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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77화 (77/206)

77. 바람 앞의 빅터

스샤샤샤샤샥!

십만마리에 달하는 백무충이 기어 오는 소리는 굉장했다. 그 엄청난 물량에 박력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독의 효과는 굉장했다. 깃털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벌렁 뒤집어져 혐오스러운 다리를 바르르 떠는 놈들이 속출했다. 그리고 자무새의 깃털을 입에 넣은 녀석들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놀라운 것은 죽은 녀석들의 시체를 다른 녀석들이 곧바로 뜯어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숨이 붙어있는 동료는 공격하지 않는다. 뒤집어져 다리를 떨고 있는 녀석들은 전혀 공격받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동료의 시체는 곧바로 먹이로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기하급수적으로 백무충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숫자였다.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백무충은 내가 뿌려둔 자무새의 깃털만으로 막아내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선두의 녀석들이 내 근처까지 도달해있었다. 나는 캐스팅을 시작하며 양손에 검을 들고 접근하는 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개체는 그냥 큰 벌레나 다름없는 약한 놈들이다. 굳이 오러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필요한 것은 속도뿐이었다.

비록 쾌검 계열의 검술을 익힌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것은 포기하고 속도만 내기로 한다면 비슷하게 흉내를 내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샤각! 샤각! 샤각!

딱딱한 녀석들의 갑각질을 검이 가르는 소리가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검식이나 그런 건 지금 상황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한 번에 몇 마리씩 베여 죽는다. 엄청난 고속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다가오는 녀석들을 베어내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뿌려둔 자무새의 깃털들이 중간에서 한번 방파제 역할을 해서 그나마 이 정도다.

몇 마리가 마침내 발밑까지 다가왔다. 검을 휘두르는 스텝을 이용해 녀석들을 발로 차 냈다. 밟아 죽이려다가 자칫 잘못해서 미끄러지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녀석들에게 휩쓸려 버리면 빠져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이쯤이면 됐나?’

최대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끌어들였다. 이제 벽에서 기어 나오는 녀석들도 거의 없었다.

나는 바보 마법사가 끝내 사용하지 못하고 죽은 폭발물 세병을 꺼내 입구 부분을 날려버렸다. 뚜껑을 열 시간도 부족했다. 그리고 그것을 세 방향을 향해 던지고 뒤이어 미리 캐스팅해 두었던 화염계 마법을 이어서 던졌다.

그리고 붉은 망토를 뒤집어쓰며 공벌레처럼 몸을 말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미 발밑까지 도달했던 몇 마리가 달라붙어 몸에 이빨을 박아넣는 게 느껴졌다.

콰아아아아아앙!

방안에서 일어났던 폭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광장을 휩쓸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렸음에도 폭발에 휘말려 바닥을 몇바퀴나 데굴데굴 굴렀다. 그래도 화염에 면역인 몸인데다 붉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는 크지 않았다.

물리적인 힘으로 상처가 좀 생기기는 했지만, 전보다 강해진 재생력의 힘으로 곧바로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고막이 터졌는지 귀가 먹먹했지만 바로 일어났다. 이것으로도 백무충을 완전히 처치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일어나자 조금 어질어질했으나 곧바로 귀 안의 상처가 재생되었는지 금세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거대한 폭발에 휘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있는 놈들이 많았다. 그래도 3분의 2 정도는 자무새의 독과 조금 전의 폭발로 인해 처리한 것 같았다.

남은 놈들은 대략 4분의 1 정도로 보였다. 이 정도면 혼자서 처리하지 못할 것도 없다. 살아남은 녀석들이 이미 내 쪽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벌레 새끼들이 좀 모였다고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해?”

대격변 시기에 이 녀석들이 눈에 보였다면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것들 먹을 수는 있는 건가? 생각해보니 이놈들을 먹을 수 있다는 설명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몸에 좋은 성분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분명히 그런 정보가 책에 쓰여있었을 것이다.

“쓸모도 없는 놈들이군.”

돈이라도 되는 녀석들이라면 저 산처럼 쌓인 시체를 모두 챙겼을 텐데 그것도 아니다.

샤샤샤샥!

녀석들이 몰려온다. 나는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놈들과 맞서기 시작했다.

댕! 댕! 댕!

바닥에 뒤집어져 다리를 떨고 있는 녀석에게 검을 박아넣었을 때 세 번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시험이 끝났다는 것을 알렸다. 내가 놈들을 모두 처치했다는 뜻이다.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른 끝에 마침내 마지막 한 마리까지 모두 처치했다. 마지막에는 거의 무아의 지경에 들어서서 아무 생각 없이 휘둘렀던 것 같다.

서 있기가 힘들 만큼 지쳐버렸다. 검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정도로 지칠 때까지 검을 휘둘러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깨달음이 있었던 것일까? 극한의 상황에서 검을 휘둘렀기 때문인지 오러홀 주위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전해져온다. 그런데 아직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조금, 아주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6성 기사가 되면 혼자서도 지구를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할 것 같다. 남아있는 변이체를 처치하고 능력을 흡수한다면 빠르게 강해지는 것이 가능하다. 부교주의 진짜 실력을 전성기의 변이체와 비슷하다고 가정해도 내가 아는 변이체들의 능력을 빼앗는다면 어느 정도 대적이 가능할 것 같았다.

문제는 통로다. 녀석이 통로로 도망치면 잡을 방법이 없다. 어쩌면 지구를 돌아다니다 보면 부교주의 근거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녀석을 처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휴식이다. 너무 지쳤다. 다음 단계의 대기길로 돌아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효과가 좋아진 재생력이 아니었다면 절대 마지막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식사를 차리기도 귀찮아서 누운 채로 사탕을 꺼내 씹기 시작했다. 이제 사탕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채워 넣어야 할 텐데 암테일 영지에 사탕을 취급하는 가게가 있는지 모르겠다.

누워서 사탕을 씹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반사적으로 번쩍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을 때 주위에는 당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방심한 채로 잠이 들었다. 이렇게 잠이 들어본 것은 다시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다.

오랜 지병인 불면증의 원인은 자는 동안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그것이 잠시 무너졌던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몸을 움직여보니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열량 보충이 덜 됐는지 강한 공복감이 느껴져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차리는 식사는 여전히 맛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단지 고열량으로 빨리 배를 채운다는 개념이다. 요리를 배우려고 노력을 안 하기도 했지만 오랜 습관을 쉽게 버릴 수 없는 법이다.

식사를 마치고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점검했다. 단지 아무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을 뿐이므로 내가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아까의 경험을 살려 비슷하게 아무 생각 없이 검을 휘둘러보기로 했다. 그러나 몇번을 다시 해봐도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깨닫기는커녕 무아의 상태에 빠지는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나는 늘 생각이 많다. 조금 백무충을 벨 때가 내가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검을 휘두른 때였을 것이다. 스승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언제고 내 잡념이 발목을 잡을 때가 올 것이라고 하셨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생각도 생각이다. 몇번을 다시 도전해봐도 무아의 상태에 빠지는 것은 어려웠다.

아쉬웠다. 벽이 한걸음 남았는데 발을 떼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많은 기사들이 이런 상태로 길게는 죽을 때까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 나도 예외한 법은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리고 시간은 많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마신교를 생각하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조급함이 찾아왔다. 검과 마법 어느 쪽에도 조급함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조급함을 쫓아내기 위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먹고 휘두르고 먹고 휘두르고의 반복이었다. 중간중간 몇번 토끼잠을 자기도 했다. 그리고 검에서 조급함이 사라졌다고 느껴졌을 때 수련을 멈췄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몰라도 체감상 이틀 정도는 그렇게 보낸 것 같았다.

결국 포기하고 다음 단계에 도전하기로 했다. 네 번째 단계는 바람이었다. 바람으로 이루어지는 공격을 한 시간 버티면 된다.

아마도 바람 마법의 일종으로 공격하는 것 같은데 어느 수준인지 몰라도 확실한 것은 사람을 죽이려고 만든 시험이라는 것이다.

검이나 방패로도 이것은 막아내기 어렵다. 실체가 없는 공격이다. 스승님의 경지에 이르러서 오러로 전신을 방어하거나 혹은 검을 휘둘러 검막을 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들은 아직 나에겐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래도 죽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비록 낮은 경지이지만 나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고 재생력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버티는 것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전과 같은 방법으로 벽에 돌출된 벽돌을 누르고 공터로 나갔다. 산처럼 쌓여있던 백무충의 시체들은 아주 외곽에 떨어져 있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중앙의 파란 원에 들어서자 시험이 시작되었다. 백무충 때처럼 벽에 수백개의 구멍이 열리며 그곳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천장에 달린 마법 등을 중심으로 회오리바람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도 마법과 기계의 합작인 셈이다. 실로 엄청난 재능과 자원의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금세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아직 그냥 버틸 만 했다. 풍속이 점점 올라가기 시작한다. 최대한 자세를 낮춰 바람의 저항을 덜 받으며 버텼다.

이 넓은 공터를 바람이 일으키는 굉음이 가득 채우고 마치 던전을 당장 무너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흔들기 시작했다.

바닥에 붙어서 버티는 것의 한계는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팔과 다리의 힘으로 더 이상 지면을 붙잡기 힘들어졌을 때 마법으로 보호막을 가동했다.

파샥!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보호막이 생성되자마자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1분도 견디지 못하고 깨져나갔다. 4성 기사의 오러가 실린 공격도 한두 번은 막아내는 보호막이 이렇게 쉽게 깨졌다는 것은 지금 부는 바람에 그만한 위력이 있다는 뜻이다.

쐐애애애액!

보호막이 사라지자마자 귀를 찢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피부를 저미는듯한 강풍이 들이닥쳤다. 실제로 피부가 드러난 곳에 마치 개미가 파먹는 것처럼 피부가 뜯겨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재생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아직은 버틸 만 하다. 곧바로 준비해두었던 보호막을 한 번 더 시전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바닥에서 몸이 떨어져 날아갈 뻔했다.

지구에서 태풍이 찾아왔을 때 피난을 떠난 적이 있었다. 방송이고 뭐고 정지되었던 시절이라 태풍이 오는 줄도 몰랐고 어느 정도의 위력이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굉장히 강한 태풍이었다.

하지만 떠나야 했다.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변이체에게 죽으니까. 32명이 떠난 피난길은 별로 멀지도 않았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28명만 남아있었다. 바람의 위력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바람에 중심을 잃고 쓰러지면 대책이 없다. 그냥 굴러도 그 정도인데 이 정도 바람이면 공중에 몸이 떠서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벽과 입맞춤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주변에 남아있던 백무충의 시체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바람에 날아간 백무충의 시체들은 연속해서 벽과 충돌하며 과자처럼 부서져 벽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껍질이 갑각으로 이루어진 백무충이 그 정도다. 사람의 야들야들한 피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처음부터 이렇게 설계가 된 던전이다. 악독한 설계자 놈들은 황족의 직계가 아닌 타인이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파샥!

이번에는 아까보다 짧은 시간에 보호막이 깨져나갔다. 다시 들이닥친 바람에 몸이 잠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러를 가득 담아 슈바르거트를 땅에 박아넣어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슈바르거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공터의 바닥도 보통 재질이 아니다. 슬라이트가 왕실의 보고에서 가져다줬던 검도 나쁜 검은 아니지만 같은 행동을 했을 때 흠집만 조금 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바람에 피부가 찢겨나갔다. 상처에서 마치 피가 뽑히듯이 뿜어져 바람을 타고 긴 선을 남기며 뒤로 사라졌다. 재생되는 속도보다 상처가 생기는 속도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팔로 눈을 막았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시야를 잃을 뻔했다.

일단 다시 보호막을 시전하고 다시 시간을 조금 더 벌었을 때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통로’

곧바로 통로를 열었다. 그리고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내가 손이 닿지 않으면 다른 물체는 통로를 통과하지 못한다.

통로를 보호막의 일종으로 사용하려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사용해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 기회가 찾아왔다.

다시 보호막이 깨졌나갔지만 이번엔 내 앞에 통로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풍을 완전하게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틸 만 했다.

그렇게 바닥에 붙어 버티고 또 버텼다. 땀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바로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다. 바람이 아니었으면 이미 온몸이 땀에 절었을 정도로 육체적으로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체감은 몇시간이나 지난 것 같지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 소리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한다. 앞에 통로를 세워두고 있음에도 캐스팅이 되는 대로 보호막을 사용하고 있지만 보호막이 사라지는 순간에는 아슬아슬하게 버텨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통로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통로가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저것도 부서지는 거였나?’

통로가 무적의 방패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었다. 예상했음에도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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