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67화 (67/206)

67. 그놈의 목소리

듀라 경이 설명해준 지역들을 보며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먼저 비밀을 지키기 용이한 곳인가 하는 것이었다.

대체 이 마신교라는 단체가 언제 생겨서 얼마나 확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왕실의 추적을 피하며 생존할 수 있었다면 어떤 것보다도 비밀 엄수를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실체가 조금이라도 발각되었다면 왕실에서 여태까지 가만히 두고 봤을 리가 없다. 혹시 보통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지낼 가능성도 생각해보았다.

물론 그런 교도들도 있을 것이나 지금 내가 쫓고 있는 것은 자무새의 새끼다. 그런 것을 데리고 보통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자무새를 데려가 무엇을 하려는지도 모르겠고 정신 교란의 힘이 얼마나 될는지는 몰라도 자무새가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가둬두기도 어려울 것이다. 뭔가 노리는 바가 있으니 자무새를 잡아갔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른다.

어쨌든 자무새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꽤 여러 명의 사람들이 숨어지내면서 의심받지 않을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첫 번째로 선택한 곳이 폐광이었다.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이번에는 부디 찍기가 잘 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말을 달렸다.

가는 도중에 마을에는 들리지 않았다. 나의 움직임 역시 은밀할수록 좋았다. 마을로 들어가 신분증을 제시하는 것이 혹시 모를 마신교의 끄나풀들에게 보인다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역시 나는 아직 이 세상의 숙소를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왕도에 있는 호텔급이라면 모를까 이런 지방에서 평민들이 묶는 여관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지구로 넘어가서 잠을 자는 것이 편하다.

마을을 거치지 않고 가급적 눈에 띄지 않는 샛길을 골라 달렸다. 시골은 유난히 밤이 빨리 찾아온다. 왕도처럼 밤에도 마법으로 등을 밝히는 것은 지방 도시에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시골의 산길은 말할 것도 없다.

“널 어쩌면 좋을까?”

반나절 동안 달리는데 수고한 말을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승마술이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닌데도 잘 달려준 순한 녀석이다.

이 녀석을 밖에 두자니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지구로 데려가자니 혹시나 지구의 마나 영향을 받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이미 성장이 끝난 녀석이니 꼬이나 꼬삼이처럼 커지진 않겠지만 빛닭이나 철닭이처럼 이능력이라도 가지게 되면 어딘가 끌려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고민 끝에 아직 이름도 모르는 녀석이지만 말과 함께 지구로 넘어갔다.

히히힝!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 조금 놀랐는지 울음을 터트렸지만, 워낙 순한 녀석인지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한쪽에 못 쓰는 옷가지 같은 것을 깔아주고 마실 물과 먹이를 줬다.

밤에 지구로 넘어오는 것은 이젠 나에게 너무 평범한 일상이다. 기상연구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곳을 떠나면 편의시설이 없는 것도 있지만 이곳에 정이 들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생에 죽기 전과 이번 생을 합쳐서 이곳에서 지낸 시간이 꽤 길다. 크리스타 영지의 집을 제외하고 전생을 통틀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익숙하다.

그래도 떠나야겠지. 이번 일만 마무리하고 나면 거처를 옮길 것이다. 늘 그렇듯이 자기 전에 수련하고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길지는 않았지만, 낮의 격렬했던 전투가 몸에 부담이 간 모양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이었다. 여전한 불면증이다. 요즘 들어 조금 더 심해진 것도 같다. 준비해둔 식량 중 고열량의 재료를 꺼내 요리를 시작했다.

어제 재생력을 발동한 여파가 아직 남아있었다. 자무새의 일격에 자칼의 팔이 부러졌듯이 나도 손목 쪽에 금이 갔던 것 같다. 재생력이 발동한 덕분에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고통을 참는 것은 익숙하니까. 물론 신체 변형을 할 때의 그 지독한 고통은 나로서도 참기 어려운 극악한 고통이다.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쓸 수 있다면 고문에 최고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그 뭐냐 무협지에 나오는 고문 방법인 분근착골? 그것이 실존한다면 비슷한 고통일 것이다. 생각하다 보니 좋은 방법이었다. 정신 교란을 가진 녀석과 싸울 때 나는 과거에 만났던 생존자처럼 손가락을 자를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신체 변형을 사용하면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상대가 능력을 사용하기 전에 영체화로 다가가서 죽이는 것이다. 나는 아공간에 챙겨두었던 자무새의 둥지에서 회수한 유품들을 꺼냈다.

수첩 말고도 유품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신발과 옷가지 등 원형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주인을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은 회수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회수한 물건으로는 질 낮은 단검 몇 자루와 가죽 허리띠 몇 개 그리고 반지가 하나 있었다. 비록 구리반지라서 값어치는 별로 없겠지만 나에게는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무언가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비밀단체인 만큼 특이한 것을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았다. 아마 수첩을 남긴 것도 녀석들의 실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몸에 지니고 다녔을 반지라면 그 사람에게는 꽤 중요한 물건이 아니었을까?

사이코 메트리를 사용해 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어쩌면 녀석들의 지부 위치를 알아낼 단서가 나올지도 모른다.

이런 것은 생각났을 때 해야 한다. 아침밥을 먹다 말고 반지의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반지의 시점에서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반지의 기억은 오롯이 19금 방송 수준의 그것이었다.

아마도 반지 주인의 부인이나 애인이었을 것 같은데 말 한마디 없이 그것만 하는 기억이 반지에 담겨있었다. 더욱 화가 나는 부분은 미인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뭐 가끔은 이렇게 꽝도 있는 법이다.

사이코 메트리가 강화된 이후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 중에 여러 가지의 기억을 읽었다. 스트라이더 997번 안에는 슈바르거트 말고도 보물급의 물건이 세 개나 더 있었고 그 외에도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도 있었다. 부작용이 사라지는 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그것들의 기억을 하나씩 읽었는데 대부분은 지금처럼 아무 쓸모 없는 기억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아직 잠이 덜 땐 말을 깨워 밥과 물을 먹이고 다시 길을 나섰다. 아직 폐광에 도착하려면 하루 정도는 더 달려야 했다.

점심나절 쯤 되어 말에게 휴식 시간도 줄 겸 길 밖으로 벗어나 한적한 곳에 멈춰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 무리가 길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짐마차 한 대에 마부를 제외하고 마차를 따라 걷는 사람 7명이다. 얼핏 보기에는 소규모 상단처럼 보였기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점점 가까워지며 초감각에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이것들 상단이 아닌데?’

마부를 제외한 전원이 오러사용자다. 상단이 고용한 용병대라 하기에도 수준이 너무 높다. 4성 기사 한명에 여섯 명이 3성인 듯 하다. 짐마차에 무엇이 실려있는지는 몰라도 이런 변두리에서 보기에는 과한 호위다.

나는 계속 식사 준비를 하는 척을 하며 지나가는 짐마차를 지켜보았다. 거리가 가까워지며 그쪽도 나를 본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다른 일이 중요하기에 먼저 나서서 조사한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나는 그리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내 범위 안에 들어오는 사람에겐 분명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어디까지나 범위 안이다. 바깥에 있는 사람에겐 신경 쓰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지나갔던 짐마차가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혼자 말을 타고 있었고 저쪽을 짐마차를 따라가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이곳은 갈림길도 자주 나오지 않는 샛길이었기에 마주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대로 속도를 유지하자 천천히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상대들도 나를 발견하고 조금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갑자기 전투준비를 한다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혼자였고 저쪽은 자신들의 실력이 자신이 있을 것이다.

이윽고 거리가 아주 가까워졌다. 나는 초감각을 활용해 천으로 덮여있는 짐마차 안에 무엇이 실려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다. 일단 살아있는 생물은 아니었다. 뭔가 기다란 물체였는데 아마도 상자가 아닌가 싶었다.

이런 변두리에서 보기 힘든 수준 높은 용병들이 호위할 만큼 비싸거나 중요한 물건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그대로 짐마차와 호위들을 지나치며 선두에서 걷고 있는 4성 기사에게 살짝 묵례를 건넸다. 길에서 만나는 여행자들끼리 적의가 없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자 4성 기사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여행 되시오.”

나도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그런데 방금 4성 기사의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다. 내가 천재는 아니지만 근래에 들었던 목소리를 잊을 정도는 아니다. 거기에 상대는 4성 기사다. 이 영지에 와서 듀라 경과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4성 기사다. 다른 곳에서 목소리를 들어봤을 리가 없다.

“실례지만 어디 용병단의 분들이신가요?”

“그것은 갑자기 왜 물어보시오?”

내 질문에 경계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리 강한 경계는 아니다. 나는 지금 스승님이 주신 반지를 끼고 있으니 평범한 소년으로 보일 것이다. 아니 평범한 소년은 아닌가? 혼자서 말을 타고 다니니 돈 좀 있는 철없는 소년으로 보일 것이다.

“보다시피 저 혼자 이렇게 여행하고 있는데 혼자다 보니 어려운 점이 간혹 있어서요. 다들 실력이 출중해 보이시는데 고용할 수 있을까 해서요.”

“우린 장기 임무 중이니 한동안 다른 의뢰는 받을 수 없소.”

목소리를 계속 들어봐도 분명히 어딘가에서 들어본 목소리다. 그러나 외모는 기억에 없다.

“그럼 혹시 실력 있는 분들을 알고 계시면 추천이라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용병 사무소에 가면 알아서 추천해 줄 것이오. 이보시오 공자, 우린 오랜 여행 중이라 신경이 제법 날카롭소 그러니 가던 길을 가시오.”

“아, 네 실례했습니다.”

기억을 떠올리려고 계속 말을 걸었더니 상대의 인내심의 한계가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나는 일부러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 속도를 냈다. 자연스럽게 짐마차와 조금 거리가 벌어졌다.

‘분명 어디서 들은 목소린데’

한번 시작된 의문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래서 적을 상대할 때 의심을 심어주는 방법이 항상 먹히는 것이다. 예전에 적대적인 다른 생존자 무리를 상대할 때 나도 자주 사용했었던 방법이다.

조금 앞서나간 나는 일부러 일정 거리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자 저쪽에서 휴식을 외치며 길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저쪽에서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심성이 많은 녀석들이다. 그것도 필요 이상이다. 보통 이런 놈들은 분명 뭔가 구린 구석이 있는 놈들이다. 아니면 마차에 실린 저 물건이 그만큼 민감한 물건이라는 것인데 마차에 실린 저 기다란 상자의 형태도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다.

“아?”

갑자기 한가지가 떠올랐다. 우리 집 지하에서 발견되었던 악마의 팔이 들어있었던 상자가 딱 저런 형태였다. 그럼 녀석들이 마신교도인가? 이렇게 다니기에는 수준이 높긴 하지만 용병 단으로 위장한다면 크게 의심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증거가 없다. 녀석들이 마신교라고 연관 지어서 생각하니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뭐해? 어서 빨리 잡으라고, 저 금색 털 가진 놈부터!”

어제 들었던 그놈의 목소리다. 물론 현실이 아니라 수첩의 기억을 읽으며 들었던 목소리다. 자무새의 둥지에 뛰어들었던 마신교도 중에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이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 얼굴은 당연히 기억나지 않았고 기억을 읽는 것이니 녀석의 실력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지금부터 녀석들과 아주 깊은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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