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용사의 심장
펜던트의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제법 친숙하게 느껴지는 분들이 보였다.
광검제, 지르크 폰 가이스트 그리고 스트라이더 시리즈의 제작자인 멸악의 마법사,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들이자 마지막 초월자들.
“이거 먹을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기묘한 색상의 작은 환을 광검제에게 내밀었다.
“그거 뭔데?”
“아렌이야.”
“뭐?”
“걱정 마, 아렌에게 미리 허락받았으니까.”
“또 무슨 미친 소리야?”
광검제가 저런 질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역시 미친 마법사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아렌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응축해서 영약으로 만들었어.”
“이 미친년아!”
별호에 미쳤다는 뜻의 광이 들어가는 광검제가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에게 미쳤냐고 하는 것을 보니 이질감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광검제의 이야기만 해도 정말 미쳤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행동은 확실히 미쳤냐는 욕을 들어먹을 만한 것이었다.
“왜! 아렌이 죽기 전에 허락했다니까?”
“그놈이 언제 거절하는 거 봤냐?”
“했잖아?”
“언제?”
“우리가 구해준다니까. 싫다고 했잖아.”
“아···.”
그들이 말하고 있는 아렌 세인티아도 마왕을 처치한 용사 중 한명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 용사는 아렌 세인티아 혼자다.
신성 왕국의 성기사이자 성자로서 직접 신탁을 받아 용사 퇴치에 나선 진짜 용사였다. 나머지 용사들은 엄밀히 따지자면 아렌 세인티아의 행보에 동참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가장 활약한 것은 광검제이긴 하지만 아렌 세인티아도 초월급의 기사였으며 무한한 신성력을 발휘하는 성기사였다.
어떤 역사가의 기록으로는 용사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어쩌면 아렌 세인티아였을지도 추정할 정도였다.
문제는 마왕의 침공을 막아내고 아렌 세인티아가 신성 왕국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을 우려한 대신관과 썩어빠진 고위 신관들이 아렌 세인티아를 이단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아렌 세인티아는 이것조차 신의 뜻이라면서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여 수만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장에서 목이 잘렸다.
나머지 용사들이 분노해 길길이 날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에 복수하지 말라는 아렌 세인티아의 유언 때문에 누구도 직접 나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제국 소속의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와 광검제는 황제를 협박해 신성 왕국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엘프들도 그것에 한몫을 거들었고 결과적으로 신성 왕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세계에서 종교라는 것이 사라지는 결과를 만들었다. 아렌 세인티아의 말대로라면 이것 역시 신의 뜻이었을까?
“그래도 그렇지, 친구로 어떻게 영약을 만들어? 그리고 뭐? 나보고 그걸 먹으라고?”
“싫어?”
“당연하지!”
“쳇! 이거 남자 몸에 좋은 건데···.”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자 광검제가 더욱 날뛰었다.
“쳇은 뭐가 쳇이야! 그리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 모았다고? 아렌 그놈 무좀도 있었잖아! 신성력으로 고치라니까 더럽게 안 고치더니 그럼 그것도 거기 들어갔다는 소리잖아! 그리고 너 아렌 발바닥 본 적 있어? 그 두꺼운 발바닥 각질 어쩔 건데? 그걸 나보고 먹으라고?”
“이거 굉장히 효과가 있는 약이야.”
“내 말 안 듣고 있지?”
먹기 싫은 이유가 그것이었나? 확실히 광검제도 정상은 아니었다. 애초에 용사들은 모두 어딘가 결여된 부분이 있는 인간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절대자들의 대화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너밖에 먹을 사람이 없어.”
“왜?”
“영약의 힘이 너무 강해. 아렌이 너무 좋은 재료였어.”
“친구를 재료라고 하지 마!”
“어쨌든 보통 사람은 이거 먹으면 몸이 터져서 죽어.”
“마음에 들지 않는 놈에게 주면 딱이겠군. 그런데 보통 사람의 기준이 어디까지야?”
“대충 아렌보다 약한 사람?”
초월자보다 약하면 보통 사람인 건가? 절대자들의 기준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그럼 제이크 놈도 못 먹어?”
“제이크는 약해서 안 돼”
갑자기 제이크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광검제의 입에서 나올만한 제이크라는 이름이라면 제이크 반 마이스마이어 공작일 것이다. 제국의 마지막 검으로 불린 위대한 기사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약자 취급이다.
“그럼 조엘하고 나밖에 없잖아?”
“그러니 네가 먹어 아렌도 조엘에게 먹히긴 싫을 거야.”
“효과는?”
“몸에 좋아. 제이크가 먹으면 초월에 닿을지도 몰라.”
“제이크는 못 먹는다며?”
“몸이 버티질 못하니까.”
뭔가 대화가 어긋나는 느낌이다. 어쨌든 그럼 몸이 버틸 수만 있다면 먹어도 된다는 건가? 초월에 닿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영약이다.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약이다. 용사들 기준으로 보통 사람은 먹지 못하는 약이라고 하지만 혹시 나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결론은 나는 먹어도 별 효과 없다는 거네?”
“남자 몸에 좋아.”
“됐어! 안 먹어.”
“쳇!”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혀를 차며 영약을 둥근 형태로 만든 펜던트 안에 넣고 닫았다.
거기서 기억이 끝났다. 내가 손에 든 물건은 정말 대단한 물건이다. 내가 제이크 공작의 수준이 이른다면 이 영약으로 한 번에 초월급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보통 사람이 먹으면 죽는다. 이 던전은 마지막까지 함정을 파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기억 속에서 누구도 이 영약이 스트라이더 999번이라고 한 적이 없었고 그런 증거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을 믿지 않지만, 사람이 아닌 것은 더욱 믿지 않는다. 더구나 이미 한번 나를 속이려고 했던 트레시아는 당연히 믿지 않는다.
이제는 조명도 사라져 암흑 상태가 된 던전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초감각 덕분에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되지만 혹시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법으로 광원을 여러 개 만들었다.
나는 생각하는 시점을 바꿨다. 이 제국의 유산은 황제의 피를 이은 적통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만든 곳이다.
만약 제국의 후계자가 이곳에 온다면 어떤 방식으로 스트라이더 999번을 물려주려고 했을까?
결코 어려운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황제의 적통이라고 해서 무조건 뛰어나다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이 제국의 유산이 필요한 시점에서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인증 방식도 간단할 것이다. 무언가 열쇠나 증표가 있거나 혹은 지구인의 생각이긴 하지만 혈액으로 인증하거나 그런 방식일 것이다.
그럼 그 인증을 받는 곳은 어디일까? 가장 눈에 띄는 곳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반으로 쪼개진 접시 형태의 조명기구를 발로 차서 멀리 날려버렸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시험은 이 중앙에서 시작되었다. 장치나 마법도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터의 가장 정중앙에 손을 대고 기억을 읽었다. 오늘 두 번째지만 이제 하루에 두 번 정도는 괜찮다.
공터의 중앙에서 읽어낸 기억 자체는 허탕에 가까웠다. 건설 과정이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건설 과정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본 기억은 공터 바닥과 벽면 전체 공사에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벽면의 한쪽 구석만이 전혀 공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사람이 부족해서? 그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곳에 뭔가 중요한 추가 공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하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을 넣어둘 곳이라는 의미다. 일반 기술자들에게 맡길 수 없는 비밀스럽고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니까.
바닥에서 손을 뗀 나는 구석으로 걸어갔다. 공사를 하지 않고 있던 벽면의 아주 일부분이었다.
물론 나에겐 인증할 열쇠나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할 수 있는 힘이 있기도 했다.
슈바르거트에서 2미터가 넘는 오러가 솟아 나와 벽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했다. 5성 기사일 때는 약간의 흠집만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임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금의 나는 초월자다.
슈각! 슈각!
그 단단하던 벽이 마치 두부처럼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1미터는 넘을 것 같은 두꺼운 벽면이 잘려 나가고 무너지자 복잡하게 연결된 각종 기관과 마법진이 잔뜩 새겨진 원판 등이 나타났다.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손에 넣지 못할 물건이라면 방어기관이 작동해서 아예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기관과 마법진도 초월급의 힘을 담은 슈바르거트 앞에서 무력하게 박살 나기 시작했다. 기관들은 꽤나 깊고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얼마쯤 부수고 들어갔을 때 방어기관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함정의 시험 때처럼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들고 마법이 들이쳤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의미 없는 것이었다.
스승님을 따라 해 봤다. 몸 주위로 오러의 막을 펼쳤다. 미숙한 운용이었지만 초월자가 펼치는 미숙한 오러의 막은 그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키기엔 충분했다.
와장창!
마침내 부술 수 있는 만큼 부쉈다고 생각한 순간 남아있던 기관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무너진 기관의 가운데에 작은 목갑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목갑이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목갑 중앙에는 열쇠 구멍이 보였지만 어차피 없는 물건이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러를 씌운 검으로 살짝 그어주자 딸칵하고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목갑을 여는 순간 안에서 무언가가 강하게 튀어나왔다. 정확히 얼굴 쪽을 노린 그것은 오러막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졌다.
이건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정도로 빠르게 발사된 암기였다. 바닥을 보니 그것은 바늘처럼 얇고 정밀하게 세공된 암기였다. 정말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던전이었다.
일단 그 바늘조차도 조심스럽게 챙겼다. 튀어나온 속도로도 보통 기사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 같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닐 것이다. 아마 독이라도 발려있지 않았을까.
목갑 안에는 평범해 보이는 민무늬 반지가 들어있었다. 백금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반지다. 그러나 이것이 스트라이더 999번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탐욕의 시험에서 트레시아가 보여준 환상에서 본 스트라이더 999번과 같은 모습이었다. 진실 속에 거짓을 섞는다. 이것이 트레시아, 아니 이 던전의 설계자가 여태까지 보여준 패턴이었다.
반지의 기억도 읽고 싶었지만, 또 사용하면 오늘 세 번째가 되니 참기로 했다. 챙길 것은 모두 챙겼으니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방어기관도 모두 작동을 멈춰 딱히 막아서는 것도 없었다. 처음 들어왔던 조종실로 돌아가 문이 열리는 기관을 작동하려고 할 때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지 시발.”
단순히 박탈감이 아니라 정말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바람에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부여되었던 초월급의 힘이 사라진 것이다. 예상한 일이긴 했다.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마치 버려진 쓰레기처럼 구겨져서 바닥에 쓰러져있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힘을 얻어서 사용하고 얻은 이익에 비하면 아주 약소한 부작용이다. 다만 이 부작용이 얼마나 길게 가느냐가 문제다.
그보다 일시적으로라도 이만한 힘을 준 것으로 추정되는 그 미남은 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정말 온몸에 아무 힘도 들어가지 않고 오러나 마나도 운용할 수 없기에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몇 시간 정도가 흐르자 서서히 몸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몸을 일으킬 정도로 회복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사탕을 꺼내 먹는 일이었다.
마치 이능력을 오래 사용한 것처럼 초월급의 힘을 사용한 반동이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남아있던 사탕을 모두 꺼내 씹어먹은 후 그것도 모자라서 상당한 양의 육포를 먹고 나서야 허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덕분에 배가 터질 듯이 부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조금 더 쉬다가 나가기로 했다. 만전이 아닌 상태로 밖에 나갔다가 마신교 부스러기라도 만나면 허무하게 당할 수도 있다.
별것도 아닌 부분에서 방심하다 죽은 생존자들을 수도 없이 봤었다. 그들은 모두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어주었다. 이전처럼 나를 노리는 세력이 전혀 없는 상태라면 모를까 이제는 조심해야 한다.
오히려 나는 내가 제국의 유산을 손에 넣는 시점에서 부교주가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었다. 통로를 이용해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녀석이라면 이곳에 당장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을 느끼고 마침내 기관을 작동시켜 외부로 통하는 던전의 문을 열었을 때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