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여섯 개의 별
오러홀이 어떻게 되든 말든 지금 당장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문을 부숴야 산다. 오히려 지금은 승급하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승급하느라 시간을 소비했다간 시간이 종료되어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 6성 기사도 살아야 6성 기사다. 6성 기사였던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당장 눈앞의 문짝을 부수는 것이 먼저였다.
집중해서 한점을 공략했다. 작은 구멍이라도 내기만 하면 그 이후는 어떻게든 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두꺼운 철문을 제법 많이 깎아내었다. 이것도 슈바르거트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보통 검이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슈바르거트의 전 주인이었던 광검제는 이 검을 그리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지만 정말 대단한 검이었다. 워낙 개성이 강한 검이라 평소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지만 벌써 슈바르거트의 덕을 본 것이 여러 번이다.
원래 마왕의 손에 있을 때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었다고 하던데 광검제가 사용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도 그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겠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철문을 대략 절반 정도 깎아냈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이런 양아치 같은 놈들이···.”
위험신호가 바뀌었다. 지금은 내 앞의 가운데 문 뒤에서 위험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시간에 따라 문 뒤의 무언가가 바뀌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끝의 문이 생문이다.
덜컥!
충분히 예상한 전개였다. 이번에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애초에 열리는 문이 있기는 할까? 아니면 생문만 열리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라진 영체화가 대단히 아쉬웠다. 영체화가 있었다면 10초 만에 끝났을 시험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가운데 문으로 돌아가 문을 열어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
끼이이익!
내가 열심히 때려 부순 탓인지 힘겨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역시 생문만 열리지 않는 구조였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위험신호와는 다르게 문 안쪽은 평범하게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하지만 들어가서 문을 닫는 순간 확실하게 사람을 죽일 무언가가 발동될 것이다. 위험 감지는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나는 나머지 4개의 문도 모두 열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닫히지 않게끔 자잘한 물건들을 꺼내 고여놨다. 문을 부수는데 집중한 탓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확실치 않지만 잘하면 한 번 더 바뀔 시간이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악독한 놈들이 과연 한 번 더 바뀔 시간을 주었을까?’
스스로 물어보자면 아니다. 내가 던전의 제작자였더라도 그런 기회는 주지 않을 것이다. 단지 가능성을 대비해 준비해두는 것뿐이다.
결국은 눈앞의 문을 처음부터 다시 부수는 것이 맞다. 문이 아니라 벽을 부수는 것이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문이 열린 곳의 벽의 두께를 보니 엄청나게 두껍다. 그리고 이곳의 벽도 보통 벽이 아닌데다가 벽 안에 무엇인가 보강을 해놨을 것이다. 나라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문을 뚫는다. 결국 가장 쉬운 답은 그것이었다. 나는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아까보다 더욱 격렬하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검이 부딪히고 철문이 깨져나간다. 손아귀가 찢어졌다가 재생력에 의해 상처가 아문다. 그리고 다시 찢어진다. 단지 문을 부수는 것 그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다른 부분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랫배에서 다시 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지금이라면 벽을 넘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경지가 오르려고 하는데 일부러 막는 기사는 아마도 내가 처음이지 않을까?
그런데 맹렬하게 회전하는 오러홀의 안의 별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빨리 새로운 막내를 데려오라는 듯이 오러를 뭉텅이로 뽑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러는 오러홀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빨리 이 가득 찬 오러를 재료로 새로운 별을 만들지 않으면 오러홀을 터트려버리겠다는 위협을 하고 있다.
원래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오러홀이다. 그런데 이번에 신체 변화를 겪으면 오러홀은 훨씬 커졌고 오러홀의 벽은 훨씬 단단해졌다. 그런데 그 오러홀이 꽉 차고 벽이 터지려고 하고 있었다.
문을 열지 못해 죽기 전에 오러홀이 터져서 죽을 지경이다. 이때 한가지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별을 만드는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막대한 오러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지구의 마나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보통 사람보다도 승급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러폭풍이 강한 편이다.
육체에 부담이 가지 않게 이것을 이용하려면 재생력을 감안해도 아마도 기회는 단 한 번일 것이다.
‘그래 해보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다. 이것이 그 구멍일지도 모른다. 한 번으로 안되면 몸이 조금 망가지더라도 두 번도 못할 건 없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래 가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오러홀에 새로운 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오러홀 안에 꽉 차 있던 오러가 압축 돼도 또 압축되어 하나의 별이 되어간다. 오러가 압축되는 과정에서 오러홀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오러들이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오러의 길을 따라 역으로 뿜어져 나온다.
나는 그 오러들을 억지로 끌어왔다. 오러의 역행이다. 기사들이 오러를 운용할 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에 속하는 부분이다.
조금만 잘못해도 오러홀이 깨질뿐더러 잘못하면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러의 운용에 관해선 왕국 최고라는 스승님의 가르침과 신체 변화 이후 넓어진 오러의 길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기회는 단 한 번.
조금 전에는 무리해서 두 번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은 불가능할 것 같다. 오러의 길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이미 여러 군데 손상을 입은 곳도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오러가 팔을 타고 올라와 슈바르거트에 흘러 들어간다.
우우우웅!
슈바르거트가 잘게 떨리며 울기 시작한다. 이런걸 검명이라고 했던가? 이야기책에서나 봤던 현상이다. 명검이 주인을 만나면 운다고 했던 것 같다.
슈바르거트는 자신이 얼마나 좋은 검인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 엄청난 오러가 흘러 들어가는데도 마치 기쁜 듯이 몸을 떨며 탐욕스럽게 오러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슈바르거트에서 검신의 색과 같은 붉은 색의 선명한 오러가 길게 뽑혀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스승님이 전력을 다했을 때와 같은 수준이다. 스승님이 전력을 다한 일검은 닿는 것은 무엇이라도 갈라버리겠다는 예리한 기운을 품고 있는데, 반해 지금 슈바르거트는 무엇이라도 부숴버리겠다는 광폭하고도 투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역행해서 흘러나온 모든 오러의 힘이 슈바르거트에 모이는 순간 슈바르거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검을 붙잡고 있는 것은 분명 나였지만 검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스승님이 자무새를 잡을 때 보여주셨던 절기와 같았다. 느리게 움직이지만 느리지 않았던 바로 그 일검이었다.
검은 느리게 움직였지만, 그 결과는 절대 약하지 않았다. 슈바르거트가 철문에 닿는 순간.
콰아아아아앙!
몸이 뒤로 한참 밀려날 정도의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눈을 감았을 정도였다. 눈을 뜨자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구멍이었다.
철문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형체조차 남아있지 않았고 주위의 벽까지 반원 형태로 둥그런 모양으로 날아가 있었다.
흘러나오는 오러를 억지로 끌어내 쓴 탓에 새로운 별이 태어난 오러홀이 안정되지 않고 있었다. 기존의 5개의 별과 새로 태어난 하나의 별이 항의하듯이 맹렬히 회전하며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타들어 가는 느낌을 받으며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뚫린 구멍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몸이 천근만근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마치 무중력상태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몸이 의지보다 3초 정도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니 반쯤은 이미 의식이 사라지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디뎠다. 진상 고객처럼 맹렬히 항의하는 중인 오러홀을 억지로 누르며 마침내 날아간 벽의 경계를 넘는 순간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험을 통과하는 종이 울리는 사이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새로운 별의 탄생을 축하하기 시작했다. 아직 오러홀에 남아있는 오러를 끌어모아 새로 태어난 별에게 공급하기 시작했다. 눈밭에서 눈덩이를 굴리면 점점 커지듯이 새로운 별이 오러를 받아들여 다른 별들처럼 크기를 키우기 시작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새로운 별의 탄생 축하 파티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주변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의 공터로 돌아가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이 엉망이 되어있는 것을 보니 이번에도 적잖은 오러의 폭풍이 몰아친 모양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어쨌든 6성 기사가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홀로 던전 공략에 도전한 의미가 있었다. 16살에 6성 기사다. 역사를 통틀어서도 몇 명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오러를 역행시켜서 길이 상한 것이 아직 남아있었다. 이것은 재생력이 치료해줄 수 없는 부분인 모양이었다.
보통 이런 상태라면 한동안 정양을 해야 맞겠지만 나에겐 그렇게 많은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무슨 정양을 하겠나.
이만 포기하고 밖으로 나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밖으로 나가도 나는 크게 손해가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이득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다음 시험의 내용이 조금 거슬렸다. 여태까지는 어떻게든 몸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면 이번엔 정신과 관련된 시험이었다.
기억 속의 보고에서 들은 일곱번째 실험은 과거의 기억 중 가장 무섭고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 같았다.
솔직히 조금 두려웠다. 과거의 기억에 나처럼 더러운 것이 많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다시 마주하고도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잠시만 떠올려도 수십 가지의 괴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이것을 다시 현실처럼 마주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었다.
지구로 넘어가 심법을 운용해 손상된 오러의 길을 치유하며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몸을 거의 회복했을 때쯤 결심했다.
과거에 직접 경험했던 일들이다. 이미 수십 년 동안 밤마다 나를 괴롭히던 기억들이다. 새삼스럽게 그걸 다시 본다고 해서 내가 정신적으로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식사를 마치고 여덟번째 시험에 도전했다. 공터의 중앙에 생긴 보라색의 원에 들어서자 시험이 시작되었다.
정신계 마법, 그것도 나로서는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고위 마법으로 느껴지는 환영이 나를 찾아왔다.
순식간에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처음엔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금세 이곳이 어딘지 떠올릴 수 있었다. 나조차도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이것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다.
대격변이 시작되었던 날, 나는 회사에 있었다. 그저 그런 중소기업 속칭 좋소기업이라고 부르는 그런 회사였다. 나는 회사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강 대리 뭐하나? 빨리 오라고 했잖아.”
옆에서 누군가가 나를 툭 치며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두꺼비처럼 생긴 놈이 보였다. 이름이 가물가물하니 생각나지 않는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외근 나가야 한다고! 어서 준비 안 해?”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놈이었는지는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좋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야! 뭐하냐고!”
내가 계속 대답도 하지 않고 일어나지도 않자 두꺼비 놈이 화가 났는지 손바닥을 휘둘러 내 뒤통수를 때리려고 했다.
당시의 몸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딴 것을 맞아줄 정도는 아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슬쩍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그것을 피해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이 시험 굉장히 재미있다. 이거 어쩌면 나에게는 그리 고통스러운 시험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뭐, 뭐! 갑자기 일어나면 어쩔 건데?”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던 두꺼비가 그것이 부끄럽다고 느꼈는지 얼굴을 붉히며 더욱 소리를 질렀다.
“너, 이름이 뭐였지?”
녀석의 이름을 물어보는 내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