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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82화 (82/206)

82. 48년 만의 고백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팔은 생각보다 느리다. 원래 빠른 편이 아닌 외뿔 도깨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것은 환생 후 훈련의 영향인 듯 하다. 매일 5성 기사들과 대련하고 7성 기사인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으니 이런 공격이 느려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눈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고 육체가 반응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실수였다. 녀석의 틈을 파고들어서 치명상을 입힐 생각이었는데 인지 능력과 육체 능력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나는 빅터 하네스가 아니라 강한수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렸다. 지금은 나는 아주 약한 상태의 강한수다.

벽에 살짝 스치며 이상하게 궤도가 바뀐 녀석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몸을 비틀어 최대한 피했으나 기분 나쁘게도 가운뎃손가락 끝이 어깨에 살짝 걸리고 말았다.

콱!

방어 능력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와이셔츠 한장만을 걸치고 있었으니 변이체의 두껍고 날카로운 손톱이 그대로 어깨에 박혔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완력으로 살을 그대로 찢어발겼다.

부우욱!

사람 가죽이 찢어질 때는 상당히 기분 나쁜 소리가 난다. 그것이 내 살가죽일 때는 더욱 그렇게 들린다. 뜨거운 피가 어깨에서 얼굴로 튀어 올랐다. 상처를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상당한 치명상이었다.

“크윽!”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이제 이 정도 고통은 제법 익숙하다. 신체 변형의 좋은 점이라고 할까? 그래도 당한 쪽 팔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쭉 빠진다.

전생에 이 정도 상처를 입었더라면 무조건 죽었을 것이다. 자잘한 상처를 입은 적은 많았지만, 이런 중상을 입은 적은 없었다.

어깨에 큰 상처를 입으며 몸이 흔들렸지만 찌르던 창을 멈추지는 않았다. 다만 한쪽 팔에서 힘이 빠지며 조준이 흐트러졌다.

푹!

창날이 놈의 명치 조금 왼쪽에 깊숙이 박혔다. 팔에서 힘이 빠지며 부족한 힘을 체중까지 실어 찌르며 해결했다.

처음부터 녀석에게서 노릴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았다. 그중 두 눈은 이미 공략한 상태였고 귓구멍이나 콧구멍 같은 곳은 노리기가 어렵다.

머리통을 부수면 좋겠지만 변이체의 단단한 뼈를 어떻게 할 수 있는 힘과 무기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남은 곳은 심장뿐이었다.

크어어어!

그래도 역시 얕았던 모양이다. 외뿔 도깨비가 고성을 지르며 더욱 광분해서 날뛰기 시작했다. 나는 박힌 창을 회수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어깨에선 여전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불로 지지는듯한 통증이 이어진다. 그러나 고통은 참을 수 있다. 다만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체온이 내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출혈이 때문인지 약간 어지럽기도 하다.

재생력을 가지게 된 것이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것 하나 없는 것이 이렇게 불편하다. 어쨌든, 나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소리다.

“간신배!”

녀석을 불러야 하는데 이름을 모르다 보니 그냥 이렇게 불렀다. 녀석이 과연 부름에 대답할까?

나는 녀석이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날뛰는 외뿔 도깨비 너머로 문이 열리며 녀석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시선을 3초만 끌어봐!”

내 외침을 듣고 외뿔 도깨비가 방향을 정하고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온다. 반대편에서는 간신배 놈이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팔을 교차시켜서 엑스자를 만들고 다시 문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럴 줄 알았다. 이래서 내가 인간 불신에 걸린 것이다. 대격변 이후의 세상에서는 저런 놈들이 태반이었다.

외뿔 도깨비를 피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최소한 이렇게 유인해 채송이가 있는 방에서 멀어지기라도 하면 된다. 채송이를 살리는 것이 이 시험의 답인지 변이체를 죽이는 것이 답인지 모르겠지만 내 선택은 채송이 쪽이었다.

그런데 간신배가 있는 마지막 사무실 쪽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 안에서 꽃병 등 소리가 크게 나는 물건들이 복도로 날아와 깨지고 있었다.

물건들은 계속해서 날아왔다. 안에서 간신배와 채송이가 싸우는듯한 소리가 들렸다. 간신배는 말리고 채송이가 악을 쓰며 물건을 던지고 있는 듯 하다.

외뿔 도깨비의 의식이 아주 잠깐이지만 그쪽을 향했다. 물론 이것도 연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상처 입었고 어깨에서 흐르는 피 냄새가 놈을 미치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내 경험을 토대로 말하자면 녀석의 의식을 돌린 것은 무언가 깨진 소리가 아닐 것이다. 두 사람의 다투는 소리가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 이쪽은 한명이고 저쪽은 두 명이다. 그 끝없는 살육에 대한 욕심이 녀석을 잠시 멈칫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녀석의 연기라도 상관없었다. 느껴지는 몸 상태로 봐서 나에게 다음 기회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녀석이 잠시 멈칫하는 순간 나는 이미 녀석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소리도 질러봤다. 나는 공격을 하면서 소리를 지르거나 말을 하는 것을 상당히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나는 지금 공격하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지 않은가? 실제로 그런 바보짓을 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그런데 그 바보짓을 내가 하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붙잡고 있는 의식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외뿔 도깨비는 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었다. 거기에 소리까지 질렀으니 당연히 녀석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통나무 같은 다리가 바닥을 쓸듯이 휘둘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허공을 가로질렀다. 놈이 착각한 것이 있었다. 지금 내 몸은 정상이 아니라서 아까처럼 속도를 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곰 발바닥 같은 크고 투박한 외뿔 도깨비의 발이 내 얼굴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발이 일으킨 기분 나쁜 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나는 몸을 날려 박아놓은 창을 잡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눈에 박혀있는 가위도 아직 뽑지 않고 있었고 명치에 박힌 창도 그대로 두고 있었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 외에는 의외로 맹한 구석이 있는 놈들이다. 이놈은 변이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더 심했다.

“끄아아아!”

망가진 팔까지 사용해 양손으로 창을 잡고 앞으로 밀어 넣었다.

우득!

창이 박히는 소리가 아니다. 내 망가진 어깨에서 나는 소리다. 인대나 무언가가 끊어졌는지 손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 버렸다. 그러나 팔 한 짝을 제물로 바친 대가는 충분했다.

푸욱!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 같던 창이 미끄러지듯 깊숙이 파고들었다. 손에 느낌이 왔다. 심장이 뚫렸다. 순간 발광하던 외뿔 도깨비의 몸이 일시 정지를 누른 것처럼 멈췄다.

한손으로 창을 잡고 마지막 남을 힘을 쥐어짜 뒤로 뛰었다. 가슴에서 창이 빠지며 그곳에서 검은색의 피가 수도관이 터진 것처럼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끄어어어!

녀석이 손으로 상처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막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허억, 헉”

아주 잠깐의 격렬한 움직임이었지만 숨이 턱에 닿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나와 거의 동시에 외뿔 도깨비 녀석도 자세가 무너지며 무릎을 꿇었다.

한 번 더 가야 할까? 내게 그럴만한 힘이 남아있을까?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어깨에서 흐른 피가 몸을 타고 흘러내려 바지를 적시고 싸구려 구두까지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창대를 붙잡아 일어섰다. 눈앞에 적이 있는데 쓰러져 있을 수는 없다. 변이체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할 수 없는 놈들이다.

힘들다. 이런 감각도 오랜만이다. 몸 안에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느낌이다. 온몸의 관절에서 비명을 지른다. 뼈에 붙어있는 살이 내 것 같지 않다.

스승님과 훈련에서도 무식할 정도로 몸을 혹사하긴 하지만 그런 종류의 고통이나 피로감이 아니다.

기억났다. 나는 이런 감각을 딱 한 번 경험해 봤다. 기상연구소에서 마지막 숨을 쉬기 직전에 딱 이런 느낌이었다.

쿵!

그러는 사이 출혈을 이겨내지 못한 것인지 외뿔 도깨비 놈이 멋들어진 외뿔을 땅에 박으며 먼저 쓰러졌다.

“내가 이겼다. 이 새끼야. 크크큭!”

눈앞이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지만 웃음이 나왔다. 전생의 대격변 첫날 그렇게 무서워 보였고 절대로 이기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던 외뿔 도깨비를 쓰러뜨렸다.

저편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의 발소리 아마도 간신배와 채송이일 것이다.

“괜찮아?”

먼저 앞장서고 있는 것은 간신배였다. 아까는 단호하게 내 요청을 거절한 놈이 이제는 누구보다 나를 걱정하는 척을 하고 있다.

사실 내 마지막 남은 힘은 쓰러져있는 외뿔 도깨비에게 쓸 생각이었지만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푹!

지팡이처럼 몸을 지탱하고 있던 창을 들어 아무 의심도 없이 태연스럽게 다가오고 있던 간신배의 목에 쑤셔 박았다.

녀석이 목에 박힌 창을 부여잡고 눈빛으로 나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왜?’

분명 그런 뜻일 것이다.

“난 너 같은 새끼들이 제일 싫어”

목에 창을 박은 간신배가 옆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며 몸을 지탱해줄 창이 없어진 나도 앞으로 쓰러졌다. 이제 버틸 힘이 없다.

“한수씨!”

채송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구했다. 그것이 단지 몇분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그녀가 죽는 시나리오인 것을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구했다.

“정신 차려봐요.”

쓰러져가는 내 몸을 부드럽고 작은 몸이 받쳐 든다.

“미... 안 합니다.”

그때 어쩌면 당신을 구할 수 있었는데도 외면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48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고백하듯이 사과했다.

“뭐가 미안하다고 그래요?”

대답하고 싶지만 이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죽으면 시험은 실패하는 건가?

“한수씨! 한수···.”

그건 좀 억울한데? 변이체도 한놈 잡았고 채송이도 구했지 않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두꺼비와 사장도 죽였고 덤으로 혐오의 대상이었던 간신배 놈도 죽였다. 이 정도면 백점 만점 아니냐 말이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나를 부르던 채송이의 목소리가 갑자기 또렷하게 들렸다.

“통과하셨습니다.”

댕! 댕! 댕! 댕! 댕! 댕! 댕!

일곱번의 종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나는 공터로 돌아와 있었다.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소중한 추억 같은 것은 절대 아니지만 뭔가 더럽혀진 느낌이 든다. 씁쓸한 감정이 남아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음 방으로 들어가 몸 상태를 점검했다. 신체적으로야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피곤했다.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일어났을 때 내가 꽤 깊은 잠을 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생의 대격변 전에나 느껴봤던 숙면을 한 느낌이다.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시험이 오히려 심리 치료를 했다고 한 것일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정신적으로 피곤했을 뿐이다.

몸에 이상이 없으니 다음 시험에 도전했다. 이번에도 정신에 관련된 시험이다.

이름만 들어도 남자로서는 참을 수 없는 시험이다. 누군가는 죽더라도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은 시험일지도 모른다.

여덟번째 시험은 바로 색욕을 이겨내는 시험이다. 대충 어떤 시험일지는 안 봐도 뻔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번 시험은 잘 모르겠다. 여자의 유혹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격변 이전에야 당연히 한 번도 없었지만, 대격변 이후에는 자주 유혹을 받았다.

약간의 식량을 대가로 한번 허락해주거나 아니면 안전의 대가로 자신을 데려가라는 여자는 사실 꽤 많았다.

하지만 난 둘 다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당장 내가 먹을 것도 부족했고 내 안전도 장담을 못 하는데 누구를 지켜주겠는가.

그것 말고도 유혹하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있는 경우였다.

거기에 대격변 이후의 여자들은 화장도 하지 못했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다 보니 여성으로서 매력이 대폭 반감된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는 여성들이 있었지만 그런 여성들이 나를 유혹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쨌든 나는 제대로 된 여성의 유혹에 노출된 적이 없다. 그래서 이번 시험을 이겨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평가하기에 기본적으로 나는 고자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도전을 선택했다. 정말 슬픈 자기 평가의 시간이었다.

시험이 시작되자 시야가 눈앞에 분홍색의 장막이 나타났고 나는 어느새 푹신한 소파에 눕듯이 앉아있었다.

정신계 마법인 것은 알고 있지만 지난 시험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마치 오래된 극장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던 장막이 좌우로 걷히는 순간.

“어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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