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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74화 (74/206)

74. 위험 신호

사이코 메트리를 사용한 지 몇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한 번 더 사용한다면 예전 같으면 분명 지독한 두통에 시달릴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내가 가진 능력의 한계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므로 두통을 각오하고 사용해보기로 했다.

무엇을 고를까 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나는 먼저 내가 들어왔던 조작실로 돌아갔다. 여러 개의 레버가 늘어서 있는 조작설비에 사용해보기로 했다.

적당히 중간쯤의 레버에 손을 얹고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기계의 시점으로 기억이 재생되었다. 앞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노동자는 아닌 사람들이다.

“완성되었구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군요.”

“시원섭섭합니다. 허허!”

다들 한마디씩 이야기를 할 때 누군가 술과 잔을 가져와 모두에게 한 잔씩 따라주었다. 그리고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하얀 수염이 성성한 노인이 잔을 높이 들고 외쳤다.

“대업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그러자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따라 외쳤고 모두 동시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 사람들이 목을 부여잡고 한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만이 남았다. 하얀 수염의 노인은 쓰러진 동료들을 슬픈 눈으로 둘러보더니 레버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대업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네. 제국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썩었어.”

노인이 혼자 중얼거렸다. 모두가 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을 때 노인만 현실을 보았던 걸까?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며 기억이 거기서 끊어졌다.

조금은 기대했었는데 별로 쓸모있는 기억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과는 있었다. 두통이 없었다. 그런데 한 번 더 사용하면 문제가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앞으로 하루 두 번은 부작용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두통을 감수한다면 세 번, 며칠 아파질 각오를 한다면 네 번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생각보다 큰 발전이었다. 아마 다른 능력들도 비슷한 비율로 성장했다고 생각해보면 될 것 같았다. 당장 초감각도 범위가 상당히 늘어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 기억을 연속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당장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주변을 정리하고 위로 올라갔다.

광산에서 나가자 코로스와 용병들이 숨어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별일 없었지?”

“한 놈이 나오기는 했는데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내가 놔줬던 녀석은 결국 코로스에게 걸렸던 모양이다.

“안에서 일은 잘 해결되셨습니까?”

“응, 덕분에 쉽게 처리했지.”

내 말에 코로스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에 정신을 뒤흔드는 녀석과 불을 조종하는 놈이 없었습니까?”

“아니 있었지. 그리고 불을 조종하는 게 아니라 그냥 수준 낮은 마법사였어.”

“아, 그렇군요.”

나는 올라오는 도중에도 어떻게 함정을 파야 돌아오는 사제를 잡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눈치가 빠른 녀석일 것이다. 입구에 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순간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조금 바뀌신 것 같습니다.”

“응? 뭐가?”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가 코로스가 하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내가 달라져 보인다고? 변화를 겪은 탓인가?

“딱히 뭐라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죄송합니다. 괜한 말이었군요.”

“아니야. 그런데 외모는 달라진 게 없지?”

“네, 그건 똑같습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기왕 달라질 것이면 얼굴도 조금 잘생기게 변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딱히 못난 얼굴이 아니라 주변에 잘생긴 놈들이 많다.

그보다 코로스와 용병들도 여기에 있으면 안될 것 같았다. 주변에 서성거리고 있으면 분명 이상함을 눈치챌 테니까. 그렇다고 영주성으로 보내기도 그렇다. 중간에 마신교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사제가 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 광산 좀 깊숙한 곳으로 가서 대기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코로스와 용병대 그리고 말 두 마리를 광산 안으로 들여보냈다. 함께 들어가 상층부에서 며칠 정도 머물기 적당한 곳을 찾아 자리를 지정해주고 물과 먹을 것도 챙겨주었다.

그리고 나는 광산의 입구로 돌아와 입구 쪽이 잘 보이도록 통로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사제를 기다리면 된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며칠 내로 반드시 올 것이다. 다만 스승님에게 전령을 보낸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성급한 판단이었다.

나는 연공을 하며 사제를 기다렸다. 어쩌면 사제보다 스승님이 먼저 오실 수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제국의 던전은 하루 이틀로 공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스승님에게는 알려야 할 일이다.

연공을 시작하자마자 이질감이 찾아왔다. 마치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러홀이 커진 것도 있지만 마나가 움직이는 통로가 말도 안 되게 넓어졌다. 예전이 2차선 도로였다면 지금은 8차선 도로가 된 느낌이다.

이것만으로는 아직 강해진 것이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실전을 겪어봐야 할 것 같다. 코로스도 정확하진 않지만 뭔가 달라진 것을 느꼈으니 스승님이라면 단번에 알아채실 것이다. 에인프라흐 공작이나 국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냥 적당히 깨달음이라고 말하기에는 생각보다 변화가 컸다. 오러의 축적 속도는 이미 다른 누구보다 빠르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지만 오러의 운용 효율이 엄청나게 좋아졌다.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스승님이 가끔 기예처럼 선보이는 기술들도 이제 조금은 따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러의 운용이 끝나고 마나의 운용도 했다. 여러 가지로 다른 것에 시간이 뺏기다 보니 마법의 발전은 조금 느린 편이다. 스테이시에게 도움을 받고 있지만 역시 전문적인 스승이 없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어쨌든 마나의 운용도 역시 전과 비교해서 훨씬 좋아졌다.

계속해서 능력 점검에 들어갔다. 초감각과 사이코 메트리가 발전한 만큼 신체 변형이나 재생력도 당연히 효과가 늘거나 부작용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신체 변형은 여전히 큰 고통을 동반하기에 자주 쓰고 싶은 능력은 아니었다. 다만 능력을 사용하고 나서 필요로 하는 체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물리적인 운동능력도 점검하니 전과 비교해서 확실히 좋아졌다. 신체 강화를 발동한 만큼은 아니겠으나 아무 대가 없이 항상 발동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효율이 높을지도 모른다.

영체화나 정신 교란이 사라진 것은 여전히 뼈아프지만 크게 손해를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는 느낌이다.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동안에도 시선만은 광산의 입구에 고정하고 있었으나 사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말대로 진짜 녀석이 예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꽤 체력소모가 많았던 하루였기에 저녁이 되자 허기가 밀려와 평소보다 푸짐하게 음식을 먹었다. 배부르게 먹고 나면 보통 사람은 잠이 온다고 하는데 나는 다시 태어난 후로도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반대다. 감이 무뎌졌을 때 몇번이나 죽을뻔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혹시 사제가 밤에 올지도 모르기에 아주 늦은 밤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코로스와 함께 다니는 며칠 동안 잠을 조금 적게 잤기 때문일까. 새벽이 되었을 때 잠깐 졸고 말았다. 그래봐야 몇분 정도일 뿐이었지만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어스름한 저편에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통로 저편에 있기에 초감각이 정보를 알려주지 못한다. 사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곳이 전멸한 줄 모르고 찾아온 마신교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녀석이 가까이 오거나 혹은 눈치를 채고 도망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녀석은 한참이 지났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동이 트기 시작하며 녀석의 모습이 조금 더 확실히 보이기 시작했다. 녀석의 시선이 정확히 나에게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통로를 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냥 광산 입구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선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녀석의 모습이 점점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고위 귀족처럼 고급스러운 푸른색의 정장을 입고 있는 금발의 장발 사내는 무척 미남이었다. 그냥 미남이 아니라 내가 다시 태어나고 본 사람 중에 가장 미남인 것 같았다. 여태까지 봤던 가장 미남은 왕세자였는데 그보다 위라고 할 수 있었다.

미소년과 청년의 중간지점에 있는듯한 나이 그리고 너무 미형인 나머지 남성과 여성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중성적인 외모가 신비스러운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녀석의 입이 움직인다. 분명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통로 저편이라 들리지 않는다. 녀석이 다시 말을 한다. 내가 독순술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녀석이 일부러 과장되게 입 모양을 크게 만들어서 말하고 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나와서 얘기 좀 하자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녀석이 통로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고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천천히 통로 밖으로 나갔다. 내가 밖으로 나가자 녀석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드디어 나왔구나?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아프네”

적의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위험신호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능력이 아니라 오랜 세월 대격변의 세계에서 살아남은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놈은 위험한 놈이다. 비록 오러나 마나 어느 것도 느껴지진 않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놈은 지배자로 태어난 녀석이다. 왕세자도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지만 이 녀석이 몇 배는 더 뛰어나다. 아직 대화를 길게 나눠본 것도 아니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너, 사제가 아니군?”

이런 녀석이 고작 사제일 리가 없다.

“오우, 어떻게 알았지?”

녀석은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그러나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의 저편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차갑기만 했다.

“네가 교주인가?”

“아니야. 그리고 교주라는 말보다. 그분에게는 강림자라는 좋은 호칭이 있지.”

이 녀석이 교주가 아니라고? 그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럼 부 교주쯤 되는 거냐?”

“뭐 비슷할지도?”

이번에도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정확하게 알려주진 않았다. 그런데 녀석의 기운이 순식간에 변했다. 초감각이 위험신호를 격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넌 누구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곳에 왔던 건가?

“알면서 온 것 아니었나?”

“네 이름이 빅터 하네스라는 것은 알아. 이곳 영주 대리의 둘째 아들이고 새로운 7성 기사 노엘 브라스의 제자라는 것도 알지. 왕도에서 제법 여러 가지 일을 한 것도 알고 있어. 그런데 넌 누구지?”

녀석의 깊은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쏘아져 나와 심장을 얼리는 것만 같았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 싸운다면 놈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 못 이길 것 같다. 오러도 마나도 느껴지지 않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 알고 있군. 나는 빅터 하네스다.”

“아니야.”

녀석은 확신하듯이 말했다. 어느새 얼굴에 장난기는 사라져 있었다. 이 녀석이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겠다.

“너 되게 재밌는 놈이야.”

입에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하는 녀석에게서 아무 적의도 없이 잠자리의 날개를 뜯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조금 더 살려주고 싶어졌어.”

녀석은 나 정도는 아무 때나 죽일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 녀석이 강한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지 못하겠다.

“고마워 해야 하나?”

“아니 그건 아니야. 어차피 이번 한 번은 봐주려고 했으니까.”

“그런데 뭘 선심 써서 살려주는 것처럼 말을 하는 건가.”

순간 녀석이 입이 길게 찢어지며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 순간 악귀의 형상이 되었다. 이 자식 역시 인간이 아니다. 여태까지 상대했던 반푼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녀석이다. 도망가지 않으면 죽는다고 초감각이 미친 듯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그런데 도망치면 살 수는 있는 건가? 영체화가 남아있었더라도 장담할 수 없다. 이 정도라면 전성기의 변이체 수준이다. 스승님이 함께 있었더라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너를 보는 순간 죽이고 싶어졌거든.”

나긋나긋하던 목소리가 깊게 울리는 괴수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죽여라.”

나는 슈바르거트를 꺼냈다. 다른 한손에는 남아있는 악마용 혈액독을 쥐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냥 죽진 않는다. 변이체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하진 않는다. 애초에 살려달라고 해서 살려주는 변이체 같은 것 본 적도 없다.

그렇게 전의를 끌어올리고 있을 때 녀석의 얼굴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역시 넌 재밌어. 하지만 기억해. 이번 한 번 뿐이야.”

“마신교의 목적은 뭐지?”

봐준다고 했으니 궁금한 건 물어봐야겠다.

“우리 목적? 그런 거 없어.”

“없다고?”

“그래 우린 목적을 이미 이뤘으니까.”

강림자라는 말이 거슬렸었다. 이미 마신인지 마왕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강림을 한 모양이다.

“좀 더 놀아주고 싶은데. 시간이 됐네? 그럼 난 이만”

녀석이 다시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녀석의 뒤로 통로가 열렸다. 녀석이 통로를 보았을 때 알았어야 했다. 녀석도 열 수 있었다.

“잠깐!”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

하지만 녀석은 내 외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곧바로 통로가 닫혔다.

홀로 남은 나는 텅 빈 공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멀리서 강력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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