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진품 맞나?
열한 번의 종소리가 났다는 것은 11번째 시험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나는 분명히 10번째 시험에 도전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11번째 시험까지 통과한 모양이었다.
희미한 불빛을 따라 걸어간 것이 11번째 시험인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던 것일까? 미심쩍은 구석이 많지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트레시아의 경고는 틀리지 않았다. 두 개의 시험을 이어 붙이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상의 세계여서 그곳에서 죽음이 진짜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죽음의 직전까지 몰렸었다.
몸의 상태는 완벽했다. 오히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는데 오히려 적응되지 않을 정도로 힘이 넘치고 있었다. 피가 끓는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몸 상태를 확인하는 도중 얼굴에 찐득한 느낌이 나서 손으로 문질러보니 문을 열고 엄청난 압박 속에서 당한 것처럼 눈코입 주변에 피가 흐른 자국이 있었다.
황급히 확인해보니 말하기 곤란한 은밀한 부위에도 같은 흔적이 있었고 신발 안도 끈적하게 피가 눌어붙어 있었다.
완전한 가상의 세계가 아니었다는 것일까? 그럼 그 엄청난 미남이 내게 걸어준 치유 효과가 적용된 것이 맞았다.
그런데 내가 본 두 사람은 대체 뭐였을까? 만들어진 기억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생생한 모습이었고 딱히 시험과 관련이 있는 인물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초월자들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광검제 이후로 이 세계에 초월자가 나온 적은 없다.
사이코 메트리를 통해 나는 이미 광검제를 본 적 있기 때문에 광검제는 확실히 아니다. 다른 초월자인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도 이미 본 적이 있을뿐더러 이 사람은 애초에 여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용사이자 초월자 중에 남은 것은 셋인데 엘프 여왕인 이시리엘도 제외하고 나면 둘이 남는다.
아렌 세인티아는 첫 번째 마왕의 침공을 막아낸 이후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그림자라 불렸던 조엘 에이크만 역시 사망한 지 오래되었다.
조엘 에이크만운 워낙 베일에 감춰진 인물이기에 확실하게 사망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아렌 세인티아의 경우에는 수만 명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했기에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아렌 세이티아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한 나머지 용사가 신성 왕국의 멸망에 일조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그그그극!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갑자기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가 나며 한쪽 벽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마 12번째 시험까지 강제로 이어지는 건가?’
내가 들은 정보에는 이런 것에 대한 설명까지는 없었다. 다만 12번째 시험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계획이 완전히 어긋나고 있었다.
12번째 시험은 상급 마수다. 대체 어떻게 이것을 잡아서 이곳에 가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국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백무충이야 개체수가 많아질 뿐이지 하나의 개체는 약한 편이라서 잡아다 이곳에서 번식시켰다면 간단한 일이지만 상급 마수는 다른 문제다.
나는 애초에 11번째 시험까지만 도전하고 12번째 시험은 포기할 생각이었다. 아직 내 실력으로 상급 마수와 단독으로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은 이미 얼마 전에 직접 경험한 차였다.
그것은 생각은 뜻밖의 승급으로 6성에 오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몸의 상태는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이상하게 좋다.
슈바르거트를 꺼내 싸울 준비를 했다. 어차피 도망칠 곳은 없다. 통로를 열고 지구로 도망친다고 해도 어차피 입구에 녀석이 버티고 있다면 돌아오지 못한다.
지구에서 몇 년 혹은 몇십년이 걸려 7성 기사가 된 후 돌아오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안정적인 판단일 것이다. 그런데 이 아무것도 없는 지구에서 몇 년 혹은 몇십년을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살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살아남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저 열리는 벽면에서 나오는 것이 상급 마수라면 위험감지가 미친 듯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잠잠하다.
기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분명 감지는 하고 있지만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소리다. 전생부터 지금까지 위험감지는 여태까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열리고 상급 마수로 추정되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번들거리는 검은색 갑각질의 형태가 보인다.
주변의 벽에서 마수를 향해 무언가가 뿌려졌다. 백무충 때와 같이 동면 상태로 잠들어 있던 마수를 깨우는 물질일 것이다.
그것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수는 두 발로 일어섰다. 마수로서는 보기 드물게 인간형의 이족보행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형태가 그렇다는 것이지 인간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일단 온몸을 둘러싼 검은색 갑각질과 양팔의 끝에는 손가락 대신 기다란 칼을 달아놓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나는 저 마수에 대해 알고 있다. 상급 마수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평가받는 흑갑병이라는 녀석이다.
최상급이라는 등급에 걸맞게 전투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최상급이라는 말은 8성 이상의 기사가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냥 지구로 도망갈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절망적인 전력의 차이다. 6성 기사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 위험감지는 나에게 적극적으로 위험을 알리지 않고 있었다.
놈이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흑갑병의 체구는 그리 크지 않다. 그래서 더욱 무서운 마수다. 작은 만큼 민첩하고 갑각질의 외피는 7성 기사의 오러로도 흠집을 내지 못할 만큼 단단하다.
녀석의 눈이 서서히 떠지며 눈동자가 없는 붉은 색 눈이 나를 인식했다.
캬아아아아!
나를 보자마자 녀석이 강제로 긴 동면에 빠지게 만들었던 인간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날카로운 포효를 내뱉었다.
그리고 사전 동작도 없이 마치 공간을 압축하는 것 처럼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빨라!’
엄청난 속도였다. 거리가 꽤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이 뛰었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내 앞에 와서 장인이 만든 명검처럼 날카로운 앞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카앙!
그런데 막아냈다.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녀석의 공격을 튕겨내었다. 내가 아직 승급한 후 내 경지에 대해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기본적으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한계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원래라면 막을 수 없어야 정상인 공격이었다. 그리고 힘을 생각해도 내가 밀려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나는 간단하게 놈의 공격을 튕겨냈을 뿐 전혀 밀리지 않았다.
흑갑병은 한 번의 공격이 막혔지만, 그것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움직일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멈춰서서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보인다. 동면을 너무 오래 해서 흑갑병이 약해진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흑갑병의 공격에 실린 힘과 속도는 가공할 수준이었다. 스승님이라 할지라도 쉽게 막아낼 수 없는 그런 공격이었다.
그런데 막을 만 하다. 오히려 조금 여유가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비정상적으로 강해져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당황하는 중이었다.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공격이다.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수준이다. 그런데 재생력조차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손목이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언제까지 당황하고 있을 수는 없다. 검에 오러를 힘껏 불어넣으며 반격하려고 했다.
우우우웅!
슈바르거트가 울기 시작했다. 심지어 오러를 그다지 불어넣지도 않았다. 승급할 때 뿜어지던 그 막대한 마나를 삼키고서야 검명을 울렸던 슈바르거트가 지금 너무 쉽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슈바르거트에선 2미터가 넘는 선명한 오러가 자라나 있었다. 막대한 오러를 품은 검이 휘둘러졌다.
슈하아아악!
명검처럼 예리함을 자랑했던 흑갑병의 팔 하나가 허무하게 잘려서 날아갔다.
끼에에엑!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내가 한 일지만 아마 흑갑병보다 내가 더 놀라고 있었다.
이런 비슷한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있었다.
‘광검제’
광검제가 변이체를 사냥하는 기억을 본 적이 있다. 지금 내가 흑갑병을 상대하는 모습이 마치 광검제가 장난스레 변이체를 사냥하던 그 장면과 닮아있었다.
‘이게 초월급의 경지?’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최상급 마수인 흑갑병을 이렇게 쉽게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이런 힘을 얻게 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단 하나밖에 없었다. 시험 속에서 만난 그 미남이다. 손끝을 살짝 댄 것만으로도 거의 죽기 직전인 내 몸을 완전히 치유한 그 힘이다. 단순히 몸을 치유한 것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속전속결이었다. 도망칠 곳도 없었지만, 뒤로 빠르게 물러난 흑갑병에게 달려들었다.
파앙!
다리에 별로 힘도 주지 않았는데 공기를 찢는 소리를 내며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간다. 이것은 흑갑병이 나에게 달려들었던 것보다 빠르다.
날아가는 도중에 중심을 잃었다. 갑작스러운 힘에 몸과 정신이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스로 검을 내질렀다. 흑갑병이 피하려고 했지만 오러의 잔상은 흑갑병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끼에에엑!
이번엔 흑갑병의 옆구리가 터져나갔다. 달려 나간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가까스로 멈춰섰다. 그러는 사이 드러난 틈은 무척 많았지만 흑갑병은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몸을 날렸다. 조금 전과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흑갑병은 반격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최대한 나를 피해 움직였으나 흑갑병의 몸은 조금씩 해체가 되고 있었다. 다리를 당한 이후로는 도망가는 것도 포기하고 맞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것이 흑갑병의 마지막이었다.
스걱!
흑갑병의 흉측한 머리통이 잘려 하늘을 날았다. 나는 재빨리 흑갑병의 시체를 챙겼다. 그렇지 않아도 자무새의 깃털을 모두 써버린 상황이었다. 가치로 따지면 흑갑병의 시체 쪽이 훨씬 비쌀 것이다. 애초에 급이 다른 마수다.
승부를 빨리 보려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갑자기 초월급의 힘을 얻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 힘이 영원히 지속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힘이 사라지기 전에 흑갑병을 처치하는 것이 여러모로 옳은 판단이었다.
열두번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뭔가 이상했지만 어쨌든 나는 이 던전을 완전히 공략했다.
“후우!”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몇번이나 죽을 뻔했다. 전생의 나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위험한 선택을 몇번이나 했다. 솔직히 조금 무모한 일이었다.
물론 환생한 후에도 내 성향이 바뀌지 않았다. 모든 것은 마신교 때문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단기간에 강해질 필요가 생겨버린 것이다.
어쩌다 보니 지금 가지게 된 초월급의 힘이 유지된다면 좋겠으나 느낌상으로는 아니다. 내 육체나 오러홀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마치 아무 대가 없이 힘을 끌어다 쓰는 느낌이다. 이것이 내가 이 힘이 일시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천장의 중앙에 매달려 밝은 빛을 뿜어내던 조명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멀리 있을 땐 워낙 멀리 있기도 하고 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려오는 조명의 모양은 거대한 접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조명이 조금씩 빛을 잃으며 완전히 바닥에 내려선 순간 접시 위에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축하드립니다. 도전자님”
트레시아가 나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래 이제 보물을 받을 차례인가?”
“물론입니다.”
“속임수 같은 것은 없겠지?”
“없습니다. 위대하고 관대한 제국은 도전자님과 같은 실력자가 제국에 적대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웃기는 이야기다. 이 던전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제국에 적개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애초에 제국은 이 세상에 이미 남아있지 않다.
“알겠어. 그럼 보물을 줘.”
나야 어차피 스트라이더 999번만 챙기고 떠나면 그만이다.
“준비 중입니다. 잠시 뒤로 물러나 주시길”
트레시아의 말대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트레시아가 나에게 다시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챙!
그리고 그 순간 접시 형태의 조명이 반으로 쪼개지며 트레시아의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그리고 주변이 어둠에 휩싸였다. 마법으로 주변을 밝히자 조명이 정확히 반으로 쪼개진 곳에 작은 상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허!”
어이가 없어서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이건 처음부터 천장에 스트라이더 999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쉽게 꺼내지 못하도록 뭔가 조치를 해놨었을지도 모르지만 한마디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얘기 그대로였다.
상자를 열자 스트라이더 999번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이번에도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탐욕의 시험에서 봤던 스트라이더 999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쪽이 진짜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왜 확률을 따지자면 이것조차도 진품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나는 달걀 형태의 펜던트 형태로 만들어진 스트라이더 999번 위에 손을 대고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