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한계 돌파
계산이 복잡해졌다. 통로를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한다면 나는 남은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최악의 상황에는 통로 안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건질 계획이었다.
내가 혼자 던전 공략에 도전한 이유는 죽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였다. 그 자신감의 원천중의 하나가 바로 통로였다. 지정된 원 안에서 벗어나는 순간 시험은 종료되기 때문이다. 대신 처음부터 다시 도전해야 했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지금 통로를 해제하면 곧바로 다시 소환할 수 있는가? 다시 소환된다면 내구성은 회복이 되는 것인가? 통로가 파괴됐을 때 나는 다시 통로를 열 수 있는가? 여러 가지 물음이 따라왔지만 여태까지 실험해보지 않은 문제였기에 답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통로의 떨림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해제’
나는 통로를 지키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시험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통로가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칼바람이 보호막을 두드렸다.
나는 다시 통로를 다시 소환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안된다고?’
통로가 소환되지 않았다. 완전히 능력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통로가 입은 손실이 복구될 때까지 소환이 되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바닥에 박아넣은 슈바르거트에 힘을 주어 더욱 깊숙이 박아 넣었다. 통로를 다시 소환할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전생에는 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 중 한 번도 완벽한 준비를 해두었거나 해서 위기를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지.’
군대에서 훈련병 시절에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이 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우습게도 군인 시절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말인데 대격변 이후에는 이보다 더 잘 들어맞는 말이 없었다.
물론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겨라.’ 같은 희대의 헛소리는 살아가면서 마지막 날까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통을 즐기는 것은 변태일 뿐이다. 온갖 정신병을 달고 살았던 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정도까지 미치진 않았다.
퍄샥!
보호막이 힘없이 깨져나가고 바람의 칼날이 전신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보이지도 않고 보인다고 하더라도 막을 수 없다. 몸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지경이었다.
머리 가죽이 통째로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재생력이 발동하고 있지만 상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상처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바람에 날려 온몸에 부딪혀온다.
그 와중에도 살가죽은 재생이 되겠지만 머리카락은 어찌 되는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만약 대머리가 된다면 머리가 다시 자랄 때까지 던전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을 것이다. 절대 그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선 안된다.
슈바르거트를 붙잡고 있는 손등의 피부가 벗겨져 나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엄청난 고통이지만 생각보다 버틸 만 했다. 원래 고통을 잘 참는 편이긴 했지만 이런 상처를 입고도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고통도 자주 겪으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아무래도 신체 변형을 얻고 나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자주 경험했기 때문인 것 같다.
피부가 벗겨지는 것은 상관없었다. 문제는 그 안의 근육과 인대를 포함한 신체조직도 망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다시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통로는 소환되지 않았다. 가까스로 캐스팅이 완성되어 보호막이 잠깐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재생력이 열심히 일을 해주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생각보다 출혈이 많았는지 급격하게 힘이 빠지고 있었다.
차라리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날아가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이제는 거의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는 백무충이었던 것의 잔해를 보니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다시 보호막이 깨졌다. 아직 상처가 회복되려면 어림도 없었다. 어쩌면 한번 잘해야 두 번 정도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좋지도 않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나를 구원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댕! 댕! 댕! 댕!
네 번의 종소리와 함께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체감상으로는 몇시간은 지난것 같긴 했지만 실제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1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나는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아직 강한 바람이 불고 있지만 조금 전까지 살점을 뚝뚝 떼어내 가던 살인적인 바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피와 땀에 절은 몸을 시원하게 식혀주는 바람이었다.
바람이 주는 상쾌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런 시발!”
머리카락을 잃은 남성의 절규가 던전 안에 울려 퍼졌다.
* * * *
굉장히 우울한 기분이 되어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된 이상 머리가 자랄 때까지 던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이것은 팔 하나를 잘린 것보다 치명적인 문제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문제는 아직 통로가 열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러홀의 간질거리던 느낌이 조금 더 커졌다.
이번에도 나는 아무것도 느낀 것이 없었다.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을 뿐이다. 이것은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나는 항상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비록 이번 생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많지 않았지만, 전생의 나에겐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장은 체력 손실이 컸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기 전까진 다음 시험에 도전하는 것은 미뤄야 했다. 성능이 향상된 재생력도 한몫했지만 신체 능력의 전반적인 향상도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몸에 변화를 겪지 않았다면 이번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번 시험엔 영체화나 정신 교란 같은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운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남는데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살아남았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아까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고 급박한 상황이라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했지만, 통로를 여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진 않았다. 능력을 얻고 사라지는 느낌은 이번 생에 여러번 경험해 봤기 때문에 확실했다. 아마도 통로의 문도 큰 손실을 보면 복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통로의 내구성을 확인한 것이 성과라면 성과지만 통로를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써먹을 생각도 하고 있던 나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소진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잘 먹고 푹 쉬고 나서 간질거리는 느낌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시간이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하는 수련은 마치 옛날 만화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 같은 느낌이 있었다.
몇번이나 땀을 흠뻑 흘릴 정도로 검을 휘둘렀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진 않았다. 수련은 한다고 열심히 한다고해서 남을 주는 것도 아니고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다.
이틀이 지났을 때 통로가 다시 열렸다. 다시 소환된 통로를 보는 순간 오래 헤어졌던 친구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통로가 열린 김에 지구로 돌아가 뭔가 바뀐 것이 없는지도 확인했다.
지난번 사건 이후로 언제나 떠돌이 변이체가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겨우 이틀만인데도 심법을 수련하며 받아들이는 지구의 마나는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각인데 아노더스의 마나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물로 비교하자면 약수와 수돗물의 차이 정도라고 해야 할까. 미묘하지만 다른 느낌이었다.
통로도 복구되었고 몸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다만 듬성듬성 사라진 머리카락은 복구되지 못했지만 벌써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이 만져지는 것이 영구적으로 민머리가 된 것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다섯번째 시험에 도전했다. 다섯번째 시험은 함정과 기관이었다. 이것은 다른 시험보다 조금 자신이 있었다. 물론 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던전의 설계와 제작을 맡은 인간들은 실로 악독한 인간들이었고 결코 쉽게 통과할 시험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시험이 시작되고 벽면에서 수천개의 구멍이 열리며 그곳에서 온갖 발사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바닥에서도 수시로 무언가가 튀어나오거나 푹 꺼지고 때로는 사라지기도 했다.
날아오는 철시를 몇 개 검으로 튕겨냈는데 손목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위력을 담고 있었다. 거기에 철시뿐만 아니라 그보다 작고 빠른 화살도 있었고 공성용으로 쓰일 법한 거대한 쇠뇌가 날아오기도 했다.
이것은 보통 5성 기사 아니 6성 기사라고 할지라도 매우 위험한 시험이었다. 만약 이곳에 수십명 정도의 도전자가 있었다면 오히려 자기들끼리 엉키면서 모조리 함정에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혼자였고 초감각이 있다. 날아오는 발사체나 바닥의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피할 공간이 완전히 사라질 정도의 공격이 있었지만, 그것은 직접 막아내고 공간을 만들었다.
반사 신경을 극대화하는 검술을 배운 나로서는 오히려 이것이 고급 수련 코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결코 쉬운 시험은 아니었다.
댕! 댕! 댕! 댕! 댕!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옆구리에 작은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고 왼쪽 어깨를 톱니가 달린 원판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바람의 시험에 비하면 굉장히 쉽게 통과한 편이다.
“끄으윽!”
지독한 고통을 잡으며 옆구리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 바닥에 던졌다. 뽑은 화살촉에 살점이 뭉텅이로 묻어나왔다. 악랄하게도 화살촉이 마치 낚싯바늘처럼 휘어져 있어 뽑아내기 어렵게 만든 것이다. 포션을 들이붓고 지혈하자 재생력과 포션의 힘으로 빠르게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간질거리는 느낌이 더 커졌다. 잡념 없이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암기와 바닥의 함정을 피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제 정말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는 체감상 하루만 쉬고 바로 다음 시험에 도전했다. 다음 시험 역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번째 시험은 3개의 문을 여는 시험이었다. 시험에 도전을 알리고 밖으로 나가자 어느샌가 거대한 관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법도 아니고 순수하게 기관의 힘으로만 움직인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것인지 아직도 신기했다.
공터에 솟아오른 관문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빨간색 문과 파란색 문이다. 혹시 이 관문을 만든 사람 중에 나처럼 지구에서 넘어온 인간이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이 가는 색 구성이었다.
어쨌든 두 문의 하나를 고르는 시험이다. 둘 중 하나는 살아남는 문이고 다른 하나로 들어가면 죽는다.
다수가 이 시험에 도전했을 때 반은 죽이겠다는 얘기다. 이런 식의 던전이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나에게 스트라이더 997번을 선물해준 폴켄의 아버지가 아마도 이런 식의 시험을 거쳤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폴켄의 아버지는 운이 좋은 편이다. 만약 이곳처럼 불의 시험이나 물의 시험 같은 것을 만났다면 몇 명이 들어갔던 그곳에서 모두 죽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제국의 유산도 각자 난이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제작자의 성향인지 아니면 보관된 보물의 중요도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국의 유산마다 모두 다른 던전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나머지 발견되지 않은 던전도 노리고 있던 나에게 좋은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두 개의 문 앞을 한 번씩 지나갔다. 파란색 문에서 강렬한 위험 반응이 느껴진다. 저 문을 열고 나갔을 때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확인할 생각은 없었다.
빨간색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 번째 관문이 나타났다. 이곳 역시 똑같은 두 개의 문이 있었다. 이번에도 파란색 문 안쪽에서 위험 반응이 느껴진다.
이것은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시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도 빨간색 문을 열고 통과했다. 마지막 세 번째 관문에는 다섯개의 문이 나타났다.
다섯 명이 이곳에 도전했다면 한명 빼고 넷은 죽이겠다는 것이다. 던전 제작자의 악랄함에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문에 색도 입혀져 있지 않았다. 던전 특유의 똑같이 생긴 투박한 철문이었다.
다섯 개의 문중 가운데의 문에서만 위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개수작이지?”
생문이 열리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까? 물리적으로 문을 열 힘이 없는 사람이라면 여기서 죽으라는 얘기다. 정말 악독한 설계였다.
손잡이를 붙잡고 힘을 써봤지만, 문은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5성 기사에다 신체 변화를 겪은 뒤 보통 동급의 기사보다도 완력이 월등하게 높은 내가 열지 못할 정도면 일반인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는 검을 꺼내 문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열리지 않는다면 부숴서라도 들어간다. 그런데 이 던전에 사용된 금속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강도가 상당했다. 더구나 이 문은 두께가 상당한 철문이다.
오러를 집중해서 문을 치는데도 그리 깊은 상처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두 개의 관문을 지나는데 별로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지만, 이 문을 부수려면 남은 시간이 여유롭지 않을 것 같았다.
쾅! 쾅! 쾅!
검이 철문과 충돌하며 던전에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손잡이 옆 부분을 집중해서 공략했다. 자물쇠 부분을 고장 내지 못하더라도 구멍 하나만 만들어내면 신체 변형을 사용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온 힘을 다해 점 하나를 공격한다. 이것은 일종의 검 수련과도 같았다. 정신없이 문을 후려치고 있을 때 아랫배에 간질거리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