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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68화 (68/206)

68. 바닥 아래 바닥

내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기 시작하자 놈들이 매우 귀찮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왜 다시 돌아오셨소? 분명 내가 우리는 바쁘다고 했소만”

두목은 은근히 기세를 피워올려 나를 위협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가다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돌아왔어.”

더 이상 존대를 해줄 필요는 없다. 설령 그냥 아주 우연히 목소리가 비슷한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뭐요?”

“내가 말이야. 이 영지의 소영주였더라고.”

놈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를 상대로 장난을 치자는 건가?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두목 놈이 인상을 쓰며 대놓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맞는데? 나는 빅터 하네스다. 이번에 새로 암테일 영지를 하사받은 노엘 브라스 백작의 첫번째 제자지.”

녀석들의 표정이 변했다. 이 녀석들 알고 있다. 일반 백성들이야 영주가 바뀌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소식이 늦기도 하고 어지간히 악덕 영주가 아닌 이상 자기네들 사는데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이번에 몇 개 마을을 지나면서 만난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찾아가기 전까지 촌장들도 소식이 늦은 사람은 새로운 영주가 임명됐다는 사실을 몰랐다. 듀라 경이 아니었다면 영주라는 것을 입증하느라 고생 좀 했을 것이다.

용병들이 비교적 소식이 빠른 편이라고는 해도 한군데에 정착한 용병들이나 그렇지, 떠돌이 용병들은 아니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눈치다.

“증명할 수 있겠소?”

두목 놈의 말투가 다시 돌아왔다. 동시에 여태까지는 그냥 지나가는 미친놈을 보는 눈이었다면 조금 경계하기 시작했다.

“볼래?”

나는 내 신분증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4성 기사라면 이 거리에서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소영주님이셨군요. 몰라봤습니다.”

금세 태도를 바꾼 두목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녀석들도 어정쩡하게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만 보면 이놈들은 완벽한 용병대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괜찮아. 나도 까먹고 있었는데. 그런데 내가 지나가면서 보니까 말이야. 저 마차에 실린 짐이 무척 수상해서 다시 돌아왔어. 이 영지에서 당신들 정도 되는 용병들이 호위하면서 갈만한 물건이 뭔지 궁금하단 말이야.”

“대단히 귀한 물건입니다. 그것밖에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의뢰라서요.”

“그럼 목적지는?”

“그것 역시 비밀입니다.”

용병의 의뢰는 무조건 믿을 수 있다.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신뢰의 상징이다. 의뢰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용병은 사무소에서 일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상황은 언제라도 일어난다.

“그래도 나는 봐야겠는데?”

가령 우연히 만난 소영주가 억지를 부린다든가 하는 상황이다.

“좀 봐주십시오. 저희 용병은 신뢰를 바탕으로 밥을 먹고 사는 놈들입니다.”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가 뭔데?”

“상자를 열면 안에 내용물이 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단히 비싼 물건입니다.”

말로는 봐달라고 하고 있지만 녀석들에게서 적의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뭐 녀석들이 마신교가 아니라 진짜 용병이라 할지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물건이 상하면 내가 변상해주지. 그리고 의뢰자에게도 따로 사과하겠어. 열어.”

나는 턱짓으로 짐마차를 가리켰다.

“안 됩니다.”

두목 놈이 짐마차 앞으로 움직이며 내 시선을 가로막았다.

“열라고 했다.”

“그런데 진짜 소영주님이 맞으십니까? 빅터 하네스 공자는 왕도에서도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녀석의 의문을 표했다. 반지의 효과가 대단하다고 봐야 할까?

“정보력이 좋은데? 보통 용병들이 그런 것까지 알고 있나?”

“워낙 명성이 대단하셔서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진짜 맞습니까?”

“맞을걸? 그래서 나에게 증명하라는 건가?”

“그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여기서 죽이기라도 하게?”

분위기가 갑자기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인적도 드문 샛길이다. 소영주 사칭범 하나 죽인다고 뒤탈이 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나도 너희들에게 저것이 수상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를 주지. 마지막으로 말한다. 열어라.”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말 없는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녀석들 몇 명은 이미 슬그머니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한명이라도 검 뽑는 순간 다 죽는다.”

나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경고했다. 시선은 정확히 두목 놈의 눈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녀석들이 정말 자신들을 감추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나와 마찰을 일으킬 리가 없다. 하지만 저 상자에 들어있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다면 절대로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외통수에 빠진 기분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믿겠습니다. 물건이 상했을 때 배상 약속은 지키신다고 믿어도 되겠지요?”

“정보가 밝다면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왕도에서 손을 댄 사업은 전부 성공했어. 돈이 많다는 얘기지.”

진짜 부자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제법 여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알겠습니다. 이봐 열어라.”

부하들이 짐마차를 덮고 있던 천을 걷어내자 2m 정도 되는 기다란 나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는 한눈에 봐도 제법 고급인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진짜 비싼 물건이라면 아공간에 넣었어야 했다.

부하들이 완전히 밀봉했던 상자의 봉인을 뜯어내고 마지막으로 두목이 단단히 잠겨있던 자물쇠를 열었다.

“가까이 다가와서 보셔도 됩니다.”

“아니야. 그냥 열어도 돼”

내가 너의 뭘 믿고 거기에 가까이 가겠냐. 두목이 상자의 뚜껑을 잡고 힘을 쓰자 상자가 열리기 시작했다. 상자 안에 든 물건은 나조차도 예상외의 것이었다.

“300년 정도 된 생각초입니다. 아직 살아있기에 아공간에 담지 못했지요.”

초록색 작은 이끼가 깔린 상자 안에 잔뿌리가 상자 안을 가득 채운 거대한 뿌리식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초라는 뿌리식물은 꽤 희귀한 약초다. 일단 영초이기 때문에 가격은 당연히 엄청나게 비싸다.

그리고 생각초라는 이름답게 심신의 안정을 주는 용도의 약으로 쓰이기도 한다.

두목은 내가 확인한 것을 보자마자 급하게 다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보셨다시피 햇볕을 쫴서 좋은 것이 없는 귀한 물건입니다. 되셨습니까?”

녀석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어떠냐 한 방 먹었지?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 한가지 틀린 점이 있다.”

“이번엔 또 뭡니까?”

“그거 이미 죽었어.”

“뭐라고요? 식물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아십니까?”

죽은 것은 맞다. 그것은 이미 내가 초감각으로 확인한 것이니까. 그리고 한가지가 더 있다.

“응, 난 알아.”

“억지도 적당히 부리십시오!”

“기다려봐”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말에서 내려 말을 근처의 나무에 묶어놓고 짐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정말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두목과 부하들이 동시에 검에 손을 가져갔다.

“싸우자는 거 아니야. 그리고 먼저 말했다. 뽑으면 다 죽인다. 믿어도 좋아.”

내가 검을 뽑은 것은 정말로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정말 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녀석들이 마신교의 졸개가 아닐 가능성을 아직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켜”

짐마차에 가볍게 뛰어올라 앞을 가로막은 두목 놈을 비키게 했다.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내야 하실 겁니다.”

두목은 마지막까지 협박을 잊지 않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300년짜리 생각초의 가격을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가격은 모르겠지만 분명 엄청난 가격일 거다. 하지만 내가 노리는 것은 생각초가 아니다.

나는 거침없이 상자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동시에 옆에 있는 두목 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스윽!

마치 두부를 자르듯이 상자의 끝부분이 세로로 잘렸다. 녀석은 매우 놀란 것 같았다. 아무런 기세도 느끼지 못했는데 검에 오러를 실어 일 검에 상자를 잘라버렸으니까. 하기야 나도 이 반지의 기능을 처음 알았을 때 많이 놀랐다.

내가 자른 것은 상자의 끝부분이었다. 물론 생각초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어쩌면 내 것이 될 수도 있는 귀한 영초인데 상하게 하면 나만 손해이지 않은가?

나는 상자의 잘린 부분을 발로 툭 걷어찼다. 그러자 상자의 단면이 드러났다.

“이것 봐라? 밑에 공간이 숨어있네?”

나는 검으로 상자의 단면을 가리켰다. 이끼가 깔린 곳의 아래에 다른 공간이 있었다. 초감각이 없었다면 나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잠깐 보였던 부분과 겉으로 보이는 깊이가 차이 나는 것을 초감각이 알려주었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두목이 진짜 몰랐던 것처럼 뒷걸음질을 치며 손사래를 쳤다. 근데 그 표정과 몸짓이 너무 진짜 같았다. 이놈들 설마 진짜 몰랐던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놈들이다. 같은 마신교라도 하급 교도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 뭐가 들었나 볼까?”

나는 이 아래 공간에 뭐가 있을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맞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상자의 뚜껑을 열고 일단 아공간에 생각초를 챙겨 넣었다.

“거봐 죽었지?”

살아있는 생물은 아공간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자리에서 생각초가 죽은 것을 증명한 것이다. 녀석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검을 길게 휘둘러 상자의 윗부분을 잘라내고 들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숨겨두었던 상자의 비밀이 드러났다.

“이게 뭔지 내게 설명해줄 사람이 있을까?”

몸이 굳어버린 녀석들은 한번 쓸어보았다. 몇놈은 상자 안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이미 몸을 벌벌 떨고 있었고 바로 옆에 있는 두목의 시선은 비밀의 공간에서 나온 물건에 박힌 채로 움직일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말린 오징어 다리처럼 생긴 것이었다. 상자만큼이나 길었고 촉수의 끝에는 갈고리 모양의 이빨 같은 것이 잔뜩 달려있어서 자신은 오징어가 아님을 표현하고 있었다.

나도 이런 촉수가 달린 변이체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다. 나는 피난 생활 중에 해변 쪽으로는 간 적이 없었다. 일찍 인천 쪽에서 넘어온 생존자들이 바다는 육지 이상으로 지옥이라는 말을 해줬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바다 쪽에서 거주하던 생존자들은 내륙으로 몰려들었다.

내륙이라고 변이체가 없는 것은 아니고 이곳도 지옥이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이 말하기로는 그래도 해변보다는 낫다고 했었다.

만약 바다에 변이체가 없었다면 인류의 생존율은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바다는 식량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육지 깊숙한 곳으로 올라오진 않지만, 바다에서 서식하는 변이체 중에 이런 촉수를 가진 놈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왜 말이 없지?”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런 것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두목 놈은 이제 식은땀마저 줄줄 흘리고 있었다. 다른 부하들은 모르겠지만 이놈은 이것이 뭔지 분명 짐작하고 있다.

“내가 알려줄까? 그런데 내 입에서 그게 거론되는 순간 어떻게 될지는 알지?”

“사, 살려주십시오.”

두목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나라면 한 번쯤 나를 죽이려는 시도를 해봤을 텐데 눈치가 빠른 놈이다. 나로서는 조금 아쉬웠다. 두목이 무릎을 꿇자 부하들도 눈치가 있는 것인지 다들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그래, 너는 알고 있구나?”

“저, 저도 뭔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럼 지금부터 대답을 잘해야 할거야.”

“예,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정말 그럴까? 나는 여전히 인간이라는 것을 잘 믿지 않는다.

“너 얼마 전 자무새 둥지를 턴 적이 있지?”

두목이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 알아? 남아있던 새들이 알려주더라고.”

뭐 지구의 속담을 알 리가 있나. 그냥 해본 소리다.

“있... 습니다.”

녀석은 힘겹게 대답했다. 머릿속으로 생각이 많아 보였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좋지 않다.

“그래, 시작이 좋아. 그래 잡아간 자무새는 어디에 있지?”

“죽였습니다.”

생각이 많은 인간은 거짓말을 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거짓말을 아주 잘 알아채는 사람이다.

내 검이 빠르게 한번 움직였다. 마차 가까이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부하 한놈의 목이 날아갔다. 스승님이나 에인프라흐 공작처럼 오러를 수십미터 밖으로 날릴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이 무슨!”

부하 한명이 죽자 무릎을 꿇고 있던 두목이 당장이라도 덤빌 것처럼 일어섰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한명씩 죽인다.”

내 눈빛에 두목의 몸이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굳어버렸다. 아직 반지를 끼고 있어 기세를 뿜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전생에 반평생을 사람과 변이체를 죽이며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나도 모르게 살기를 뿜어내기도 했다. 스승님은 이 살기를 일부러 죽이려고 하지 말고 내 것으로 만들어 조종하라고 하셨고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대련 중에 슬라이트 놈에게 가끔 써먹는 것을 제외하고 실전에서 사용해 본 것은 방금이 처음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녀석들은 자무새의 새끼를 이용해 뭔가를 하려고 하고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목적은 많은 사람을 죽이려는 것일 거다. 이미 인간으로서 바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 바닥이 있다. 비밀의 공간에서 튀어나온 촉수는 분명히 악마의 일부분이다. 마신교라는 놈들은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악마의 힘을 인간에게 주입하는데 성공했다. 악마에게 몸을 판 것이다. 이보다 더 바닥이 있을까?

악마, 변이체 뭐라고 불러도 좋다. 마신교 놈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렸다. 내가 살던 세계를 멸망시킨 놈들이 다시 활개치는 것을 내가 두고볼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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