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최악의 식감
결론은 실패였다. 바위에서 읽은 기억은 마신교의 비밀통로와 무관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다른 것이 보였다. 많은 사람이 건축자재와 여러 가지 물건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복장을 봤을 때 요즘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제국의 유산이 바로 이 광산에 있다는 증거였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 광산은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제국의 유산이 만들어진 것은 대략 200년 전이다. 그런데 이 바위에 그 기억이 깃들어있다는 것은 광산이 생기기 전에 이미 이 아래에서 제국의 유산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한 번도 던전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책에서 읽은 정보가 전부다. 하지만 이 정도로 대단한 규모의 던전이 있다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물론 이것은 한때 대륙 최강의 국가였던 제국이 마지막 힘을 짜내 만든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규모가 대단하겠지만, 광산 아래에 던전을 만들고 그 위를 다시 덮어버린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거대한 발상이었다.
지난번 멤파이 자작령에서 발견되었던 제국의 유산은 어떤 형태였는지 몰라도 이와 같은 수준의 것이었다면 던전을 공략한 것보다 발견한 것이 더 어려웠던 일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단순히 운이 좋아 발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비슷한 수준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마신교도 제국의 유산을 쉽게 손에 넣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멤파이 자작가에서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수백명의 생목숨을 던져넣었다고 했었다. 그와 비슷한 조건이라면 더욱 어렵다. 최대한 움직임을 숨겨야 하는 마신교에서 멤파이 자작가처럼 그렇게 눈에 띄는 인원을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기다렸다. 사이코 메트리를 이미 한번 사용했으니 한동안은 쓰지 못한다. 부작용을 감수하고 사용한다고 해서 단서를 얻는다는 보장도 없다.
지상의 집들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는 것은 비밀 통로 안에 있는 녀석들도 언젠가는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거기에 코로스의 용병단이 도착할 시기가 되었으니 누군가는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녀석들에게 위의 물건을 받아오라는 그런 명령을 내릴 것이다. 그 순간을 노리기로 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은 익숙하다. 변이체 놈들이 인간을 찾기 위해 지상을 들쑤시고 다닐 때 별다른 방비도 없는 지하실에 숨어 일주일이 넘게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변이체가 떠나기를 기다렸던 적도 있다.
하루나 이틀 그 안에는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기다려줄 만 하다. 어차피 영주성으로 보낸 전령의 이야기를 듣고 스승님이 이곳에 오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나는 어두운 광산의 통로 구석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간다. 빠른 반응을 위해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곤 한다. 말 그대로 잡념이다.
나는 잡념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나도 몰랐던 사실인데 수련 중에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니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슬라이트나 자칼이 수련할 때를 보면 확실히 그런 면이 있었다.
천재라서 그런 것인지 그 녀석들은 훈련 시간에 누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모를 정도로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고는 한다. 반면에 나는 항상 다른 생각이 많다. 스승님은 언젠가 그것이 내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하시는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잡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전생의 기억이 도움이 될 때가 훨씬 많았다. 정신 교란과 불을 조종한다는 마신교 놈들을 상대로 머릿속으로 가상의 대련을 시작했다.
둘이 협동 공격에 능숙하다는 전제를 깔고 싸움을 시작한다. 정신 교란에 걸려본 적이 없어서 내가 어느 정도로 저항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불을 조종한다는 녀석의 힘도 미지수다. 그렇기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본다.
물론 내가 한 번에 정신 교란에 완벽히 걸려서 허수아비 같은 상태가 된다면 의미가 없다. 그 경우는 제외한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내가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변이체의 정신 교란에 걸리고도 빠져나온 생존자가 있었다. 그 사람보다 내 정신력이 약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상대는 변이체도 아닌 되다만 반푼이다. 능력이 변이체만큼 강하지 않다. 자무새만 봐도 완전히 교란에 걸리지 않고 저항했었다. 단 한 번의 틈, 나에게는 그것만 있으면 된다.
수십번의 결투를 머릿속으로 돌려본다. 처음에는 내가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내 승률이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구그그그긍!
그때 통로에 낮은 울림이 일어났다. 움직일 시간이 온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일 준비를 했다.
소음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느껴지기로는 분명히 통로 전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기관이 아니면 마법이라고 생각했는데 기관이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대단히 거대한 기관이었다.
통로가 짧은 길이가 아니다. 그런데 통로 전체의 방향이 뒤틀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겠지만 초감각이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통로의 끝 막다른 곳의 벽면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법이다. 방향이 바뀌면서 마법이 걸리는 방식인 모양이다. 이런 복합적인 방식으로 던전을 건설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도대체 이 던전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돈과 자원이 들어갔던 것일까? 하지만 그런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바뀐 벽면에 투박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지구로 통하는 통로를 열고 잠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사용하기에 따라서 이것은 완벽한 은신이다. 곧 저기에서 누군가가 나올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해서 안으로 들어간다.
투박한 철문이 열리며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뭔가 투덜거리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고 있었으나 지구에 넘어와 있는 상황이라 뭐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영체화를 사용했다. 푸른 빛의 잔상이 남지 않도록 잠시 시간을 두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영체화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10초 남짓이다. 하지만 충분하다. 사내가 문을 닫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사내와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쿵!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비밀의 문 안에는 옆에서 작동 기관으로 보이는 것을 조작하고 있는 사람 하나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영체화를 풀며 기관을 조작하고 있던 녀석의 심장에 검을 박아주었다. 녀석은 눈을 부릅뜨며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왕도에서 만났던 그 미친 연쇄살인범 놈에게 당했던 사람들도 모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착한 사람이었던 정원사 벤프리의 명복을 잠시 빌어주었다.
영체화를 풀며 초감각이 알려주는 주변의 상황이 피부에 스며들듯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마법 등이 비추고 있는 비밀 문의 내부는 마치 지구의 자동화 공장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다만 조작하는 장치는 그리 현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길게 늘어선 수십 개의 레버는 불친절하게도 무엇을 움직이면 어떤 작동을 하는지 쓰여있거나 하진 않았다.
통로 저편을 원래대로 돌리기 전에 조작하던 녀석을 죽여서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면 통로 저편에서는 아예 문을 열도록 조작할 수 있는 방법이 없던 것 같았다. 기다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일단 감지되는 범위에 다른 생명체는 없었다. 나는 조작실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고 나왔다. 조작실의 문을 열고 나오자 어마어마하게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수십미터는 될 것 같은 높은 천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마력 등이 빛을 내고 있어서 공터 전체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마법 등도 저만한 출력을 내려면 꽤 커다란 마력 소모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깨달았다. 여기는 마신교가 만든 곳이 아니다. 바로 이곳이 제국의 유산이 있는 던전일 것이다.
공터는 돔 형태로 사방이 벽으로 막혀있었는데 일정 간격으로 내가 열고 나온 것과 같은 투박한 철문 수십 개가 보였다.
일단 감각에 걸리는 놈들은 없는데 나머지 놈들은 어디에 있을까? 어차피 다른 도망칠 구멍은 없을 것이다. 저 문들을 하나하나 열다 보면 결국은 나올 것이다.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내가 나온 철문 앞에 잡동사니를 하나 던져놓았다.
그리고 차례대로 탐색을 시작했다. 굳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문 안에 뭔가 생명체가 있다면 감각으로 잡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몇 개의 문을 지나쳤을 때 마침내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느껴지는 문을 찾았다. 느껴지는 인간은 모두 9명 나와엇갈려서 밖으로 나간 녀석을 제외하면 나머지 녀석들이 이곳에 모두 모여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찾던 것도 이곳에 있었다.
나는 문을 거칠게 열고 빠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나의 등장에 놀란 녀석들의 얼굴이 보인다. 녀석들이 대응하기 전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녀석의 목을 날렸다.
그리고 안쪽의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녀석을 향해 몸을 날렸다. 녀석의 경지는 4성 기사. 녀석이 정신 교란이나 불 조종을 하는 녀석이라면 골치 아파지기 때문에 가장 먼저 처치해야 했다.
“적이다!”
뒤늦게 누군가가 소리쳤지만 이미 나는 4성 기사 녀석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4성 기사인지 녀석은 그대로 당하지는 않았다. 빠른 속도로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으며 내 공격을 막아내었다.
쾅!
오러가 부딪히며 충격파가 주변을 흔들었다. 하지만 힘 자체는 나의 압도적인 우위다. 같은 5성 기사 중에서도 슬라이트나 자칼보다 훨씬 파괴력에서는 앞서는 내 일격을 녀석은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불완전한 자세로 내 공격을 막아낸 녀석이 중심을 잃고 뒤로 튕겨 나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중심을 잡지 못한 녀석이 아무렇게나 검을 휘두르며 쇄도하는 나를 막아서려고 했지만 눈먼 칼에 당해줄 만큼 만만한 내가 아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검을 피해내고 녀석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으려고 할 때 덜컥하고 몸이 멈추고 말았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누군가 머릿속에 침입해서 중얼거리며 나를 조종하려는 느낌이었다. 이게 정신 교란인 모양이었다. 눈동자만 돌려 옆을 보니 오러가 느껴지지 않았던 놈 중의 하나가 내 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녀석에게도 약을 먹여서 능력을 준 건가? 오히려 저러면 평소에 녀석들을 찾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잡생각을 떠올릴 때가 아니다.
실제로 당해본 정신 교란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의지는 있지만 몸이 잘 움직이지가 않았다. 전에 생각했던 대로 검을 들지 않은 왼쪽 팔을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뇌에 작용하는 능력이다 보니 이능력의 사용도 제한이 되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성가신 능력이다. 4성 기사의 심장을 찌르려다가 몸이 멈춘 탓에 상대가 바로 자세를 잡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만났던 생존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움직여서 손가락을 잘랐다고 했다. 아무래도 허풍이었던 모양이다. 이래서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든 힘을 사용하고도 답이 없을 때 해도 늦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든 늘 답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되었다.
내 정신력이 약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내 정신력이 약했다면 대격변 이후 수십 년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대격변 이전에도 대한민국은 자살 1위의 오명을 가지고 있는 국가였지만, 대격변 이후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자살을 선택했었다.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디 없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뇌가 말을 듣지 않아? 몸이 안 움직여? 정신 교란에 당하는 상황은 이미 수십 번은 가정하고 싸우는 상상을 했었다. 정신 교란의 효과가 생각보다 강하긴 했지만 작은 움직임조차 못 할 정도는 아니다.
혀를 이빨 사이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대로 깨물었다.
우드득!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를 때 이런 소리가 나는 것을 처음 알았다. 식감이 좋지 않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씹어본 것들 중에서 단연코 최악의 식감이었다. 혀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어나 뇌를 강타했다. 하지만 그 고통으로 인해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쾅!
가까스로 눈앞의 4성 기사 녀석이 반격하는 것을 막아냈다. 그리고 재빨리 아공간에서 만들어 두었던 토끼꼬리 풀 영약을 하나 꺼내 입에 넣고 씹었다. 혀가 잘린 고통보다 화끈한 맛이 뇌를 강타했다.
“이뤤 괘가튼!”
입에서 절로 욕이 나오는데 발음이 되지 않는다. 입안에 가득 고였던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내가 혀를 씹게 만든 대가는 아주 비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