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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81화 (81/206)

81. 장판파의 장비처럼

이 시험이 바라는 것은 내가 괴로움과 공포를 겪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지 나는 괴롭지도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다만 과거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자책이 남아있을 뿐이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꺼비는 처리했다. 간신배는 일단 제쳐두고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것은 이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이 여자를 구하는 것 뿐이었다.

“이름이 뭐죠?”

“채, 채송이요.”

아, 그런 이름이었다. 생긴 것이 예쁜 사람은 이름도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런 이름이었다. 오랜 과거의 감정이 생각났다.

“저기 끝방으로 가서 숨어있어요.”

어차피 도망칠 곳은 없다. 어디로 가도 죽는다. 대격변 후의 세계는 그렇다. 특히 오늘은 더욱 그렇다. 어딜 가도 변이체가 있을 것이고 사람들은 변이체와 맞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당장 아래로 내려간다고 해도 위로 올라오고 있는 거미 한 마리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남아있어도 지금 사무실에서 변이를 거의 마치고 있는 녀석이 있지만 그것은 이제부터 내가 처리할 것이다.

원래 오늘의 나는 도망과 숨기를 반복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미끼로 삼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고 위험에 빠진 사람을 외면했었다. 부끄럽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살아남았고 그것이 보통 사람의 반응이었다.

“나, 나는?”

간신배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묻는다. 그래도 남자니 데려가서 써먹고 싶지만, 상태가 저래서야 짐 덩어리나 다름없다.

“너도 같이 가라.”

“그, 그래”

대답하기가 무섭게 녀석은 통로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는 것이 아주 재빠르다. 다시 불러와서 그냥 써먹을까?

“저도 갈게요.”

“그래요.”

“조심하세요.”

살려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미안한 감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채송이가 인사를 하고는 점점 멀어져갔다. 뒷모습을 보는데 가슴 속에서 약간 울컥하는 느낌이 전해져온다.

이제 이런 감정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짝사랑이긴 했지만, 첫사랑을 다시 만난 가슴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럼 이제 사무실 안에 있는 녀석을 상대할 시간이다. 대격변 초기의 변이체들은 분명 무서운 괴물이지만 그렇다고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었다.

나도 조금 지나서는 꽤 많은 변이체를 사냥하는 데 성공했었다. 함정이나 여러 사람이 협동하거나 혹은 현대 무기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함정을 준비할 시간도 없고 협동할 사람도 없으며 총과 같은 현대 무기도 없다. 다만 나에게 있는 것은 젊은 육체와 60살까지 이 지옥에서 살아남았던 경험과 환생 후 배운 지식이다.

“이 정도면 해볼 만 하지.”

아무것도 없을 때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사실 다른 모든 조건보다 경험이 훨씬 큰 무기라고 생각한다. 초기에 사람들이 변이체에게 많이 죽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너무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 늘어선 복도,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다녔던 회사가 무엇을 하는 회사였는지는 알고 있다.

-삼광 트레이딩-

당장 벽에도 커다랗게 사명이 쓰여있다. 중국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수입해 중계무역을 하는 회사였다. 사장이 너무 잡다한 품목을 수입하는 바람에 수익도 별로 나지 않으면서 밑에 직원들만 더럽게 고생했었다.

옆 사무실로 가니 창밖을 내다보며 아직 도망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옆방에서 그렇게 비명소리가 났는데도 도망가지 않은 것은 조작된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이 시대 사람들이 평화에 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본 사람들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피를 뒤집어쓴 인간이 갑자기 들어오면 누구나 보일 법한 반응이었다.

잔뜩 경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굳이 가까이 다가갈 생각은 없었다.

“여기 수입 창고가 어디에 있지?”

“2층이요.”

그중 아주 용감해 보이는 여직원이 대답을 해줬다.

“땡큐”

나는 바로 등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도망가라거나 하는 말은 해주지 않았다. 어디를 가도 똑같을 테니까.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모두 죽은 사람들이니까.

내가 있는 곳은 8층이다. 2층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다. 아마도 내려가는 도중에 다른 변이체도 만날 것이다. 창고에 있는 물건들을 사용할 수 있을까 했더니 그것도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저 괴물을 뭐로 상대해야 할까.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소방 도끼 같은 것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기는 그런 것도 없다. 아무리 지금의 변이체가 약하다고 해도 사무용품으로 변이체를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었다. 아래로 내려간 못해도 위로 올라갈 순 있지 않은가? 내 기억으로 우리 사무실 위층에는 바로 사장실이 있었다. 몇번이나 불려가 말로 할 수 없는 고충을 겪었기에 기억하고 있다.

사장은 여러 가지 운동을 참 좋아했었다. 그리고 가끔 직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운동 실력을 실험하고는 했다. 사장 조카인 두꺼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장도 좋은 인간은 아니었다. 아니 최악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제 정말 시간이 별로 없었다. 다른 사무실을 지나쳐 한문으로 양각된 지나치게 커다란 명판이 붙어있는 곳을 찾았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비서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도 없다. 벌써 도망이라도 친 것인가 싶어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안에 진짜 사장실로 들어가는 문 앞에 서니 안에서 야릇한 교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장이라면 이 시간에 충분히 이러고 있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내 기억을 기반으로 만들어내는 세계라는 것일까?

안에서 거사를 치르고 있는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너 뭐야!”

소파에서 열심히 힘을 쓰고 있던 사장이 흉한 아랫도리를 드러내며 당당하게 일어나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피를 뒤집어써서 흉흉한 모습일 텐데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나쁜 놈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리고 다시 태어나서도 못해본 것을 기억 속에서도 하고 있다. 징벌이 필요해 보인다. 그대로 달려가 턱에 발차기를 날려주었다.

“컥!”

운동 좀 했다고 늘 직원들을 괴롭히던 놈이지만, 발차기를 피하지 못하고 제대로 맞은 후 뒤로 넘어갔다.

소파에 반나체로 누워 급하게 옷가지를 주워서 몸을 가리는 미인 비서가 있었지만, 그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싸울 무기다.

사장의 책상 너머 벽에 걸려있는 일본도가 보인다. 저 정도면 이 시기에 아주 훌륭한 무기다. 다가가서 뽑아보니 절로 인상이 구겨진다.

가검이다. 날이 세워지지 않은 검이다. 내가 무슨 아홉마리 용을 부르는 검사도 아니고 날이 없는 검으로 싸우지는 못한다. 일본도를 팽개치고 옆을 보니 여러 가지 물건이 있다.

골프채, 알루미늄 야구 배트, 양궁 활과 화살이 걸려있다. 무슨 무기 창고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문제는 저것들을 원래 목적이 아닌 직원들에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골프채와 야구 배트는 좋은 둔기지만 인간들에게나 유용하지, 변이체를 상대로는 썩 좋은 무기가 아니다. 양궁 활은 사용해본 적도 없고 환생한 후에 활을 교양 수준으로 배운 적은 있으나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보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사장 의사 뒤편에 걸려있는 커다란 깃발이었다. 누가 알아준다고 저런 것을 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호랑이 그림 자수가 훌륭하게 박혀있는 깃발이다.

내 시선을 끈 것은 깃발보다는 깃대였다. 장식용이기는 하겠지만 끝에 창날도 달려있었다. 책상 위에 있는 사무용 칼로 깃발의 끈을 잘라내자 제법 쓸만한 창 하나를 얻게 되었다. 장식용인 줄만 알았던 창날도 날은 없었지만, 꽤 튼튼하고 끝이 날카롭다. 찌르기로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창과 골프채 하나를 챙기고 돌아섰다.

“너 이 새끼! 어느 부서 놈이야!”

턱을 맞을 충격에서 이제 좀 벗어났는지 사장이 일어나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조작된 기억 속이기는 하지만 이놈은 학습 능력이 없는 건가?

내가 쓸모없는 골프채를 챙긴 이유는 바로 이놈 때문이었다.

쐐애액! 빠악!

풀스윙으로 휘둘러진 골프채가 사장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머리 옆쪽이 움푹 들어가며 피를 뿜어냈다. 사장은 눈에 흰자만 보여주는 개인기를 선보이며 쓰러졌다.

자신의 역할을 다한 골프채를 뒤로 던지자 그제야 아직도 소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비서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아니지. 이럴 때는 사장님 나이스 샷이라고 해야지.”

창을 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완전히 변이가 끝났을 터였다. 다른 사람들이야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지만 채송이는 구해야 한다.

8층의 계단 문을 열자마자 나를 환영하는 포효가 들렸다.

크아아아아!

변이가 완전히 끝난 모양이다. 변이를 끝낸 녀석이 복도에 나와 있었다. 키는 2미터 50센티 정도, 기괴해 보일 정도로 굵은 근육질의 팔과 다리를 가지고 이마에는 멋진 외뿔이 솟아난 살인만을 위해 움직이는 괴물이 복도를 꽉 채우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이 녀석은 외뿔 도깨비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대격변 초에 많이 보였던 변이체다. 변이체 중에서는 약해서 사람들에게 많이 사냥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미만큼이나 사람을 많이 죽였던 변이체 중에 하나다.

힘은 세지만 느리고 보이는 것에 비해 방어력이 약한 녀석이다. 물론 지금만 그렇고 시간이 지날수록 현대 병기로는 상대할 수 없을 만큼 진화하겠지만 그것은 지금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장판파의 장비처럼 창 한 자루를 들고 변이체의 앞을 막아섰다.

“이리 와 봐! 덩어리 새끼야!”

장비처럼 소리를 질러 대군을 막아내진 못했지만, 녀석을 도발하기에는 충분했다.

쿵쿵쿵쿵!

복도를 가득 울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녀석이 성난 멧돼지처럼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정면 승부는 어렵다. 젊은 몸이지만 아직 단련되지 않은 몸이고 단련됐다 하더라도 변이체와 정면 승부를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렇지만 창을 들고 싸울 자세를 취한다. 오히려 두걸음 정도 앞으로 나섰다. 녀석이 더욱 속도를 내서 나를 갈아버리겠다는 식으로 돌진해 들어온다.

크아아아!

녀석이 3미터 정도 앞으로 다가왔을 때 옆에 열려있는 사무실로 몸을 피했다. 싸울 자세를 취한 것은 속임수였다. 변이체 놈들은 누가 뭐라 해도 사람 죽이는 데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놈들이다. 물론 그 지능도 지금은 그렇게 높지 않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진짜 멧돼지 수준인 것은 아니다.

그 와중에도 녀석이 두꺼운 팔을 휘둘러 나를 잡으려 했지만, 자세를 낮추며 창을 내질렀다. 창술 역시 교양 수준으로는 배웠다. 기사라면 누구나 그 정도의 훈련은 한다. 오히려 검술보다 창술에 비중을 높게 두는 기사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배운 창술로도 눈앞의 녀석을 상대하기는 충분할 것 같았다.

푹!

비록 가짜 창날이긴 하지만 찌르기용으로는 괜찮았다. 외뿔 도깨비의 무릎 뒤쪽을 창끝이 정확하게 뚫고 들어가 상처를 입혔다.

크악!

순간 중심을 잃은 녀석이 달려오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땅을 뒹굴며 소리를 질렀지만, 치명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직 재생력이 뛰어난 수준은 아니지만, 저 정도 상처는 몇 시간이면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사무실에서 재빨리 빠져나와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녀석에게 달려가 다시 창을 찔러넣었다. 아직 단련되지 않은 이 몸으로는 내가 배운 창술을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아직 한쪽 눈에 가위를 박아넣고 있는 녀석의 나머지 눈을 찌르는 데는 충분했다.

크아아아!

양쪽 눈을 잃은 녀석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양팔을 아무렇게나 휘두르기 시작했다.

쾅! 콰앙! 쾅!

그런 팔에 맞은 사무실의 벽이 움푹 패고 금이 가서 쩍쩍 갈라졌다. 굳이 광분 상태에 있는 녀석을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조용하게 멀찌감치 물러나 녀석의 상태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다음 일격으로 치명상을 노릴 것이다.

그런데 변이체의 건너편에 있는 마지막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간신배 녀석의 얼굴이 빼꼼 튀어나왔다.

마침 변이체가 휘두른 팔에 맞은 유리가 박살 나며 파편 몇 개가 그쪽으로 튀었다.

“으아악!”

간신배가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고 다시 안으로 쏙 들어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외뿔 도깨비의 몸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간신배 놈은 아까 죽이는 것이 맞는 선택이었던 모양이다. 간신배가 있는 끝 방의 사무실로 외뿔 도깨비가 벽을 더듬으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변이체는 살아있는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녀석들이다. 머리가 잘리고 심장이 터져도 마지막까지 생명체를 하나라도 더 죽이기 위해 발악한다. 두 눈이 보이지 않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외뿔 도깨비의 뒤로 조용히 다가갔다.

파직!

녀석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덕분에 바닥에 깔려있던 유리 조각이 밟히며 작은 소리가 났다. 그때 녀석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뛰고 돌며 나에게 수박만 한 주먹을 휘둘렀다.

크어엉!

간신배를 노리고 움직이던 것은 연기였던 것 모양이다. 이 녀석은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내가 변이체를 상대한 것이 몇 년이던가? 변이체들의 수법은 질리도록 겪어보았다. 나는 오히려 그것을 역으로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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