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백룡의 가치
반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억 속에서 용사들이 백룡이니 지렁이니 했으니 대충 이럴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반지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손가락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렁이처럼 보이긴 하네’
손가락을 타고 움직여 손등 위로 올라간 녀석이 마치 인사를 하는 것처럼 머리로 추정되는 부위를 까닥 움직였다.
“지능도 있는 건가?”
끄덕끄덕
말도 알아듣는 듯 하다. 지렁이라고 부르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이 작은 지렁이 같은 아이가 어떻게 방어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술력 자체는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지능이 있는 작은 골렘이라고 보면 될까?
“방어는 어떻게 한다는 거야?”
그러자 손등에서 뛰어오른 지렁이는 작은 방패처럼 몸을 변형시키더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손바닥 위에 다시 착지했다.
“크기는 그게 다야?”
끄덕끄덕
신기하긴 한데 크기가 너무 작다. 물론 크기가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 저 정도 크기면 눈먼 화살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조엘 에이크만이 겨우 그 정도 성능을 보고 손자에게 주려고 했을까?
“다른 기능도 있어?”
끄덕끄덕
귀엽기는 한데 차라리 말을 하는 기능도 넣어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럼 보여줘.”
지렁이는 손바닥 위에서 여러 형태로 변신을 계속했다. 작은 망치나 톱 혹은 이쑤시개처럼 변하기도 하고 열쇠 모양으로 변하기도 했다.
이쑤시개 기능은 별로 필요 없을 것 같지만 가만 보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거 맥가이버 칼이네’
신체를 마음대로 변형하니 만능열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조엘 에이크만은 방어기능보다는 이 기능을 보고 달라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최고의 암살자가 만능열쇠를 가지게 되면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을까?
암살자의 입장에서 보면 유용할 거 같기는 한데 이것이 과연 스트라이더 999번에 맞는 가치가 있는 보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너를 만든 분이 백룡이라고 했으니까. 나도 백룡이라고 불러줄게.”
끄덕끄덕
“일단 반지로 돌아가 서로 천천히 알아가자. 잘 부탁해”
끄덕끄덕
백룡이 다시 반지로 변해 손가락에 감겼다. 그런데 이 녀석 미세하게 내 몸에서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동력을 이런 식으로 충전하는 모양이다. 나니까 느꼈을 정도지 아주 미세한 양이라서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참 신기하구나.”
옆에서 스승님이 튀어나왔다. 스승님이 다가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일부러 감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반응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실용성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말하기가 무섭게 백룡이 놈이 손가락을 살짝 죄어온다. 만든 사람 성격이 반영된 것인지 은근히 성질이 있는 놈이다. 역시 이 녀석 지렁이라고 부르지 않은 게 정답이었다.
“그렇게 위험한 던전에서 나온 보물인데 자연스레 그 쓰임새가 보이겠지.”
“그렇겠죠.”
나도 백룡이가 쓸모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던전에 대해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역시 공식적으로 발표해야겠죠.”
그래야 997번 안의 물건들을 꺼내 사용할 수 있다.
“아니 그것을 물어본 게 아니다. 네가 혼자 던전을 공략했다는 것을 그대로 발표할지 물어본 거다.”
잠시 고민했다. 내가 혼자 던전을 공략했다고 밝히면 명성은 오를 것이다. 하지만 의심하는 인간들도 분명히 나올 것이다. 실력이 있다고 해도 나는 아직 어리니까.
“그건 스승님이 혼자 하셨다고 발표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역시 이럴 땐 스승님을 내세우는 것이 더 낫다.
“그것보다는 너와 내가 둘이 했다고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그래도 상관은 없습니다.”
나를 엮어서 발표했다고 해도 내가 크게 도움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알겠지만, 대중의 시선은 그렇지 않은 법이다. 스승님이 내 명성을 올려주려고 이름을 슬쩍 끼워넣었거나 아니면 들러리나 했다고 생각하겠지.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네”
우리는 하루를 더 열심히 달려 영주성으로 돌아왔다. 내가 돌아오자 반겨주는 이들이 있었다.
일단 가족들은 매우 기쁘게 나를 맞이해줬고 슬라이트 놈은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뜨기 시작하더니 눈에서 힘을 풀지 않고 쫓아다니며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너 혼자서 뭘 한 거냐?”
“뭘 하긴 열심히 수련했지.”
“그것만으로 이렇게 될 리가 없다. 당장 말해라!”
“곧 알게 될 거야.”
슬라이트는 내가 먼저 6성으로 승급한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물론 다 말해줄 수도 없었지만 나는 일부러 말해주지 않고 애를 태웠다.
슬라이트 뿐만이 아니라 자칼도 말을 직접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소심한 녀석답지 않게 눈에서 호승심이 보였다.
일단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슬라이트를 떼어놓고 나는 따로 시간을 내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코로스의 부하 중 전령으로 보냈던 용병이다. 덕분에 코로스의 용병단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이미 동료들이 모두 죽은 것을 알고 있는데도 아직 영주성에 남아있었다.
“미안하게 됐어.”
나는 일단 사과부터 했다. 코로스와 부하들이 부교주에게 모두 죽은 것은 내 잘못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용병을 시작한 이상 목숨이야 내놓은 셈이죠. 대장이랑 다른 친구들도 억울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냥 여기 남기로 한 건가?”
“아직 생각 중입니다.”
코로스의 용병대는 코로스를 제외하면 모두 3성 기사였다. 지방을 떠도는 용병대치고는 대단히 수준 높은 전력이었다.
“나는 여기 남았으면 좋겠어. 솔직히 영지의 전력이 조금 아쉽거든. 좋은 대우를 약속하지.”
“시간을 좀 주시겠습니까?”
“시간은 얼마든지 주지 거절한다고 해도 탓하진 않을 거야. 대신 떠날 때 미리 말을 해줘. 뭐라도 챙겨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본인의 말마따나 언제든지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 용병이고 마신교에 가담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은 죄를 지은 것이다.
스승님은 최대한 빨리 가자고 하셨지만, 왕도로 돌아가기 전에 할 일이 많았다.
하룻밤을 보낸 후 스승님과 아버지 그리고 벤 행정관님까지 창고로 오시라고 했다.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어 봐야 쓸모도 없는 997번에 들어있던 무구들을 여기에서 털어낼 계획이었다.
검과 갑옷, 활, 창을 비롯해 끝없이 쏟아지는 병기들을 보며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그중에서 벤 행정관님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손까지 벌벌 떨고 있었다.
“이번에 얻은 보물에 아공간 기능도 있더라고요. 그 안에 있던 물건들입니다.”
내 말에 백룡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고개를 빼꼼 들었지만 다른 손으로 슬쩍 눌러서 집어넣었다.
“엄청나구나. 과연 제국의 유산이다.”
스승님도 무구들의 품질을 보고 놀라워하셨다. 확실히 무구들의 품질은 매우 뛰어난 편이다.
“이걸 그냥 사용하진 못하겠고 개량하려면 손이 꽤 많이 가겠구나.”
아버지가 검 한 자루를 들고서 양각된 제국의 문장을 보고 미간을 조금 구기셨다.
“네, 고생 좀 하셔야겠어요. 다행히 이번에 얻은 것이 이것 말고도 꽤 있으니 그것들은 왕도에 올라간 김에 처분해서 영지로 보내드릴테니 자금은 부족하지 않을거에요.”
준성체 자무새의 깃털은 모두 사용했지만 자무새 새끼들의 사체나 흑갑병의 사체는 아직 가지고 있다. 거기에 생각초도 있었다. 이것들을 스테이시를 통해 마탑에 넘기면 큰돈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무구는 있는데 이것을 사용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쉽구나.”
암테일 영지에 병사나 기사가 확실히 부족했다. 무조건 많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기사나 병사 모두 유지비가 많이 드는 직업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 생각해도 암테일 영지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인재도 최대한 구해보도록 할게요.”
“그래, 병사는 이곳에서 최대한 충당해볼 테니 기사들을 부탁한다.”
그렇게 당장 생각나는 문제들을 하나씩 처리하다 보니 며칠이 훌쩍 지나갔다. 슬슬 왕도로 올라가려고 하는 참에 영지에 손님이 찾아왔다.
보초병이 경고를 울리는 소리에 또 마수라도 나타났다 싶어서 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영지의 하늘 위에 이쪽을 향하고 있는 은백색의 미끈한 비행선이 보였다. 아직 굉장히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경계를 서던 병사가 눈이 좋은 모양이었다.
내가 먼저 서둘러 밖으로 나가 가장 먼저 발견하고 경고를 울린 병사를 칭찬하고 있으니 곧 하나둘씩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또 집에 연락했냐?”
“아니야. 연락 안했다.”
슬라이트에게 물어보고 다시 비행선의 측면을 보니 금색의 화려한 문장이 보였다.
“왕실이네”
“저게 보이는 거냐?”
신체 변화를 겪으며 시력도 좋아졌다. 어깨를 으쓱하자 그런 나를 보고 슬라이트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소환 날짜에 여유는 충분히 있었는데 직접 비행선까지 보낸 것을 보니 마냥 여유가 있진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변수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이윽고 비행선이 영주성의 마당에 착륙했다. 왕실 물건이라 그런지 이곳에 타고 왔던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비행선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비행선의 문이 열리고 튀어나온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한손을 번쩍 들어 손을 흔드는 것은 아이브 공주였다.
왕실에서 우리에게 소환 명령이 떨어진 것을 알게된 아이브 공주는 자신이 직접 데리러 가겠다고 떼를 쓴 모양이었다.
우리가 하루 이틀만 일찍 출발했더라면 길이 엇갈릴 뻔했다. 아이브 공주는 태어나 처음으로 왕도를 벗어난 경험 때문인지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먕!
그래 너도 왔구나. 똘똘이도 공주를 따라와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미양!
그리고 나중에 데려온 붉은 털의 고양이도 같이 왔다. 데려올 때는 주먹만 한 고양이였는데 그사이에 꽤 자라서 이제 똘똘이와 비슷한 크기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똘똘이는 이제 성장이 멈춘 건가?
나의 작명 센스를 의심받게 한 고양이는 결국 공주가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고양이 이름이 무려 빅토리아 아그네스 1세였다. 차라리 내가 붙여준 이름이 더 낫지 않았나 싶다.
우리야 늘 보던 사람이니 자연스러웠지만, 공주를 처음 본 사람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난리가 났다.
“공주님 안으로 드시지요.”
“그래요. 여기는 뭐가 유명하죠?”
아이브 공주는 잔뜩 기대하고 온 모양이지만 그런 거 없다. 그저 그런 영지다.
“제가 유명합니다.”
민망하지만 사실이다. 스승님과 내가 암테일 영지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지.
“호호호! 그래요. 빅터 공자가 제일 유명하죠.”
뭐가 그리 신났는지 아이브 공주는 실없는 농담에도 자지러졌다.
공주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맡기고 스승님과 나는 공주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관리를 맞이했다. 아까부터 우리에게 뭔가 할 말이 잔뜩 있다는 표정과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노엘 브라스 백작님. 행정부 소속 에이모 크라셀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위에서 뭔가 다른 명이 내려왔는가?”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바로 출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공주님은?”
“두 분만 빨리 모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알겠네.”
스승님이 나를 내게 시선을 돌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공주가 떼를 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진짜 무슨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다.
나는 근처에 있던 슬라이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 사이에 비행선에서는 아이브 공주의 수행 인원이 각종 물건을 들고 우르르 내리고 있었다.
“하여튼 나 먼저 가니까. 설명 좀 잘 해주고. 공주님 모시고 천천히 오도록 해”
“나중에 다 설명해줘야 한다.”
그렇게 스승님과 나는 비행선에 올라 곧바로 왕도를 향했다. 왕실의 비행선은 전속력으로 비행을 시작했다. 성능도 확실히 왕실의 비행선이 좋았다. 에인프라흐 공작가의 그것보다 두배는 빠른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전투에도 쓸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기동력이나 공격력이 문제가 아니라 방어력 때문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아까울 뿐이었다.
왕궁의 착륙장에 곧바로 착륙한 우리는 내리자마자 그대로 국왕의 집무실로 안내받았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게.”
지난번에 봤을 때와 달리 잔뜩 굳은 표정의 국왕이 우리를 맞이했고 옆에는 왕세자와 에인프라흐 공작까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거운 정적이 집무실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느낌이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