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교주가 죽었다고?
교주가 죽었다고?
“제멜아크 왕국의 동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는가?”
“크락슈의 왕이 지배하는 사막지대 아닙니까?”
우리 라이브러쉬 왕국이 아닌 제멜아크 왕국의 동쪽은 금관을 쓰고 태어난 크락슈라는 상급 마수가 지배하는 땅이다. 제멜아크 왕국의 국력은 약하지 않다. 라이브러쉬 왕국과 거의 동등한 국력을 지닌 나라다.
하지만 초기의 토벌에 실패하자 크락슈가 주변의 강한 마수들을 끌어모아 강력한 무리를 구축했기에 오히려 제멜아크 왕국이 그곳을 토벌하려면 국력이 저하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냥 내버려 두는 가장 큰 이유는 크락슈와 마수들이 사막지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로는 그곳을 토벌한들 원래 쓸모없는 사막지대이기 때문이다.
라고 어렸을 때 벤 행정관에게 배운 적이 있다. 그렇게 마치 라이브러쉬 왕국이 북방에 엘프 왕국을 두고 있듯이 수십 년 전부터 그렇게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알고 있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땅 중에 하나지. 우리는 그곳이 바로 교주가 자리를 잡은 곳이라고 보고 있었네.”
“아, 그래서 마수들이 사막을 벗어나지 않았던 건가요?”
“그렇지, 역시 하나를 알려주면 둘을 생각하는군. 먹을 것도 없는 사막에 모인 강한 마수들이 왜 그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겠는가? 더 강한 존재가 그것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하나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단순히 힘과 경제적인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곳에 문제가 생긴 겁니까? 마수들이 반란이라도 일으켰나요?”
“아니 사라졌네.”
“네?”
“지역 자체가 사라진거라네. 거대한 땅덩어리가 흔적도 없이 날아갔지.”
듣고는 있지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국왕의 말은 이어졌다.
“우린 초월자의 힘이 어떤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라네.”
그렇다. 나와 다르게 이 세대는 초월자를 직접 보지 못한 세대다. 유일한 초월자인 엘프 여왕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외부 활동을 하진 않는다. 엘프의 숲에 침입하려는 멍청이들에게 손을 쓰긴 하지만 보통은 엘프의 숲에 닿기 전에 북부의 호랑이라 불리는 자칼의 아버지 에르하트 후작의 군대가 처리한다.
“아무리 초월자라도 그렇게 넓을 지역을 한 번에 바다로 만들지는 못하네. 마왕과 용사들의 전투에서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었지. 뭐 그때도 산이 몇 개 날아갔다는 기록은 있지만 말이야.”
“사막 지대 전체가 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 대륙의 한 귀퉁이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네.”
크락슈가 자리 잡은 사막지대는 결코 좁은 땅이 아니다. 어지간한 대귀족의 영지 몇 개를 합친 정도의 크기다. 그게 그냥 사라졌다고?
“누가 했는지는 알 수 없겠죠?”
“누구라고 지칭이나 할 수 있겠나? 인간의 힘으로 그게 가능한 일이던가? 광검제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네”
“그래서 교주가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군요?”
“그렇네. 아무리 마신의 강림이라고 해도 그런 충격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고 보고 있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초월자의 힘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나로서는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은 괜찮은 겁니까? 그 정도 크기의 땅을 날려버릴 정도면 엄청난 충격이 있었을 텐데요.”
“당연히 괜찮지 않지. 제멜아크의 왕도까지 충격이 느껴졌다고 하더군.”
그냥 소멸이 아니라 정말 물리적인 힘으로 어지간한 소국 크기의 땅을 날려버린 건가? 왕도까지 충격이 전달되었을 정도면 주변은 초토화 상태일 것이다. 이것은 정말 초월자라 할지라도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다.
“그래도 교주가 정말 죽었다고 한다면 한시름 놓게 되었군요.”
적어도 나에겐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부교주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교주가 정말 죽었다면 왕국의 힘을 모아 마신교를 토벌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네 오히려 더욱 큰 문제가 생겨버렸지.”
하지만 국왕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힘의 균형에 문제가 생겼군요.”
조용히 계시던 스승님이 한마디 하셨다. 스승님의 말을 듣고 나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는 3개의 나라가 존재한다. 라이브러쉬 왕국, 제멜아크 왕국, 엘프 왕국 그중 엘프 왕국은 사실상 대외활동이 없는 곳이니 없는 곳이라 쳐도 무방하고 인간의 나라는 두 개 뿐이다.
과거에 수많은 소국이 난립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가이브아크 제국이 대륙을 통일했고 그 제국이 둘로 갈라진 후 그 상태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었다.
라이브러쉬 왕국과 제멜아크 왕국은 일단 겉으로는 앙숙처럼 보여도 따지고 보면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다.
각자 국경을 삼엄히 경계하곤 있지만 국지전이 일어나는 것조차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바로 그거네. 레안드로와 나는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상태나 마찬가지였지. 비록 마신교라는 시한폭탄을 달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욱 인간끼리는 싸우지 않고 힘을 기르기로 말이야.”
“그런데 균형이 무너진 거군요.”
균형의 중심에 있는 교주가 죽었고 제멜아크 왕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다음은 뻔한 결론이다.
“교주가 사라졌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네”
국왕의 뜻은 중요하다. 그리고 왕국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에인프라흐 공작도 같은 뜻이니 이곳에 있을 것이다.
“저 역시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스승님도 자기 뜻을 밝히셨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어떻게든 잡음을 최대한 줄일 수 있겠지.”
비록 다른 거물들이 남아있으나 대부분은 직접적인 무력 대신 정치적인 힘을 가진 귀족이고 북부의 에르하트 후작은 그곳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니 실질적인 무력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좌지우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부족할 것이네. 분란의 씨앗은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되는 법이지. 그래서 시선을 돌릴 방법이 필요하다네.”
그렇게 말한 국왕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왕세자와 공작의 시선도 나를 향하는 것을 보니 미리 준비된 함정인 것 같다. 안 되겠다. 나는 이곳을 벗어나야겠어.
“저보다 더 출중한 인물이 많이 있을 겁니다.”
“아니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도 자네만 한 인물이 없지.”
에인프라흐 공작이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최연소 6성 기사라 이건 예상하지 못한 것인데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왔고. 그것 말고도 자네가 만든 업적이 좀 많은가?”
왕세자도 실실 웃으며 한마디를 거들었다. 왕세자 그렇게 안 봤는데 나쁜 사람이었다. 이 원한은 잊지 않을 것이다.
“당장 뭘 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우리가 먼저 할 생각도 없지. 아마도 제멜아크 쪽에서 먼저 움직일 것이네. 내가 아는 레안드로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야. 하지만 지금 제멜아크의 상황을 보면 급하게 움직일 테니 곧 준비가 될 것이네. 그때 조금 도와줄 수 있겠는가?”
국왕이 마지막을 정리했다. 아까부터 국왕이 레안드로라고 막 부르는 이름은 제멜아크 왕국의 국왕 이름이다. 슬쩍 스승님을 보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외통수다. 왕국의 최고 권력자 셋과 스승님까지 이러는데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당장 뭘 한다는 것도 아니라고 하니 일단 승낙을···.
“슬라이트 녀석도 합류시킬테니 심심하지 않을걸세.”
“하겠습니다.”
에인프라흐 공작의 마지막 한마디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양 국가 모든 대중의 시선을 움직일 정도의 큰 작업이다. 제멜아크가 급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그런 국가적인 작업이 금방 시작될 리가 없다.
한다고 해도 뭐 별것 아니지 않을까?
그 후에 이런저런 얘기를 좀 더 나눈 후 나는 국왕과 왕세자에게 은밀한 제의를 따로 받았다.
쉽게 말하자면 등용될 때 자기 쪽으로 붙으라는 얘기인데 아버지에게 붙으나 아들에게 붙으나 내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얘기라서 대충 둘러대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애초에 공직에 나서게 된다고 해도 명예를 위해 잠시만 일하다가 물러날 생각이지 누구처럼 무슨 무슨 대신 같은 것을 맡을 생각은 전혀 없기 때문에 의미 없는 이야기다.
왕궁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고 왕실의 의전차량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굉장히 오랜만에 돌아온 느낌이 났다.
“단장님!”
어쩐지 그사이에 꽤 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폴켄이 나를 부르며 쪼르르 달려오는데 왠지 반가워서 그러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잘 지냈냐?”
“단장님 죄송해요.”
폴켄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무슨 일이야?”
“닭들을 지키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었다. 폴켄의 잘못이 아니다. 정말 내가 꼬꼬 가족이 외부에 들키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지구에 넣어뒀으면 됐을 일이다.
“그럼 누구에게 들켰냐?”
“스테이시 누나요.”
하필이면 최악의 상대다. 분명히 미친 마법사 모드가 발동했을 것이다.
“꼬꼬들은... 죽었나?”
설마 해부하진 않았겠지?
“아니요.”
그나마 다행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됐지?”
“스테이시 누나가 닭장에서 나오질 않아요.”
“일단 가보자.”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폴켄과 함께 닭장으로 들어가자 닭들과 한 몸이 되어있는 스테이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오랜만이에요.]
마치 어미 닭이 된 것처럼 빛닭이와 철닭이를 양쪽 겨드랑이에 품고 있던 스테이시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닭들이 워낙 커서 오히려 닭들이 스테이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뭐 하고 있어?”
[마나를 느끼고 있어요. 얘들 신기해요. 마나를 사용해요. 굉장히 특이한 파장이에요.]
그거야 그렇겠지.
“해부 같은 거 하면 안 돼, 웬만하면 바깥에는 비밀로 해주고.”
[해부를 왜 해요? 사형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난 아니에요. 그리고 이런 좋은 연구재료를 왜 공유하겠어요.]
내가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보다는 훨씬 낫다.
“그보다 할 얘기가 많은데 나오지 않을래?”
[그냥 여기서 하면 안 돼요?]
마탑과 이용할 일이 많다. 일반 상단에 팔기에는 상급 마수의 사체는 덩어리가 너무 크다. 그리고 생각초의 가공도 마탑에 맡기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일단 나와봐. 후회하지 않을걸?”
스테이시가 아쉬운 표정으로 닭장 밖으로 나왔다.
“이것들 마탑에 매각하고 싶은데 가격을 잘 받을 수 있을까?”
정리해둔 목록을 스테이시에게 보여주자 스테이시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아무리 마탑이라고 해도 상급 마수의 부산물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거 전부 저에게 팔아요. 평생이 걸려도 갚을게요.”
얼마나 흥분했는지 글씨로 쓰지 않고 육성이 터져 나왔다. 스테이시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처음 봤다.
“연구용으로 필요하다면 중계 보수로 일정 부분을 넘겨줄게”
[전부 갖고 싶은데 어쩔 수 없죠. 당장 사부님에게 연락할게요.]
스테이시가 마법까지 사용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아직도 옆에서 죄인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폴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엄밀히 따지면 폴켄도 스승님의 제자이니 나에게는 사제가 된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된다면 스승님의 후계자가 될 아이다.
“그래도 믿고 맡겨주신 일인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하고 살다 보면 실패도 하는 거야. 실수나 실패에 무너지지 않고 이겨내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거지. 꼬꼬들이 무사하니까. 이건 실패라고 할 수도 없어.”
나는 얼마나 많은 실수와 실패를 했던가. 소중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모른다.
“네”
폴켄이 당장 이것을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먼 훗날 갑자기 내가 한 말이 생각날 때도 있겠지.
집으로 돌아와 집사에게 그동안의 보고를 받았다. 잠시 떠나있었지만 보고 받을 내용과 직접 결재할 서류가 꽤 많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초고속으로 밀려있던 모든 일을 끝마친 나를 집사가 격려해주었다.
“이제 한동안 별일은 없겠죠?”
“네, 도축장이야 이제 안정되었고요. 상단과 연계도 별일은 없습니다.”
암테일 영지에서 아이브 공주와 일행들이 돌아오려면 며칠 정도는 걸릴 것이다. 그 전에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밤이 되어 늘 그렇듯이 개인 수련장에 들어와 지구로 넘어갔다.
미뤄뒀던 일을 할 생각이다. 오늘 나는 드디어 기상연구소를 떠날 생각이다. 이제 어지간한 변이체와 마주치더라도 싸울만한 힘을 얻었다. 이곳에 묶여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그동안 이곳에 쌓아뒀던 편의시설들을 거두고 공벌레들을 수련장으로 옮겨놓고 통로를 닫은 뒤 기상연구소의 밖으로 나와 건물을 살펴봤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도 이미 낡은 건물이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큰 사건도 몇 번 있었다. 무너지지 않고 버텨준 것이 고마울 지경이다.
전생에 죽기 전 3년 전에 도착해 통로 능력을 얻은 후 계속 이곳에서 지냈으니 지구에서 내가 가장 오래 산 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설 같은 것을 보면 돌아올 곳을 없애기 위해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하던데 나는 그렇게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다.
오랫동안 보금자리가 되어준 기상연구소에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한 후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