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87화 (87/206)

87. 999번의 정체

“나왔구나.”

기다리던 사람들은 마신교 나부랭이들이 아니라 스승님과 아버지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스승님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왔을 줄은 몰랐다.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안 올 수가 있겠느냐.”

아버지가 아들 걱정을 한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나. 그보다 내가 던전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시간 감각이 사라져서 알 수 없었다. 체감상으로는 한두 달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설마 1년 정도 지나거나 했던 것은 아니겠지?

“제가 시간 감각이 사라져서 그런데 스승님 얼마 만에 돌아오신 거죠?”

“일주일이다. 그런데 너 벽을 넘었구나?”

역시 스승님은 단번에 내가 6성에 오른 것을 알아보셨다. 그런데 겨우 일주일? 체감상으로는 최하 한 달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시간 감각이 무너졌다고 해도 일주일은 말이 되지 않았다.

“네, 성과가 있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하네스 남작”

내 대답에 스승님은 아버지에게 축하를 건넸다.

“모자란 아들을 잘 보살펴 주신 덕분이지요.”

겸양하게 말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얼굴이 활짝 펴져 있었다. 6성 기사. 왕국의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경지다. 더구나 나처럼 어린 나이라면 더욱 그렇다.

“장하다.”

아버지가 대뜸 나를 껴안고 등을 두드려주시는데 뭔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생소한 느낌이지만 나쁘진 않았다.

“그런데 여기가 진짜 제국의 유산인가 보구나?”

“네, 여기가 제국이 만든 던전입니다.”

“이 안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제국이 만든 던전을 모두 공략했다고 생각하기엔 일주일은 너무 짧은 시간일 것이다.

“그건 나가서 말씀드리지요.”

굳이 안의 살풍경한 모습을 아버지와 스승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진 않았다.

폐광 밖으로 나왔다. 실제로는 겨우 일주일이었다고 하지만 나는 몇 달 만에 밖에 나오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이 겨우 일주일이었다니 상식을 떠나 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무리 제국의 유산이라고 해도 던전에 그런 장치가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시간에 관여하는 마법은 불가능의 영역으로 취급받고 있다. 애초에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제국이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생에 읽었던 판타지 소설처럼 황제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버리면 되는 일이다.

어쨌든 불가능한 마법이다. 그 대단했던 초월급 마법사인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도 결국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치매에 걸렸고 늙어 죽었다.

바깥의 맑은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쬐니 전생에 지하와 반지하 방을 전전하며 살다가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비록 전세였지만 신축 오피스텔로 이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기뻤다. 이사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대격변이 터졌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변이체 놈들을 좋아할 수 없던 이유 중의 하나다.

“그래 그 안에서 어떤 수련을 했기에 벽을 넘었느냐?”

바깥에 나와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던전에 도전했습니다.”

상대가 스승님과 아버지라면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스승님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아버지가 흥분하셨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보기엔 다친 곳 없이 멀쩡해 보이니 괜찮았다. 중도에 포기가 가능한 던전이었나보구나.”

“네,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럼?”

“마지막엔 포기가 불가능한 구조로 바뀌더군요.”

스승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럼 던전을 모두 공략했다는 말이냐?”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중간 과정에서 승급했고요.”

“허허!”

“아니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일을 혼자 진행하는 거냐.”

스승님은 허탈하게 웃으셨고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이것이 스승과 부모의 차이인 걸까?

“그래도 제국의 던전이라는 곳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다행이다. 운이 좋은 줄 알거라.”

나 혼자 공략에 성공했다고 하니 쉬운 던전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아닙니다. 몇번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뭐?”

스승님의 표정도 굳었다. 나는 12개의 시험에 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도전 과정도 상당히 각색했지만, 마지막 10번째와 11번째 시험에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 이야기를 꾸며내는데 고생을 좀 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오두막집에서 본 두 사람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설명을 듣는 동안 스승님과 아버지의 얼굴색이 몇번이나 바뀌고 감탄하거나 나를 꾸짖기도 하셨다.

“네가 살아있는 것은 하늘의 도우심이다. 너무 무모한 짓을 했어. 평소의 너라면 하지 않을 짓인데 대체 왜 그런 것이냐?”

“일단은 마신교 때문이고요.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강해져야 하니까요.”

“그리고?”

“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이 던전에 도전했다면 많은 희생이 있었을 겁니다.”

스승님이라고 할지라도 어려웠을 겁니다. 라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다른 시험은 둘째치고 흑갑병은 스승님도 이기기 쉽지 않은 상대다. 내가 임시였지만 초월급의 힘을 얻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을 수도 있지. 아니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네가 희생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야.”

“죄송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좋게 끝난 일이니까. 네가 미안할 일은 아니다. 다만 앞으로 위험한 상황이 오면 잘 생각해보거라. 내가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남들이 어떻게 되든 그것은 다음 문제야.”

나는 스승님을 다시 보았다. 기사 중의 기사라고 할 수 있는 스승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이상하느냐?”

“네, 조금 놀랐습니다.”

“전쟁을 경험해본 것은 아니지만 나도 꽤 많은 전장을 겪었다. 임무나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용감한 사람들도 많이 보았지. 하지만 지금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느냐? 물론 나도 젊었을 때는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생각하는 관점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더구나.”

나는 생존을 위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나 존엄성을 포함해 모든 것을 버렸던 사람이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후로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승님은 기사로서 나와 반대의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데 둘의 성향이 변하고 비슷한 부분에서 교차하는 느낌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냥 늙은이의 생각일 뿐이다. 너에게 강요하진 않는다. 허허!”

스승님은 허허 웃으며 마무리하셨지만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던전의 보상으로 무엇이 나왔느냐?”

아무래도 스승님보다는 아버지가 재물에 더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일단 아렌 세인티아를 압축해서 만든 영약에 대해서는 비밀이다.

“이겁니다.”

나는 스트라이더 999번을 꺼내 두 분께 보여드렸다.

“설마 이게 다인 것이냐?”

“네, 이것 하나뿐입니다.”

아버지는 대단히 실망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을 보고 조금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외형은 볼품없는 수수한 반지였다. 하지만 분명 대단한 물건일 것이다.

아직 어떤 물건인지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스트라이더 997번과 비슷한 수준이라고만 해도 세상이 발칵 뒤집어질 수준일 것이다.

“그것은 네가 가지도록 해라.”

스승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내가 공략한 던전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스승님이 주인으로 있는 영지에서 나온 물건이다. 원칙상으로 보면 스승님의 물건이 맞다.

“내가 제자가 목숨을 걸고 얻어낸 물건을 탐할 인간으로 보이더냐?”

“아닙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군말 없이 감사히 받아들였다. 만약 이것이 997번과 같이 창고 개념의 물건이라면 안의 물건 중 팔아먹을 만한 것이 많을 것이다.

이 기회에 997번 안의 물건들도 아버지에게 넘겨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왕실이 어떻게 반응할 것 인가인데 왕실도 7성 기사의 영지에서 나온 던전에 대해 크게 간섭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찾아온 것은 너를 걱정해서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내가 영지로 돌아가니 왕실에서 어명이 내려왔더구나.”

역시 왕실이 움직였는가?

“무슨 일이랍니까? 아니 어느 쪽입니까?”

마신교의 일 때문인지 아니면 제국의 유산 때문인지 혹은 둘 다 일지도 모른다.

“그 부분은 나도 모르겠다. 너와 나의 소환령이 떨어졌다. 아직 기간은 넉넉하지만 서두르는 것이 좋겠구나.”

던전을 일찍 공략해서 다행이었다.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 왕도로 돌아갔다면 대단히 찝찝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에 이곳은 폐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테이시를 비롯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듣는다면 미치고 환장할만한 이야기다. 이것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기관과 마법의 집합체였다. 그러나 이미 발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제국의 유산도 마탑이 연구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특히 오러와 마법을 모두 차단했던 그 장치는 어떤 원리인지 몰라도 대단히 위험한 물건이다. 세상에 나오면 안 될 물건일지도 모른다.

“그냥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왜 그러느냐?”

“모두 공략했고 제가 상당히 부숴놨지만 악용할 소지가 있습니다. 저희가 영지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잠시 생각하던 스승님은 고개를 끄덕이셨고 아버지도 동의했다.

“확실히 우리 영지는 아직 이만한 보물을 지킬 여력이 없습니다.”

나와 스승님이 지하로 다시 돌아가 던전의 입구로 들어가는 통로를 파괴해 무너뜨렸고 폐광의 입구도 같은 방식으로 막아버렸다.

나중에 공을 들인다면 복구할 수는 있겠지만 상당한 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폐광을 처리한 우리는 바로 출발해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영주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이틀 정도가 걸렸고 그사이에 나는 스트라이더 999번의 기억을 읽었다.

제작자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단골손님인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보였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내가 있었다. 그러나 한눈에 저 사내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이거 너 달라고?”

“그래.”

“싫은데?”

“재료도 내가 구해준 것이잖냐.”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와 그 사내는 스트라이더 999번을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너 손자 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맞다. 그 아이는 약하니까. 보호해줄 물건이 필요하다.”

“흐음, 왠지 주기 싫은데?”

“왜?”

“이 귀여운 아이가 암살자 손에 들어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우리 이제 암살 같은 거 잘 안 한다.”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와 반말로 옥신각신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 그리고 암살에 대한 언급 사내의 정체는 명확했다.

죽음의 그림자라고 불렸던 용사 중의 한명 조엘 에이크만이다. 지금도 대륙 전체에 존재하고 있는 암살과 정보를 다루는 단체 ‘어둠’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웃기고 있네. 우리 마탑 소속 꼬마가 얼마 전에 너희 애한테 당했거든?”

“그건 어린 소녀들 납치해서 강간하던 놈이니 우리에게 죽었어도 자연사나 다름없다. 그러니 너도 가만히 있었던 거 아닌가? 그리고 나이가 80이 넘은 놈이었는데 무슨 꼬마냐.”

“그런가? 내 기억에는 꼬마였는데···.”

“그건 네가 늙어서 그렇고”

조엘 에이크만의 말에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모든 주변이 물건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야, 야! 하지 마, 그거!”

조엘 에이크만이 기겁하면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조엘 에이크만이 그림자로 변했다.

“죽어!”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말과 함께 떠오른 물건들이 총알처럼 조엘 에이크만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딱히 대단한 마법을 쓴 것 같지도 않은데 물건들이 날아가는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저 정도면 5성 기사 정도는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림자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여 그것들을 모두 받아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수십 개의 물건들을 망가지지 않게 받아내 곱게 바닥에 내려놓은 그림자가 조엘 에이크만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주겠다는 거야 안주겠다는 거야?”

“이건 안 줘. 대신 다른 거 줄게. 암살자하고 백룡이라니 전혀 안 어울리잖아.”

“지렁이 같던데···.”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다시 도끼눈을 뜨자 조엘 에이크만이 찔끔하며 물러섰다. 그리고 언제 싸웠냐는 듯이 둘은 다시 평온한 상태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일단 999번은 997번처럼 아공간을 가진 창고형 아이템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엘 에이크만이 손자에게 주고 싶어할 정도로 뛰어난 성능을 가진 방어형 아이템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단 용도를 알았고 안전한 아이템이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나는 손에 반지를 끼고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지가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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