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치욕스러운 역사
12개의 시험이 준비되어 있기에 던전의 방은 모두 13개였다. 조종실을 제외한 방은 하나마다 하나의 시험을 준비하는 일종의 대기실과 같은 개념이었다.
조종실을 제외하면 나머지 방들은 빠듯하게 사용하면 수십명은 생활할 수 있을 크기였고 기본적인 가구가 모두 갖춰져 있었다. 방들은 마신교 놈들이 엉망진창으로 사용한 몇 개를 제외하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12번째 방의 가장 화려한 의자에서 읽어낸 기억에는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아마도 이 던전을 만드는데 총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특별히 기술이나 지식은 없지만, 책임자로 앉아있는 전형적인 관료의 모습이었다.
기억에서 보인 것은 지난번 보았던 백발이 성성했던 노인이 고위 귀족에게 보고를 올리는 장면이었다. 노인은 고위 귀족에게 이 던전의 상세한 설명과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했는데 귀족은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내저어 노인을 돌려보냈다.
나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던전에 관한 자세한 보고를 실시간으로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역시 미래 예지 따위는 없다. 사제라는 놈도 분명히 이 기억을 읽었을 것이 분명하다.
선택지가 나타났다. 과연 나 혼자 이곳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인가? 가능하다면 나 혼자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 좋다. 스승님과 함께 할 때 더 쉬워 보이는 시험도 있었지만 나 혼자 이능을 마음껏 사용했을 때 더 쉬워 보이는 시험도 존재했다.
무엇보다 스승님이라고 할지라도 쉽지 않아 보이는 시험이 존재했다. 당장 첫 번째 관문인 불의 시험만 하더라도 스승님이 아무리 7성 기사라고 하나 1시간 동안 불 속에서 버티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두 번째 관문인 물의 시험은 더하다. 7성 기사라도 숨을 쉬어야 한다. 1시간 동안 물속에서 버티기가 쉽지 않다.
던전의 시험은 이렇게 악랄했다. 애초에 이것은 보통 사람이 공략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7번째 방에서 읽었던 기억에서 그렇게 들었다. 제국 황족의 직계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제국의 유산을 받는 방법이 있다고 했는데 황족의 직계는 이미 오래전에 모두 죽었다.
꼬박 하루가 넘게 고민한 끝에 나는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국의 던전은 참으로 친절하게도 다음 관문에 도전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도 가능했다. 사실은 그렇게 친절한 기능은 아니고 끝없이 도전해서 모두 죽으라는 뜻이었다.
조종실에서 밖에서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폐쇄되도록 조종한 뒤 조종실의 바로 오른편에 있는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시험에 도전하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방의 가장 안쪽 벽 가운데에 버튼이 있다. 이것을 작동시키고 공터의 중앙으로 가면 된다. 나는 장비와 옷을 모두 벗어 지구에 넣었다.
내 몸은 화염에 면역에 가까운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장비와 옷은 다르다. 괜히 옷을 태울 필요는 없었다. 화염을 막아주는 기능이 있는 붉은 망토도 착용하지 않았다. 망토도 완전한 면역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고 자동 수복 기능이 있다고 하지만 잘못해서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을 입는다면 괜히 보물급 물건을 하나 잃는 셈이다.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나 혼자 있음에도 영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혼자 도전하게 된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벽에 홀로 불룩 튀어나와 있는 벽돌을 눌렀다. 던전 전체가 낮은음으로 울리며 무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렸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와 천천히 공터 중앙으로 향했다. 어느새 공터 중앙에는 붉은색의 커다란 원이 나타나 있었다. 이 안에 들어가면 시험이 시작되고 한 시간을 버티면 된다.
심호흡을 한번하고 원 안으로 들어섰다. 원의 중앙쯤에 도달하자 붉은색 원의 경계를 따라 밑에서 쇠창살이 높게 솟아올랐다.
대체 이런 곳을 어떻게 만든 것인지 의문이다. 이 정도 기관은 전생의 지구에서도 만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위이이잉!
마치 사이렌처럼 어디선가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고음이 끝나는 순간 주위의 기온이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또 마법인가?’
기계 문명과 마법의 기막힌 기술 합작으로 만들어놓은 살인 던전이다. 좋은 기술과 자원을 왜 이렇게 낭비했을까. 이러니 제국이 망하는 게 당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의 기온이 오르다 못해 밑에서 화염이 치솟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화염 면역의 이능력은 잘 작동해서 뜨겁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것이 문제였다.
‘이런 빌어먹을’
화염이 솟아오르며 주위의 공기를 태워버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것은 화염 내성으로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재빨리 붉은색 원의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중앙보다는 그래도 이쪽이 조금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마신교 놈들도 물과 불의 시험은 통과했으니 나도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지만 자만의 결과로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자책한다고 해서 살아갈 방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밑에서 솟아오른 철창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게 솟아있었다. 뛰어넘는 것은 무리다. 이런 화염 속에서도 벌겋게 달궈지지도 않는 것을 보면 이것도 보통 철로 만든 물건은 아니다. 혹시나 해서 주먹에 오러를 실어서 한번 쳐봤더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숨을 참고 있지만 이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정말 쓰기 싫은 능력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급하게 신체 변형을 사용했다. 얼굴 부위가 길쭉하게 늘어나며 특히 입 부분을 빨대처럼 길게 늘렸다.
우두둑! 찌이이익!
몸이 변화하며 능력도 향상되었지만, 몸을 변형시킬 때 일어나는 통증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얼굴이 사람이 아닌 마치 개미핥기처럼 변형되었지만, 창살 사이로 길게 빼낸 입으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개미핥기의 얼굴이 되어 한 시간을 보냈다. 전생에도 참 별꼴을 다 봤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역시 혼자서 도전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누군가 이것을 보기라도 했다면 본 사람을 죽이거나 내가 죽어야 했을 것이다.
시간이 되자 치솟아 오르던 화염이 사그라들고 창살이 다시 땅 밑으로 사라졌다.
댕!
시험이 끝났다는 듯이 한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다음 단계에 도전하기까지 시간제한 같은 것은 없었으므로 잠시 쉬기로 했다. 첫 번째 시험은 몸보다 정신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얼굴을 원래대로 돌리고 통로를 열어 벗어두었던 옷과 장비를 다시 착용했다. 아무리 부작용이 줄었다고 해도 체력손실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탕을 한 주먹 씹으며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 단계는 물의 시험, 다음엔 이번과 같은 치욕스러운 경험은 없기를 바랐다. 그래서 식사하는 동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두 번째 물의 시험은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전과 같은 방식으로 공터 중앙에 서자 원통형으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숨 쉴 공간 하나도 없이 물이 꽉 차올랐지만, 나에게는 수중 호흡이라는 이능력이 있었으므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중 호흡이라는 능력은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능력이었다. 마치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이 앞으로 다가왔다. 이곳 암테일 지부에 있던 녀석들은 세 번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부교주라면 지부에 그런 투자를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물론 워낙 악독한 난이도의 여러 가지 시험이 있기에 부교주라고 무조건 모두 공략에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런 위험 부담을 안기 싫어서 부교주가 시험을 회피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부교주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온 눈치였다.
나는 여전히 미래 예지란 능력을 믿지 않는다. 미래 예지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신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어쩌면 부교주는 내가 이곳을 공략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략에 성공하면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이곳에 잠들어있는 제국의 유산을 빼앗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부교주보다 약하고 만약 부교주가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그것을 막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한 수고를 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이상 하는 데까지는 해볼 생각이었다. 벌레의 시험도 공략할 방법을 미리 생각해두었다.
다음 시험에 나올 벌레들은 그냥 보통 벌레가 아니라 마수다. 다행스럽게도 이것에 대해 예전에 책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백무충이라고 하는 곤충형 마수인데 크기는 보통 20센티 정도로 마주치고는 작지만, 곤충치고는 매우 큰 크기다.
생긴 것은 바퀴벌레에 가깝게 생겼지만, 생명력도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열이나 냉기에도 잘 죽지 않고 크기에 비해 턱이 매우 강한데 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씹어서 목구멍으로 넘기는 대식가이기도 하다.
군집 생활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이 백무충의 무리가 한번 나타나서 지나가는 곳에는 풀한포기 남지 않는 폐허만이 남을 뿐이다. 어찌보면 자무새와 비슷한 마수라고 볼 수 있다.
개체 하나의 힘은 마수 중에 최약체지만 군집의 규모에 따라 상급 마수에 준하는 위험도를 자랑한다. 발생 빈도도 하급 마수라 꽤 잦아서 오히려 자무새 같은 보기드문 상급 마수보다 현실적으로 무서운 마수라고 볼 수 있었다.
이곳 던전에 제국이 준비해둔 백무충은 약 10만마리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그때보다 오히려 늘어났을 수도 있다. 먹이도 없이 2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백무충이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손에 넣었던 공벌레처럼 이것들도 먹이가 없을 때는 동면에 들어가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시험에 도전했던 마신교도들로 참 오랜만에 식사를 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신교를 따라서 녀석들의 식사가 되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내 힘으로도 사방에서 달려드는 10만 마리의 백무충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지만 마신교의 발상을 조금 빌릴 생각이다.
애초에 마신교가 생각해낸 방법도 아니었다. 원래 백무충의 무리가 발견됐을 때 군집이 크지 않다면 때로 독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여기 있는 군집은 무려 10만 마리다. 일부러 번식시켜 모으려고 해도 힘든 수치다. 보통 독과 양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녀석들이 생각한 것이 자무새였던 모양이다.
생각초로 약을 만들어 먹여서 얌전하게 만들고 정신 교란으로 조종한다면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던전 공략을 떠나 생각해도 금관을 쓴 상급 마수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메리트였을 것이다.
자무새 조련의 결과가 어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정신 교란의 능력이 남아있었다면 적당한 마수를 잡아 실험해 보고 싶어질 정도로 재미있는 계획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자무새 조련은 나로 인해 실패했다. 하지만 막지 않았다면 녀석들이 던전 공략에 성공했다면 금관을 쓴 자무새라는 무시무시한 상급 마수가 암테일 영지에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나는 세 번째 시험에 도전했다. 자무새 토벌에 나갔을 때처럼 방비를 확실히 한 나는 도전을 시작하는 버튼을 누른 후에 재빨리 공터의 중앙으로 달렸다.
위이이이잉!
예의 그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하자 천장에서 수증기 상태의 기체가 아래를 향해 뿜어졌다. 마치 계란 썩은 냄새와 비슷한 향이 나는 기체였다.
나는 던전의 세부 내용을 이미 들었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동면중인 백무충을 깨우는 향이다. 녀석들이 좋아하는 썩은 고기의 냄새를 응축시킨 것이었다.
공터 주변의 벽에 수많은 구멍이 열리며 그곳에서 새하얀 백무충들이 구멍 뚫린 둑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말 그대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경고음이 울릴 때부터 주변에 자무새의 깃털을 뿌리고 있었다. 자무새를 토벌 후 비싸게 팔리는 자무새의 부산물을 모두 내가 수확해서 아공간에 가지고 있었다.
스승님과 격렬한 전투 때문에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깃털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무새의 깃털에서 값어치가 나가는 것은 깃털의 모양이 아니라 그곳에 발린 독이다.
비싼 물건이라 조금 속이 쓰리지만 나는 아낌없이 주변에 자무새의 깃털을 뿌렸다. 백무충이 파도처럼 밀려들며 바닥에 잔뜩 뿌려진 자무새의 깃털에 몸을 부비거나 어떤 녀석은 깃털을 씹어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