에 재생력 하나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이 세계에는 포션이라는 아주 뛰어난 치료 약이 있다.
포션으로 붙여놓고 재생력이 발동한다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고 해도 다른 일행들은? 오히려 스승님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스승님에게 정신 교란에 제대로 걸린다면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스승님의 정신력이 그 정도로 약할 것 같진 않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이다.
그리고 내가 알아낸 것을 스승님에게 알릴 수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제가 수첩에 깃든 기억을 읽었는데요. 마신교 놈들이 금색 깃털의 자무새를 잡아갔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무리 스승님이 나를 믿어준다고 할지라도 일단 머리 쪽에 치료를 생각해 보실지도 모른다.
“듀라 경, 듀라 경은 누구보다 이 영지에 대해 잘 아시겠죠?”
영주성으로 돌아가는 중에 나는 듀라 경에게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혹시 무언가를 감추려고 할 때는 영지의 어디에 숨을까요?”
“감추려고 하는 물건에 따라 다르겠지요.”
“살아있는 생물이라면요?”
“음, 큰 동물입니까?”
“아니요. 크지 않습니다.”
아직은 그럴 것이다. 우리가 죽인 은색 관의 자무새와 같은 크기일 테니까.
“작은 동물을 밀수하는 녀석들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디에라도 숨을 수 있지요. 암테일 영지가 그리 작은 영지가 아닙니다.”
듀라 경은 내가 밀수범을 잡으려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암테일 영지가 백작령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좁은 영지도 아니다.
“그럼, 사람이 많이 모이지 않는 곳 중에서 범죄자들이 자주 숨는 곳이 있습니까?”
내 물음에 듀라 경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꽤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내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소영주님 제가 나이가 있다 보니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생각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아닙니다. 그럴 수 있지요.”
“제가 이 영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그런 일이 제법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떠올리자니 시간이 오래 걸렸군요. 전부 말로 설명해 드리기는 좀 어렵고 쉬는 시간에 지도를 보며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스승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멈추셨다.
“듀라 경 여기서 잠시 쉬고 가도록 하지. 여기 경치가 아주 좋군. 차나 한잔해야겠어.”
“예, 영주님”
듀라 경은 충성스러운 기사처럼 직접 차를 타려고 준비했지만, 이것은 내 몫이었다.
“듀라 경 잠시 쉬고 계시지요. 제가 하겠습니다. 이럴 때 쓰려고 마법을 배운 것이지요.”
나는 능숙하게 마법을 사용해 물을 끓이고 찻잎을 꺼내 물을 부어 스승님에게 먼저 드렸다. 이제 나름 다도에도 조금 조예가 생겼다. 같이 살고 있는 놈들이 죄다 명문가의 자식들이니 자동으로 배워지는 일들이 다소 있었다. 다도 역시 그중의 하나다.
거기에는 말없이 옆에서 찻잔을 내밀고 있는 뻔뻔한 놈의 지분이 적지 않았다.
“줘”
한 번도 직접 차를 끓이지 않는 주제에 내가 탄 차에 대해 혹평을 서슴지 않는 녀석이다. 덕분에 다도를 조금 더 빨리 배울 수 있었다.
듀라 경과 자칼에게도 차를 따라주고 나자. 어느새 차를 다 마신 슬라이트 놈이 다시 찻잔을 내밀었다.
“더 줘”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더 내놓으라는 것을 보니 이제 내 차 끓이는 기술도 제법 경지에 오른 모양이다. 내민 찻잔에 차를 다시 부어주고 덤으로 독이 듬뿍 발린 자무새 깃털을 하나 꺼내 담가주었다. 뒤에서 슬라이트가 행복한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이미 듀라 경에게 가고 있었다.
듀라 경은 이미 영지의 지도를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검사의 길을 걸으신 것이 안타깝습니다.”
듀라 경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 성장에 대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마검사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대부분 사람의 생각이었고 그것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특수한 예외에 속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듀라 경으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제 선택에 후회는 없으니까요.”
“그렇지요. 이미 훌륭하게 성장하셨으니까요. 잠시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듀라 경은 영지의 지도를 펴놓고 여러 지점을 짚어가며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슬라이트와 자칼도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와서 그것을 듣고 있었다. 듀라 경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할아버지가 해주는 옛날이야기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 계곡 근처에는 예전에 도적단이 생겼던 적이 있습니다. 80명 정도로 제법 규모도 컸었지요. 두목이 기사급 실력자였습니다. 산채를 지어놓고 저항하는 통에 토벌이 꽤 오래 걸렸지요. 대규모 인원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쪽 카스라 산의 주변에는 나무가 높게 자란 숲이 있어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밖에서 알기 어렵습니다. 밀렵꾼들의 본거지가 생겼던 적이 있지요. 놈들이 덫을 설치하면서 도망치는 바람에 추적하며 꽤 많은 병사가 상했습니다.”
듀라 경의 설명은 끝이 있나 싶어질 정도로 이어졌다. 듀라 경은 그야말로 암테일 영지의 살아있는 역사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것을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고 최대한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단순히 이번 사건뿐만이 아니라 언젠가 내가 이 영지의 주인이 된다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이었다.
“대충 이 정도입니다. 도움이 되겠습니까?”
대충이라고는 했지만 언급된 사건이 40개는 넘었다.
“대단하십니다.”
“마, 맞아요. 우리 영지에도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기사는 없어요.”
슬라이트와 자칼의 감탄에 듀라 경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물론입니다. 듀라 경.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도를 제가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나는 듀라 경에게 지도를 건네받았다. 다소 긴 설명이었지만 듀라 경의 자세한 설명으로 마신교의 지부가 있을 만한 후보지를 몇군데 추릴 수 있었다.
“스승님, 저는 여기서 따로 암행을 나가고 싶습니다.”
척하면 척이다. 마신교의 존재를 알고 계신 스승님은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으셨을 것이다.
“괜찮겠느냐?”
“저 혼자 움직이는 것이 편합니다. 어차피 영지를 둘러보는 것뿐이니까요.”
정신 교란 때문에 스승님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그래, 그럼 이것을 가져가거라. 빈자리가 있으면 채워지는 것도 있는 법이지.”
스승님은 에인프라흐 공작에게 받았던 기세를 감추는 반지를 빼서 내게 건네주었다. 순간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7성 기사의 기세에 멀리 있던 듀라 경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렇군요. 감사히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스승님의 말씀은 다른 뜻도 품고 있었다. 내 정체를 숨기는 효과도 있지만 스승님이 이렇게 기세를 마구 뿜으면서 영주 성으로 돌아가면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조심하거라.”
“걱정 마십시오. 스승님이 상대라고 해도 도망갈 자신이 있습니다.”
스승님은 농담으로 생각하셨는지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런데 나는 농담이 아니다. 완전치 못하다고는 해도 영체화를 이용하면 스승님의 그 마지막 절기가 아닌 한 그 자리에서 도망은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금방 따라잡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어, 너 뭐냐. 혼자 어딜 가?”
혼자서 떠나려는 나를 슬라이트 놈이 붙잡았다. 이번에도 따라올 생각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영지의 일이다. 외부인은 데리고 갈 수 없어.”
내 단호한 말에 슬라이트가 대단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귓속말로 덧붙였다.
“어쩌면 영주성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스승님이 계시지만 모두를 지킬 수는 없겠지. 가족들을 부탁한다.”
슬라이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물론 마신교가 영주성을 직접 공격할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알았다.”
물론 이렇게 슬라이트를 쉽게 떨어뜨리는 효과도 있었다. 슬라이트가 마치 막중한 임무를 받은 기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나는 자칼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슬라이트 놈 사고 못 치게 잘 지켜봐라.”
“내, 내가?”
“응, 네가”
자칼이 어리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나는 재빨리 말에 올라타 달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듀라 경이 스물 몇번째인가로 말했던 폐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