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89화 (89/206)

89. 지각 변동

“일단 앉지.”

국왕의 권유에 스승님과 내가 왕세자와 에인프라흐 공작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입이 마르는 순간이었다.

왕국에서 가장 큰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한참의 정적 후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에인프라흐 공작이었다.

“마신교에 대해서는 좀 알아보았는가?”

갑자기 치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은 스승님에게 하는 질문일까. 아니면 나에게 하는 질문일까? 공작의 시선이 누구 하나를 지목하고 있지 않았다.

“원하지 않게 그들과 연이 닿아서 말이지요.”

대답은 스승님이 하셨다.

“어디까지 알아봤는가?”

이건 전생에 용산에 있던 분들께서 쓰던 화법인데?

“별로 아는 건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대답했다. 실체는 알았지만 정말로 별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마신교가 어디에 있는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하니까.

“반마를 처리한 건 자네인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반마? 그 반푼이 변이체 놈들을 그렇게 말하는 건가?

“반마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왕도에 나타났던 그 연쇄살인범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제가 맞습니다.”

아무리 내가 조심히 처리했어도 대충 눈치는 채고 있으니 불렀을 것이다.

“호오”

따로 앉아있던 국왕이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어떤 방법을 쓴 것인지 몰라도 우리가 한 방 먹었어, 특무대도 어쩌지 못한 녀석을 흔적도 없이 처리하다니 말이야.”

“운이 좋았습니다.”

운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그냥 이렇게 우기기로 했다. 국왕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암테일 영지에 있던 마신교도들은 어찌했는가?”

“몇 명을 제거하긴 했으나 그곳이 지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보니 내가 계속 대답하고 있었다. 이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곳에는 반마가 없었는가?”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충분히 가능했겠어.”

8성 기사인 국왕이 내 경지를 못 알아볼 리 없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약했다.

“다시 말하지만, 노엘 자네는 정말 좋은 제자를 얻었군.”

“저에게는 과분한 제자입니다.”

“그럼 나에게 넘기지 않겠는가?”

“네?”

조금 좋아지나 싶었던 분위기가 갑자기 냉각되었다. 나 갑자기 국왕의 제자가 되는 건가?

“자네 제자를 나에게 넘기지 않겠냐는 말이야. 워낙 탐이 나는 인재라서 말이야.”

“그건 곤란합니다. 아직 가르칠 것이 많습니다.”

스승님은 의외로 국왕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셨다.

“그건 저도 곤란합니다. 빅터 하네스는 저도 눈여겨 보고 있는 인재니까요.”

갑자기 왕세자도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그럼 선택권은 빅터에게 있겠군?”

에인프라흐 공작이 요령 좋게 끼어들어 중재에 나섰다.

“아직 스승님께 배울 것이 많습니다.”

내 선택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언젠가는 공직에 나서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장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핫하! 사제지간이 사이가 아주 각별하군. 뭐 그건 그냥 해본 소리고”

다시 국왕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리고 나를 주시했다.

“자네, 마신교의 사제를 만나보았나?”

“아니요. 사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일이었다. 만났으면 반드시 목을 따줬을 것이다.

“사제는? 그럼 누굴 보았는가?”

“부교주... 아니 자칭 마신교의 이인자라고 하는 자를 만났습니다.”

내 말에 국왕과 에인프라흐 공작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왕세자는 변화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왕세자를 제외한 국왕과 에인프라흐 공작은 부교주를 만나봤을지도 모르겠다.

“그자를 만났단 말인가? 뭐라고 하던가?”

에인프라흐 공작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해 있었다.

“재밌어서 한번은 봐주지만, 다음에 만나면 죽인다고 하더군요.”

“허어···. 노엘 자네도 만났는가?”

“아닙니다. 간발의 차이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그거 아는가? 노엘 자네는 이미 그자를 만난 적이 있다네.”

“제가 말입니까?”

스승님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에인프라흐 공작은 앞에 있던 식어버린 차를 물 마시듯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과 나는 차도 내주지 않았다. 이 집 손님 대접이 엉망이다.

“기억할지 모르겠네만, 자네와 내가 꽤 젊었을 때야 부르클링 평야 쪽에 마수 토벌을 하러 나간 적이 있었지.”

“기억합니다. 꽤 격렬한 전투가 많았지요.”

“그래, 그때는 우리 실력이 썩 좋진 않았지. 그래서 우리를 따르던 병사들이 많이 상했어.”

“그때도 공작님은 이미 6성 기사셨잖습니까. 저야말로 신출내기 기사였지요.”

꽤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공작의 6성 기사 시절이라니 그럼 40년이 훌쩍 넘는 옛날 아닌가?

“그때 우리가 부상 당한 병사들을 돌보려고 근처의 작은 마을에 들른 적이 있었지. 그때 꽤 잘생긴 젊은 사내가 그곳의 촌장이었어. 기억하나?”

“아···. 기억이 날듯 말듯 하군요. 대단한 미남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이 납니다. 꽤 기묘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죠.”

“그가 바로 마신의 사도라네.”

부교주가 아니라 마신의 사도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하긴 교주는 마신의 강림체라고 했으니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보다 그럼 부교주의 나이가 공작이나 스승님과 비슷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늙지 않는 이능력 같은 것도 있었던가?

스승님은 꽤 충격을 받으셨는지 말을 하지 못하셨다.

“사실 나도 몰랐다네.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그자가 말해줘서 알게 되었지. 그때부터 이미 마신의 사도였다고 하더군. 빅터군 지금도 마신의 사도는 젊은 모습 그대로던가?”

“네, 그렇게 나이가 많은 사람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여전히 그 모습이군. 마신의 능력인지 뭔지 몰라도 참 부러운 능력이야. 우리는 이렇게 늙어가고 있는데 말이야.”

“큰일 날 소리를!”

국왕이 호통을 쳤으나 에인프라흐 공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씁쓸한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신교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부교주가 그렇게 오래 전부터 활동을 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늙지 않는다니 내가 알기로 변이체의 능력에 그런 것은 없다. 아니 알지 못한다. 누가 변이체가 늙는 것을 확인하겠나. 늙지 않는다면 그 능력을 가진 변이체가 지구에 남아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럼 이 자리에서 그를 만나보지 못한 것은 저뿐이군요.”

왕세자가 소외된 느낌을 받았는지 아니면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것인지 한번 끼어들었다.

“그럼 왕실에서는 언제부터 그들을 주시하고 계셨던 겁니까?”

나는 국왕에게 물었다. 마신교가 이렇게 강해지기 전에 처단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이제는 늦었다고 해도 그때는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그리 오래되진 않았네. 정확히는 내가 즉위하고 얼마 후부터라고 봐야겠지. 그때 마신의 사도가 나를 직접 찾아왔었네. 그때까지 왕실의 경비가 그렇게 쉽게 뚫릴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지.”

부교주의 능력이라면 아무리 경비를 세워놔도 의미 없을 것이다. 통로를 통해 이동하는 것이니까.

“그때는 나도 약했지. 마신의 사도는 그때 나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네.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대충 이해가 되었다. 일종의 상호불가침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 모양이다.

“그럼 알면서도 봐주고 있으신 거군요.”

“아니 그 반댈세. 마신교가 우리를 아니 대륙을 봐주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들의 전력이 그렇게 강합니까?”

“반마의 숫자가 꽤 많긴 해도 그 정도는 별것 아니네, 다만 사도와 마신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지.”

“마신의 사도는 교주를 강림체라고 하더군요. 그가 그렇게 강합니까?”

“직접 확인은 해보지 못했네. 하지만 최소한 초월급으로 추정하고 있네 어쩌면 과거에 용사들이 막아냈던 마왕급일수도 있네. 무슨 이유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지는 아무도 모르네. 제멜아크 왕국에서 몇번 접촉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 그리고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 라이브러쉬 왕국 뿐만 아니라 제멜아크 왕국에서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최하 초월급이라는 말은 생각보다 무서운 이야기다. 그 이상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해본 초월자의 위력은 그 정도의 위협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10만 대군을 모은다고 한들 그 군대를 8성 기사 여러 명이 이끌고 있다고 해도 초월자 한명을 상대할 수 있을까? 마치 핵무기 앞에 탱크를 끌고 가는 꼴이다.

더구나 과거 초월급의 용사 네 명이 모여 겨우 막아낸 마왕급이다? 그건 답이 없는 이야기다.

“엘프 여왕의 도움을 얻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비록 인간과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때 마왕의 침공을 막아냈던 용사가 엘프 여왕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유일한 초월자다. 그녀라면 마신의 강림체인 교주를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엘프 여왕도 이미 알고 있네.”

“연락이 가능한 겁니까?”

“이쪽에서는 불가능하지, 엘프 여왕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해서 내가 직접 만나러 갔었지.”

이번에는 에인프라흐 공작이 대답했다. 그런데 이런 기밀 정보를 스승님은 몰라도 나에게 막 얘기해줘도 되는 건가? 들으면 들을수록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확정되는 기분이다. 그래도 궁금한 건 못 참지.

“뭐라고 하던가요?”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하더군.”

“그건 무슨 뜻입니까?”

“나도 모르겠네. 그렇게만 말하고 사라졌으니까.”

괜히 들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열린 결말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자네 처음부터 거기에 제국의 유산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

그보다 중요한 올 것이 왔다. 국왕이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요. 정말 몰랐습니다. 대충 그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만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신교가 몰려있을 줄 알았다면 깔끔하게 포기했을 겁니다.”

“단지 가능성만 가지고 영지를 그곳으로 선택했다고?”

“네,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썩 만족스럽지는 못해서요.”

“그래 무엇이 나왔나?”

국왕의 물음에 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

“백룡이 나와봐.”

반지로 변해있던 백룡이가 고개를 빼꼼 들고 주변을 둘러보듯이 움직였다. 그런데 얘 눈도 없는데 뭘 두리번거리는 거지?

“호오, 그것이 무엇인가?”

국왕의 물음에 말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백룡이 방패로 변신, 이쑤시개로 변신, 톱으로 변신”

내 명령에 따라 백룡이가 이것저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백룡이 이제 쉬어”

백룡이가 반지로 스르륵 돌아가는 것으로 쇼는 끝났다. 쇼를 관람한 국왕과 왕세자 그리고 공작 셋이 모두 황당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랄까 조금 실망한 느낌?

“그게 다인가?”

“아뇨. 아공간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안에 제국 기사단 500여명이 쓸만한 무구가 들어있었지요. 그건 영지에 두고 왔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모든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셋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것의 번호는 알고 있는가?”

“스트라이더 997번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군.”

공작과 국왕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또 뭔가 있는 듯 하다.

“자네가 제국의 유산을 가진 것을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야. 999번이나 1000번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졌겠지만 997번이라면 상관없네.”

“그 두 개라면 뭐가 달라지나요?”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 두 가지는 기존의 것들과 차원이 다른 보물이라고 하더군. 참고로 왕실에서는 993번을 발굴했고 나는 995번을 발굴했네 자네가 가진 것이 997번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라이브러쉬 왕국 쪽에는 3, 5, 7번이 배분됐던 것 같군.”

백룡이가 차원이 다른 보물이라고? 아직은 전혀 모르겠다. 그래도 997번이라고 말한 것이 다행이다.

“그럼 멤파이 자작령에서 발굴된 던전에서 나온 것이 991번이거나 999번이겠군요?”

모르는 척 먼저 운을 띄웠다.

“아마도 그럴 테지. 그런데 아무리 조사해 봐도 그것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단 말이야.”

그렇겠지요.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공작님 어떻게 저도 모르게 그런 위험한 던전에 도전하신 겁니까.”

갑자기 스승님이 공작에게 따지기 시작하셨다. 나에게 절대 공작이 그럴 리 없다고 말씀하셨던 만큼 상당히 배신감을 느끼신 모양이다.

“하하하, 미안하게 됐네. 극비 사항이니 말이야.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고 하지 않나? 자네도 경험해봤으니 알겠지만, 아무래도 제국의 유산은 소수정예로 공략하는 것이 손실도 적고 말이야.”

왕실과 공작가가 어떤 식으로 우리를 감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은연중에 스승님과 내가 던전을 공략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내비쳤다.

공작은 상당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국왕을 바라봤다. 도와달라는 무언의 요청이었다.

“이제 할 얘기는 다 했으니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겠군. 자네들을 부른 이유라고 할 수 있겠네.”

그 요청을 받아들여 국왕이 나섰다. 우리의 시선이 국왕에게 쏠리자 국왕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신교주 그러니까 마신의 강림체가 어쩌면 죽었을 수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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