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예상치 못한 변화
내가 만든 영약이지만 정말 세상에 이런 게 있나 싶은 정도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맛이었다. 대격변 이후 사람이 먹지 못할 것 같은 것도 많이 먹어본 나로서도 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이걸 먹은 녀석들이 그토록 극찬하던 이유가 있었다.
정신 교란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효과는 확실했다. 신체 변형이 막히자 차선책으로 먹은 것이긴 한데 정말 상상 이상의 효과와 맛이었다.
더구나 반쯤 잘려서 너덜거리고 있는 혀에 영약의 성분이 무슨 작용을 하는 것인지 잘린 혀를 알코올이 가득 든 병에 담근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이 정도면 정신 교란이 문제가 아니라 시체도 벌떡 일어날 정도다.
어쨌든, 나에게 반격의 시간이 찾아왔다. 놈들에게는 방금이 최초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그때 나를 죽였어야 했다.
내가 수세에 몰렸다고 생각한 4성 기사 놈이 이를 악물고 공격에 나섰다. 기본적으로 실력이 뛰어난 놈은 아니다. 왕도에서 만났던 놈처럼 녹슨 칼과 같은 녀석이다. 몇 합 안에 죽일 자신이 있지만 놈을 혼내주는 것은 조금 나중이다.
지금 당장은 그보다 먼저 손을 봐줘야 할 놈이 있다. 4성 기사의 검이 내 목을 베려고 호선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매섭긴 하지만 무리한 공격이었다. 내가 정신 교란에 빠져있는 것도 아닌 이미 한번 방어를 한 시점에서 그런 큰 동작의 공격이 먹힐 거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다.
그러나 나는 방어하지 않았다. 녀석의 검은 내 목이 있던 곳을 지나갔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영혼 이동이다! 막아!”
나는 이미 영체화를 사용해 정신 교란을 쓰는 녀석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놈들은 이것을 영혼 이동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정신 교란을 쓰던 녀석이 나를 막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걸 막는 방법도 가지고 있는 건가? 내가 조금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녀석들에겐 아무 방법도 없었다. 몇 명이 움직여 정신 교란을 사용하는 녀석을 지키려고 했지만 이미 녀석의 등 뒤로 이동한 나의 검이 가슴을 관통해 녀석의 심장을 뚫은 후였다.
심장이 뚫린 녀석이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죽진 않았다. 변이체 부스러기들은 바퀴벌레보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어쩌면 바퀴벌레를 모욕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취소한다.
어쨌든 가장 성가신 놈이 힘을 잃고 쓰러졌다. 이제 나머지는 천천히 나와 즐거운 시간을 가지면 된다. 나에게 말을 할 입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
심장을 꿰뚫리고도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녀석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 같다. 어지간해서는 죽지도 않기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녀석 중 가장 강한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놈이 쓰러지자 나머지 녀석들이 감히 덤빌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막간을 이용해 사탕을 한 주먹 꺼내 먹으려고 하다가 혀가 아직도 반쪽이 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퉤!”
입안에 가득 찬 피를 뱉고 포션을 꺼내 입 안에 머금고 혀의 잘린 부분을 최대한 붙였다. 다시 화끈한 고통이 밀려온다. 나머지는 재생력이 알아서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새는 발음으로 슬라이트 놈에게 놀림을 받는 끔찍한 미래가 잠시 떠올랐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혀를 붙이고 말 것이다.
“너는 누구지? 동지인가?”
4성 기사 놈이 나를 노려보며 무게를 잡으면서 말했지만, 앞에 다른 놈들을 앞세우고 뒤에 숨어서 그러는 것이 조금 우스웠다. 나는 살짝 비웃으며 시간을 끌었다. 대답할 이유도 없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최상급 포션의 효과가 좋은 것인지 재생력이 뛰어난 것인지 다행스럽게도 혀가 조금씩 붙는 것이 느껴진다.
“말하라. 영혼 이동을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녀석이 다시 물어본다. 그런데 그걸 내가 왜 말해줘야 하는 거지? 정신 교란을 쓰는 놈도 이미 쓰러졌는데 자신들의 처지가 어떤지 실감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건가?
그때 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아까 밖으로 나갔던 덩치 큰 녀석이 들어와 안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뭐야!”
아, 이 녀석이 불을 조종하는 녀석이었나? 이놈을 믿고 있었나 보다. 아까는 워낙 찰나에 지나쳐서 몰랐는데 이 녀석 덩치는 기사처럼 큰 주제에 마법사였다. 하지만 경지는 낮다. 2 서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침입자다. 그런데 신의 힘을 사용한다.”
“뭐?”
기사 놈이 친절하게도 녀석에게 설명해주자 녀석은 깜짝 놀라며 눈을 부라렸다. 이 녀석들 이쪽 세계의 명칭으로 하면 악마의 능력을 쓰는 주제에 신의 힘이라고 하는 건가? 하기야 나도 같은 능력을 사용하니 그것으로 이놈들에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인간임을 포기하진 않았다.
나는 발밑에 깔려있는 정신 교란을 쓰는 놈의 복부를 몇 번 더 검으로 찔렀다.
푹! 푹!
“윽! 윽!”
심장이 뚫린 놈이 잘도 신음 소리를 낸다. 이미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다. 그러니 봐줄 것도 없다. 대체품이 제 발로 돌아온 이상 죽어도 상관없다. 불을 조종하는 녀석이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을지 아직 모른다. 혹시나 싸우는 도중에 다시 깨어나서 방해라도 한다면 곤란하다.
“멈춰!”
마법사가 소리를 질렀지만 내가 녀석의 지시를 받을 이유는 조금도 없으니 가볍게 무시해줬다.
“어차피 우리와 같다면 쉽게 죽진 않겠지!”
불돌이의 손에 불이 솟아났다. 저것은 이능력이 아닌, 그냥 하급 마법이다. 조금 긴장했던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런 작은 불을 조종해봐야 일반인은 모르겠지만 4성 이상의 기사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죽어라!”
쉽게 죽지 않는다면서 죽으라고 소리 지르는 건 또 무슨 짓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나에게 던진 것은 손 위에 피워놓은 작은 불이 아니었다.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내 던졌는데 누가 봐도 저걸 깨뜨리면 위험해 보여 나는 부드럽게 그것을 받아냈다.
“어?”
녀석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놀란 것은 오히려 나였다. 저놈은 바보인가? 마법사 중에는 바보가 없을 줄 알았는데 예외도 있는 모양이다.
“바보?”
녀석의 바보짓을 보는 도중 혀가 어느 정도 붙어서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약한 도발을 날려주자 뭔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렸는지 녀석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죽여주마!”
녀석이 이번엔 주머니에서 두 개의 병을 꺼냈다.
“멍청아! 하지 마!”
옆에서 4성 기사 놈이 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녀석은 두 개의 약병을 자신의 발밑에 던져서 깨뜨렸다. 순간 강한 휘발성의 냄새가 방안에 퍼지는 순간 녀석이 손에 만들어두었던 불을 아래에 던졌다.
펑!
폭발음과 함께 순식간에 엄청난 불이 일어났다. 직접 큰불을 만들지는 못하니 촉매를 사용하는 모양이다. 약병에 들었던 것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순도 높은 발화 물질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재빨리 망토를 몸에 둘러 방안을 가득 채워나가는 화염을 막아냈다. 만약을 대비해 붉은 망토를 장비하고 있던 것이 효과를 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마신 교도들은 아니었다.
“으아아악!”
방 안에 화염이 차오르며 몸에 불이 붙은 녀석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기 시작했다.
휘발성이 강한 불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망토 안에 숨어있자 금세 불길이 가라앉았다. 망토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러자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시커멓게 그을린 마법사 놈이었다. 저놈이 불을 조종하는 녀석이 아니었던 건가? 화상을 입은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입고 있던 옷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손에는 아까 깨트린 약병보다 커 보이는 약병이 들려있었다.
“너, 두 개의 능력을 가진거냐?”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불에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두 개가 아니라 다섯 개지만 불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기사를 제외한 나머지 녀석들의 반 정도는 화염에 당해 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큰 화상을 입은 모습이었다. 그때 시야의 사각에서 강한 위험신호가 감지되었다.
위험 신호를 일으킬 상대는 뻔했다. 기사 놈이 보이지 않았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기사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콰앙!
일반적인 오러끼리의 격돌보다 훨씬 강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밀린 것은 나였다. 공격을 받아낸 나는 강하게 튕겨 벽에 부딪힌 후 떨어졌다.
이것은 오러의 힘이 아니다. 순수하게 완력으로 밀린 것이다. 돌아보니 왕도에서 만났던 연쇄살인범 놈이 그랬던 것처럼 덩치를 부풀린 기사 놈이 보였다. 이놈도 반푼이 변이체였던 모양이다. 이놈은 덩치를 부풀린 것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부분들이 마치 파충류처럼 변해 있었다.
모습이야 어쨌든 간에 녀석의 능력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가장 흔했던 능력이지만 인간으로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웠던 능력인 신체 강화다.
아무 힘도 없던 생존자도 신체 강화의 힘을 사용하면 영화에 나오던 초인 같은 운동능력을 보여주었다. 자동차를 집어던지고 3층 높이의 건물을 그냥 뛰어서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능력도 변이체를 죽이는 데는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같은 인간을 죽이거나 변이체로부터 도망갈 때 사용했을 뿐이다.
생존자들이 얻은 능력은 겨우 그 정도지만 신체 강화를 사용하는 변이체들의 힘은 공포 그 자체였다. 주력 전차를 한손으로 던져버리거나 고층 건물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과거 신체 강화를 얻은 생존자들이 사용하는 운동 능력 정도는 4성 기사 정도면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눈앞에는 그 4성 기사가 신체 강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전에 신체 강화를 몇 번 강화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마침 그 능력을 기부해줄 상대가 나타난 모양이다.
“크르륵!”
기사 놈이 마치 변이체처럼 으르렁거렸다. 녀석은 이제 사람 말도 하지 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성을 놓은 것은 아닌 모양인지 검은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반쯤 변이체가 된 놈이 거칠게 검을 휘둘러 왔다. 이제 육체 능력은 4성 기사라고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훨씬 위다. 하지만 싸움이라는 것이 힘과 속도가 전부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만약 그게 전부라면 기사들이 몇백년간이나 검술을 발전시킬 이유가 없었다.
힘으로 받아치는 것을 포기하고 흘리거나 피한다. 스승님에게 배운 것은 반응 속도를 극대화하는 검술이지만 다른 것을 배우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나에겐 김경식에게 배웠던 검술도 있었다.
공격에 성과가 없자 녀석은 더욱 거칠게 몰아붙였지만,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만 하는 나는 오히려 나는 여유가 있었다. 이놈들도 분명히 힘을 사용하는 대가로 무언가를 지불해야 한다. 저 능력이 한없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녀석들이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잠시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불돌이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의 능력은 불을 조종하는 능력이 아닌 것 같다.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아까 아군을 공격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대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도왔어야 했다. 그런데 마법 실력도 영 시원찮은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할까?”
“크르르르르!”
싸움을 끝내려면 언제든지 끝낼 수 있었다. 검을 직접 부딪치는 것을 피했지만 그렇게 했더라도 손해는 아니었을 것이다. 녀석의 검은 제법 좋은 것으로 보였지만 내 검은 신검 슈바르거트다. 몇 합만 버틴다면 녀석의 검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신체 강화가 가장 흔한 능력 중 하나라는 것은 내가 많이 상대해 봤다는 뜻이다. 그것도 변이체가 아닌 신체 강화를 가진 생존자들을 많이 상대해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오러나 다른 능력이 없었던 전생에도 그들과 싸움에서 져본 적이 없다. 한 번이라도 졌다면 최후의 생존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에 나는 이제 오러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능력도 가지고 있다. 녀석의 바닥이 드러난 시점에서 질 수가 없는 싸움이었다.
일단 혹시 모를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로 했다. 아공간에서 자무새를 잡기 위해 준비해두었다가 사용하지 못한 투창을 하나 꺼내 옆에서 허둥대고 있는 마법사에게 던져주었다.
“끄악!”
기사의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 던진 것이라 그리 힘을 들이지도 않았지만 원래 몸이 둔한 녀석인지 그대로 가슴팍에 창을 맞고 뒤로 넘어져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죽었을 테지만 역시 죽지 않는다.
기사 놈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나는 앞으로 따라붙었다. 녀석이 검 대신 긴 손톱이 솟아난 손을 휘둘렀지만 나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영체화를 짧게 사용해 공격을 피하고 바로 녀석의 팔을 잘라주었다.
“크아!”
똑같은 방법에 두 번이나 당하다니 녀석도 똑똑한 편은 아니었다. 물론 알아도 막기 힘든 능력이긴 하지만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
팔이 하나 날아간 녀석이 버둥대기 시작하자 승부는 더욱 기울어졌다. 녀석은 미친 마수처럼 날뛰기 시작했는데 정작 그 공격에 휘말린 것은 쓰러져 있거나 화상을 입은 채로 제대로 피하지 못한 동료들이었다.
검을 들고 있던 팔까지 날아가자 놈은 진짜 변이체가 되기로 했는지 나를 입으로 물려고 했지만, 그것은 잘라달라고 머리를 내미는 꼴이었다.
스걱!
그래서 소원대로 목을 잘라주었다. 그리고 덤으로 심장에 검을 박아주었다. 서서히 녀석의 생명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아직 살아있는 잔챙이들을 처리했다.
정보 전달의 역할은 바보 마법사 놈에게 맡기기로 했다. 어이없게도 정신 교란을 쓰던 놈은 바보 마법사가 질렀던 불에 큰 피해를 입어서 어느샌가 죽어있었다.
재생력과 영체화를 몇 번 이어서 사용한 덕분에 체력을 많이 소모했기에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서 사탕을 잔뜩 씹어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확의 시간이 왔다. 불을 쓰는 것인지 뭔지 알수 없는 녀석은 아직도 가슴에 꽂힌 창을 어쩌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었기에 먼저 정신 교란의 능력을 흡수했다. 역시 완전하지 못한 각성 그러나 이것은 영체화만큼 유용한 능력이다. 그리고 신체 강화의 능력도 흡수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영체화와 정신 교란 그리고 신체 강화가 합쳐지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