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거짓 속의 거짓
눈앞에 살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수백명의 여성들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요염한 자세를 취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내가 어디선가 한 번씩은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내 기억 속에서 꺼낸 사람들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있었다.
일단 전생의 대격변 전에 본 기억이 있던 연예인들이 보였다. 그런데 단순히 한국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해외 연예인들도 다수 보였다. 일부는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람들인데 마법의 힘이 정말 굉장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다른 부류는 내가 전생과 현생에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중에는 채송이도 있어서 코웃음을 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이브 공주와 스테이시도 있었다. 둘을 보고 확신했다. 아무래도 이것도 기억 그대로가 아니라 약간의 조작을 하는 모양이다.
아이브 공주와 스테이시에게는 미안하지만, 실제보다 이쪽이 볼륨이 훨씬 좋았다.
원래도 별생각이 없었지만, 채송이와 아이브 공주 그리고 스테이시를 보고 없던 성욕이 더욱 쪼그라들었다.
여성들이 대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눈앞에서 나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춤을 추거나 일부는 가까이 다가와서 신체적인 접촉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느낀 것은 여자의 몸은 남자보다 훨씬 부드럽다. 그것뿐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시험을 만든 사람은 이것이 굉장히 자극적인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전생에 통신 기술의 발전을 앞장서서 이끌었다고 하는 야동을 질리도록 본 사람이다. 이 정도는 자극 축에도 끼지 못한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육탄공세와 시각적인 자극이 있었음에도 나는 묵묵히 그것을 버텨내었다. 물론 한두 번은 위기가 있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고자지만 육체적으로 고자는 아니니까. 조건 반사처럼 일어나는 그것에는 나도 버틸 재간이 없었지만 끝내 여성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다.
의미 없는 시간이 흐르고 시야가 바뀌며 여덟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생각보다 훨씬 쉬운 시험이었다. 물론 슬라이트 놈이 도전했다면 백퍼센트 탈락했을 그런 시험이지만 시험에 통과하고도 뒷맛이 좋지 않았다. 이기고도 이기지 못한 기분이 든다.
이번에는 정신적인 피로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졌으므로 하루를 쉬기로 했다. 다음 시험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이 악랄한 던전의 설계자가 어떤 변수를 만들어 놨을지 모르는 일이니,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야 했다.
6성에 올랐지만, 그 경지를 아직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나중에 스승님을 만나면 해결될 일이긴 하지만 그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놔야 한다.
그 전은 몰라도 마지막 시험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식사로 체력 보충을 하고 지구로 넘어가 수련을 마친 뒤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시험에 도전했다. 미리 본 정보로는 이번 시험은 탐욕의 시험이다. 이번에도 정신계 시험이다. 여태까지 던전의 시험을 생각해 봤을 때 나에게는 육체적 시험보다는 정신적 시험이 훨씬 쉬운 편이다.
아홉 번째 시험에 도전을 시작했다. 시작은 색욕의 시험과 비슷했다. 시야가 암전되고 무언가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을 때 눈앞에는 무척 야릇한 느낌을 주는 하녀가 한명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안내를 맡은 트레시아라고 합니다.”
“신기하네”
이번에는 안내인이 있었다. 느낌도 좀 그렇지만 무척 미인이다. 내 기억 어디에도 없는 사람인 것을 보니 던전의 설계자가 직접 만든 인공지능 비슷한 창조물인 듯 싶었다.
“주인님께서는 앞으로 보이는 모든 것 중에 하나를 가지실 수 있습니다.”
“하나라고?”
보통 탐욕의 시험이라고 하면 이 안에 모든 것이 네 것이다. 라고 꼬셔서 무엇인가 만지면 탈락시키는 것 아니었나?
“네, 그렇습니다. 앞으로 보이는 모든 것 중에 하나를 가지고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어차피 시험이니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럼 보자고.”
“안내하겠습니다.”
트레시아라고 자신을 소개한 안내인이 앞장서서 걷고 내가 뒤를 따라갔다. 뒤에서 바라보는 트레시아는 정말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전생에 봤던 버츄얼 아이돌보다 훨씬 뛰어난 것 같았다.
“첫 번째 방입니다.”
하얀 대리석에 화려한 금세공이 새겨진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에는 하나의 문이 있었다. 트레시아가 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강렬하게 스치는 음식의 냄새가 몰려들었다.
방 안에는 엄청나게 긴 연회용 탁자 위에 산해진미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처음 보는 음식들도 상당히 많았다.
“음식도 고르는 물건 중의 하나인가?”
“그렇습니다.”
이걸 머리가 좋다고 해야 할까? 만약 이곳까지 오면서 가진 식량이 떨어진 도전자가 있었다면 어쩌면 이것을 선택했을지도 몰랐다.
“저건 뭐지?”
물론 식탐이 거의 없는 나였기에 음식의 유혹은 전혀 효과가 없었지만, 식탁 위의 음식 중에 유독 특이한 것이 하나 보였다.
거대한 붉은색 덩어리 같은 것을 구운 것 같은데 그 위에 여러 가지 양념이 발라져 있었다.
“용의 심장 구이입니다.”
“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이쪽 세상에도 용이라는 것이 있다. 물론 이야기책 속에만 있는 생물이다. 실제 역사책이나 마수 도감 어느 곳에서도 용이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먹으면 단숨에 경지를 3단계 정도 올릴 수 있다고 하는 대단한 영약입니다.”
내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트레시아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3단계를 올린다고? 그럼 내가 저걸 먹으면 9성 기사가 되는 건가? 너무 허황한 이야기다.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그럼 다음으로 가자고.”
“네, 그럼 다음 방으로 이동하겠습니다.”
트레시아는 이후 나를 여러 개의 방으로 안내했다.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금이 산처럼 쌓여있는 방에도 갔고 엘릭서를 비롯한 각종 최상급 영약 수만개가 널려있는 방도 구경시켜 줬다.
황실 보고를 보는듯한 명품 무기가 쌓여있는 방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슈바르거트를 가지고 있는 나에게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그럼 마지막 방을 안내하겠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다. 트레시아가 안내한 마지막 방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의외로 크지 않은 방이었다.
그러나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진 진열장 안에는 지금까지 본 것들보다 훨씬 대단한 물건들이 있었다. 진열장에는 친절하게도 물건의 이름까지 붙어있었다.
-스트라이더 990번
-스트라이더 224번
-스트라이더 111번
이 방에 전시된 모든 것들이 스트라이더의 보물들이었다.
그중 내 눈에 띈 것은 단 하나였다.
-스트라이더 999번
이 던전의 보상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이곳에 있었다.
“이 던전을 공략하면 얻을 수 있는 보물이 이것 아니야?”
“맞습니다.”
트레시아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이것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트레시아가 지금까지와 다르게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스트라이더 999번을 가지고 나가면 나머지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데 이런 기회를 준다고? 너무 대놓고 거짓말 아닌가?”
어차피 가상의 인격이다. 나는 의심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보물을 가지고 나간다면 시험을 계속 치르고 스트라이더 999번도 차지할 수 있지요. 아니면 이곳에서 이것을 선택한다면 나머지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지요.”
오, 이번 것은 좀 솔깃한 유혹이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이래서 탐욕의 시험인 모양이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10분의 시간을 드리지요.”
“그러니까. 정말로 여기서 한 가지를 가질 수 있다는 거지?”
“물론입니다.”
“그 거짓말 믿어도 되나?”
나의 비아냥거림에도 트레시아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진짜 인간도 아니니 얼굴색이 변하는 것이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제국의 유산을 지키기 위한 안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곳까지 도달한 실력자에게 물건 하나만을 내주고 보낼 수 있다면 이득이니까요.”
그럴듯하다.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가상의 세계라서 그런 것인지 초감각으로 적대감이나 그런 것도 느낄 수 없다. 인간보다 거짓말을 잘하는 Ai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럼 너를 고르면 어떻게 되나?”
어쩌면 이방의 어떤 보물보다 더 뛰어난 것이 트레시아가 아닐까 생각해서 던져본 질문이었다.
“그것도 가능합니다. 부디 그렇게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이곳에 갇혀있는 것은 너무 괴로운 일이거든요.”
트레시아가 절박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음 약한 사람이 이 표정을 봤다면 백이면 백, 트레시아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던전의 설계자는 당연히 몰랐을 테지만 나는 인간도 믿지 않지만, 인간이 아닌 것은 더욱 믿지 않는다.
“1분 남았습니다. 이제 선택해주십시오.”
트레시아가 마지막 선택의 순간을 알려왔다.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거야.”
좀 전의 그 절박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트레시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 그런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응”
“후회하실 겁니다. 이 던전은 공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음 시험에서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트레이사의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이곳에서 스트라이더 999번을 제외하면 어떤 물건을 선택해도 됩니다. 정말 물건을 드립니다.”
정말? 이라고 묻고 싶은 거짓말이 쏟아져 나왔다. 진실 속에 거짓말을 감추는 전통적인 거짓말장이의 화법이다.
“대신 내 목숨도 가져가고?”
“아닙니다. 단지 던전 공략에 실패할 뿐이지요.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실 겁니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
“알겠습니다.”
트레시아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히 가시길, 시험에 통과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음 시험에 도전하지 않으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이내 시야가 암전되는 듯 하더니 아홉번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쉬운 듯 하면서 어려운 시험이었다. 탐욕이라는 것은 색욕과 같이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라서 나에게는 별것 아닌 시험이지만 다수의 사람이 진입했을 때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탈락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말 트레시아의 말대로 다음 시험은 그렇게 어려운 시험일까? 물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이 어떤 시험인지 알고 있기에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일단 휴식이 먼저다. 이번에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로한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시험을 대비해 승급하여 얻은 힘을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 필요했다.
같은 수련이라도 지구에서 하면 효율이 조금 더 올라간다. 이제 6성에도 올랐겠다. 얻은 힘을 완전히 소화하게 된다면 떠나게 될 기상연구소 주위에서 가진 힘을 모두 펼쳐 보였다.
5성 기사일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몸의 변화 이후에 스승님이 이미 6성 기사와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고 했지만,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5성 기사일 때의 나를 3명 정도는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스승님과 비교한다면? 어림도 없다. 6성과 7성의 벽은 보통 단계의 차이보다 훨씬 크고 높다. 그러니 대부분의 기사가 7성의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한바탕 수련을 끝낸 후 식사를 마친 뒤 잠깐 잠을 잔 후 다음 시험에 도전했다. 이제 10단계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10단계의 시험은 고독의 시험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하루를 버티는 시험이다. 그래서 조금 찜찜한 구석이 있다. 전생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빛과 소리를 완전히 차단한 곳에 사람을 넣어놓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미친다고 했던가? 도시 전설인지 뭔지 확인해본 적은 없었다.
왜 트레시아가 그렇게 이 시험에 대해 경고했을까? 오히려 너무 쉬운 시험이라서 도전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던전 제작자의 의도를 보면 마냥 쉬운 시험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빛과 소리가 없다고 사람이 쉽게 미친다는 말을 믿지는 않는다. 물론 그것이 아주 장시간 이어진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겨우 하루 정도는 보통 사람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확인은 직접 해보면 된다. 나는 다음 시험에 도전했다. 시험의 시작하는 벽돌을 누르고 문을 열고 나가니 이번에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었다.
이번에도 정신계 시험인가 싶어서 공터 중앙으로 갔지만 시험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기관이 작동되기 시작했다.
쿠쿠쿵!
이제까지완 다른 소음이었다. 전에는 낮은 울림이 있을지언정 이렇게 큰 소리가 나진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엔 던전 전체가 울리는 큰 소리가 났다.
위이이이이잉!
무언가 시동이 걸리는듯한 소리가 이어지고 마침내 변화가 시작되었다. 공터 전체가 엘리베이터처럼 밑으로 끝없이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