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미친개
기상연구소에 올 때 왔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간을 계산하자면 약 19년 만이다.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 길을 걸어서 올라올 때는 꿈도 희망도 없었다. 그저 지친 몸을 이끌고 구차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기어 올라왔을 뿐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예전엔 무조건 피하고 도망칠 뿐이었다. 이제는 내가 놈들을 사냥하러 간다. 가서 녀석들이 가진 능력을 빼앗아 더 강해질 것이다.
부교주가 나를 노리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나는 교주도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천재지변에 가까운 일을 누가 일으킨 것인지는 몰라도 교주와 부교주는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이고 그들의 목적은 과거와 같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사는 세상이 다시 멸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어쩌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용사들이 나타나 무찔러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너무 머리에 꽃밭을 키우는 생각 아닌가? 결국 믿을 것은 나 자신뿐이다. 세상의 멸망을 막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미친개를 오랜만에 보겠네.”
복수다. 김포에서 태백산 줄기에 이르기까지 나는 많은 지역을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많은 변이체를 만났고 그보다 수천배의 생존자를 만났었다. 그러나 변이체를 만난 이야기의 결말은 모두 나와 함께 했던 생존자들이 사망하는 배드엔딩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녀석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떠돌이 변이체들도 남아있는 것을 보면 한 지역의 주인이었던 놈들이 쉽게 사라졌을 것 같진 않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태백시에는 전생의 내가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변이체가 있다. 일명 미친개다.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생존자들은 녀석의 한 끼 식사가 되었다.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라고 해도 절대적인 거리로는 그다지 가까운 곳이 아니다. 육체가 전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는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서둘러야 했다.
길도 사라졌고 가는 방향이 맞는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보통 나침반과 함께 마탑에서 구입했던 물건 중 악마 추적 장치라는 것을 꺼내 놓았다.
악마 추적 장치도 생긴 것은 나침반과 비슷하다. 악마 특유의 마나 파장을 감지해내는 장치라고 하는데 믿음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작동하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꺼내들었다. 지금은 바늘이 불규칙하게 빙빙 돌기만 할 뿐 특정 방향을 가리키고 있지 않았다.
나침반으로 동서남북을 가늠해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일단은 산에서 내려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전생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험지를 가볍게 뛰어다니다 보니 몇시간이 지나 마침내 산기슭 부근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오래된 건물의 무너진 잔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것을 보면 기상연구소는 굉장히 단단하게 잘 지어진 건물이다.
대격변 이전에 누구나 살기를 바랐던 아파트는 대격변 이후에는 가장 기피해야 할 장소 중 하나였다. 일단 아래층에 변이체가 들어오면 도망칠 방법이 없었고 고질적인 부실 공사 때문인지 대형 변이체가 힘을 좀 쓰면 무너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거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무너지는 경우도 많았다.
비록 무너진 건물들이지만 현대 문명의 흔적들을 보자 감회가 새로웠다. 문명의 흔적 중 가장 확실한 것은 썩지 않는 물건들이었다.
바로 플라스틱 쓰레기다. 어쩌면 변이체가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갔을지도 모르는 환경 파괴의 주범은 인류가 멸망한 지 벌써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자신들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 콜라”
굴러다니는 콜라 페트병이 내 눈길을 끌었다. 먹어본 지 참 오래된 음료수다. 심지어 이번 생에는 구경도 해보지 못한 것인데도 머리는 그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챠르르르르!
짜부라지고 지저분해진 오래된 콜라병을 보고 옛 기억에 빠져 있을 때 손에 들고 있던 악마 추적 장치의 바늘이 한 방향을 가리키며 바르르 떨기 시작했다. 사실 그다지 기대하진 않았는데 작동하긴 하는 모양이다.
6성에 오르며 훨씬 넓어진 초감각에도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추적 장치에는 잡힌 걸 보면 예상외로 꽤 성능이 좋은 것 같다. 다만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는 없다. 생각보다 가까울 수도 혹은 멀리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대된다. 오랜만에 만나는 미친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죽여야 할까. 내가 아는 미친개라면 굳이 내가 애써 찾아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미친개의 능력은 엄청난 후각과 속도다. 방향을 잡고 접근하면 알아서 나를 찾아올 것이다. 놈에게 나는 너무 오랜만에 나타난 먹이니까. 절대 참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나는 통로를 열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자신감이 생겼다고 해도 만전의 상태에서 녀석을 상대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선 잠을 좀 자고 일어나 오랜만에 스승님에게 일대일 수업을 받았다. 6성 기사가 된 이후 스승님에게 제대로 된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
“넌 강하다.”
간단한 대련을 마치고 난 후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다.
“지금도 같은 6성 기사라면 널 이길 수 있는 자는 대륙에도 손에 꼽을 것이야. 일이 년 정도 경험만 더해진다면 적수가 없겠지.”
“스승님 덕분입니다.”
“그런데 비정상적으로 강하다. 이유는 아마 너만이 알고 있겠지.”
스승님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많이 있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스승님은 그것을 파헤치려고 하지 않았다.
“비정상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어찌 됐든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야. 어긋난 것은 언젠가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항상 유념하고 조심하도록 해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내가 가진 힘은 정상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지구의 마나와 변이체들의 능력을 흡수해 얻은 능력들이다.
지구의 마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변이체에게서 무언가를 흡수한다는 것에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후에는 오러의 운용에 관해 배웠다.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오러의 활용법이 많이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잠시 쪽잠을 잤다. 그래봐야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몸을 풀고 만전의 몸 상태를 만든 후 통로를 열었다.
통로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미친개가 마중을 나와 있는 모습도 조금은 기대했었다.
파르르!
지구로 넘어가자마자 악마 추적 장치가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어제와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 미친개가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다.
나는 추적 장치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뻘겋게 녹이 슨 철로를 따라 걷다 보니 추적 장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이 틀어지고 있었다.
녀석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녀석은 왜 무엇 때문에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걸까? 내가 알고 있는 변이체가 빠르게 움직이는 경우는 단 하나다.
먹이를 추적할 때다. 놈들은 철저하게 사람을 죽이고 먹는 것에 특화된 존재다. 다른 부분에선 오히려 멍청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말 사람이 있는 걸까? 부교주는 통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부교주가 미친개에게 쫓기는 그림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부교주가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있는 걸까? 부교주가 통로를 사용하는 것을 이미 봤기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거라는 가능성이 생겼다.
나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일단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아직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크오오오!
저 멀리서 늑대의 하울링 같은 긴 울음소리가 들린다. 기억이 난다. 미친개는 지가 늑대라도 되는 것처럼 가끔 저런 소리를 내고는 했다.
정작 미친개는 애완용 소형견이 변이체가 된 경우다. 물론 크기와 외모는 전혀 귀엽지 않지만 소형견일 때의 특징이 남아있었다.
가능한 속도를 내서 꽤 달렸는데 미친개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몇킬로 미터 정도는 달려왔을 것이다. 소리는 분명 먼 거리 같지는 않았다.
달리는 도중 흙으로 된 바닥에서 흔적을 발견했다. 방금 생긴 것이 분명한 움푹 파인 발자국,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곰 발자국이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미친개의 발자국이 분명하다.
그런데 발자국의 방향이 내가 뛰고 있는 방향과 같다. 이러니 미친개가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만약의 경우 바로 전투에 들어가도 문제가 없도록 전속력을 내고 있지 않기도 하지만 미친개의 속도를 생각하면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미친개의 발자국 외에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쫓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아니 애초에 미친개의 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가진 사람이 있을 수가 있냐가 먼저일 것이다.
내 기억 속의 미친개가 그때의 힘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스승님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은 계속 따라갈 수밖에 없다. 발자국이 난 방향으로 난 계속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지나자 드문드문 바닥에 검은 피가 보인다.
이것은 미친개가 흘린 피다.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은 미친개가 사람을 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쫓기고 있는 거다.
걸음을 멈췄다. 변이체가 무언가에게 겁을 먹고 쫓긴다? 그런 것은 본 적이 없다. 떠돌이를 상대했을 때처럼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단지 살기 위해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변이체다.
이 추적을 계속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생각을 해봐야 한다. 미친개가 겁을 먹고 도망가게 만든 존재를 내가 만난다면 상대할 수 있을까?
여전히 바닥에는 미친개 이외의 발자국은 없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땅을 딛지 않는 존재일 가능성이 있다. 비행형 변이체와 세력다툼이라도 일어난 걸까?
그렇다면 내가 중간에 끼어들었을 때 협공받을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통로가 있으니 도망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다.
‘포기한다.’
어디까지나 나는 안전 우선주의인 사람이다. 미친개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목숨을 걸고 꼭 이뤄야 한다는 정도는 아니다.
통로를 열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악마 추적 장치가 다시 진동하듯이 울렸다.
파르르륵!
아까보다 훨씬 강렬한 떨림이다. 가까이 있다는 뜻일까? 방향을 보려고 추적 장치를 들기가 무섭게 초감각의 끝자락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엄청난 속도 그리고 크기. 분명히 미친개다. 감지 되기가 무섭게 미친개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친개를 몰아붙이고 있던 그 존재는 어떻게 됐을까?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미친개가 먼저다.
추적 장치를 집어넣고 슈바르거트를 꺼내 들었다. 미친개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곰처럼 거대한 덩치지만 호랑이처럼 민첩하고 치타처럼 빠르고 날렵한 몸은 그야말로 인간을 죽이기 위해 다시 태어난 살인 병기와 같았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안에는 칼날처럼 예리하고 긴 이빨들이 빼곡히 박혀있고 두 눈은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뒤를 쫓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영체화와 비슷한 능력을 쓰는 존재도 잠시 의심해보았다.
불과 몇초에 불과한 시간이지만 달려드는 미친개를 관찰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확실히 녀석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머리 쪽에 길게 찢어진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었고 온몸에도 상처의 흔적이 가득했다.
무엇이 미친개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일 수 있었을까? 상처의 흔적만을 보면 검 같은 무기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크오오오!
누군가에게 맞은 화풀이를 나에게 하겠다는 것처럼 미친개가 포효를 지르며 뛰어올랐다.
섬광과 같은 속도다. 흔히 빠른 검을 쓰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긴 하는데 지금 달려드는 미친개의 속도는 숙련된 검사가 휘두르는 검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정도였다.
전생 같았다면 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강해졌다. 그것을 확인해주듯이 위험 감지가 미친개를 그리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오러를 잔뜩 먹은 탐욕스러운 슈바르거트가 탐욕의 힘을 빛으로 바꾸며 아름다운 빛의 호선이 미친개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