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복수의 맛
스각!
미친개와 위치가 바뀌며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캐애앵!
한 번의 격돌이었는데도 미친개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변이체의 가죽조차 베어내지 못해서 쩔쩔매던 시절의 내가 아니다.
앞다리를 꽤 깊게 베어냈다. 완전히 잘라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땅에 착지한 녀석이 다리를 저는 것이 보였다. 녀석의 가장 큰 무기인 기동성을 약하게 만들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물론 변이체 놈들이 이 정도로 달리지 못한다거나 하진 않는다. 한쪽 다리가 끊어져도 고통 따위는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달릴 수 있는 녀석들이다.
미친개는 생각보다 별거 아니다. 녀석이 정상인 상태가 아닐뿐더러 정상이었다고 해도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친개를 이런 상태로 몰아넣은 상대가 누구냐는 것이다. 감각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진짜 영체화를 사용하는 상대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장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앞의 미친개도 조금만 방심한다면 내 목줄을 뜯어내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녀석인데 보이지 않는 미지의 상대를 경계하면서 싸우려니 두 명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냥 싸우지 말고 돌아갈까?’
원래도 그냥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미친개가 방향을 틀어 돌아오면서 생긴 일이다.
크헝!
생각이 깊어지기 전에 미친개가 먼저 움직였다. 역시 변이체다운 행동이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지 녀석은 눈앞에 있는 나를 죽일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그렇다면 나도 전력으로 상대해주는 게 예의겠으나 나는 미친개만을 죽이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 아니다.
생존자들을 학살하던 비상식적인 도약력과 속도는 지금의 나에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몇번의 격돌이 이어지고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미친개였다.
왼쪽 앞발이 반쯤 잘려서 덜렁거리고 목덜미에도 깊은 상처가 나서 검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저 정도 상처로 죽지야 않겠지만,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속도가 강점인 녀석이 느려진다면 이미 승부는 기울었다는 얘기다.
미친개가 약해질수록 내 신경은 점점 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미친개를 몰아붙인 상대를 찾는 것이 집중되고 있었다.
크헝헝!
미친개는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이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귀처럼 달려들고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더 힘을 빼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미지의 존재를 상대할 수 있는 힘은 비축해 둬야 했다.
그런데도 미친개의 상처는 늘어만 가고 있었다. 앞다리 둘이 다 못쓰게 되자 녀석은 사람처럼 두 발로 일어서서 달려들었다.
앞발이 지켜주지 못하는 상반신은 허점투성이였다. 치명적인 부위에 깊숙이 검이 박혔다가 빠져나왔다. 그래도 녀석은 달려들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변이체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과 집념에 당황한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너무 약하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태백시에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동료들은 수십 년 동안 대격변 시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인 만큼 노련하고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동료들을 고양이가 병아리 떼를 사냥하듯이 가지고 놀듯 죽이던 미친개가 과연 이 녀석이 맞나 의심이 될 정도였다.
조금 미쳐있었지만, 좋은 사람이었던 정이형. 상황판단이 좋은 리더였던 배도형. 언제나 걱정이 많았던 울보 김희철. 늙은 막내여서 항상 불평이 많았던 김자루. 모두 미친개에게 당했다. 그 참혹했던 광경이 하나하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미친개에게 물리고 찢겨가면서 입으로 혹은 눈빛으로 나에게 했던 말은 모두 같았다.
‘가’
가서 살아남으라고, 지옥 같은 세상이지만 하루라도 더 살아남으라고 지금도 눈앞에서 침을 줄줄 흘리고 있는 저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자라있는 아가리에 몸을 던지며 나에게 말했었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신경 쓰느라 복수를 잠시 잊었었다.
먼저 아직 녀석을 지탱하고 있는 뒷다리를 끊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개새끼 주제에 두발로 뛰어다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뒷발까지 잘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녀석이 아직 남아있는 다리를 이용해 피로 바닥에 검은 선을 그리며 빠르게 기어 왔지만 네 다리가 멀쩡했을 때도 어쩌지 못한 나에게 그런 식으로 달려드는 것이 통할 리가 없었다.
두 눈을 찌르고 한껏 벌린 입에 검을 쑤셔 넣어 혀를 잘라냈다. 검을 도끼처럼 내리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녀석의 목을 잘랐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아서 옆구리로 검을 찔러넣어 심장을 터트리자 그제야 생명 반응이 사라졌다.
절대로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괴물이었던 미친개가 너무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상대할 자신은 있었지만, 전의 떠돌이 변이체를 상대했을 때처럼 피가 튀는 접전을 예상했었다.
허무한 복수였다. 복수 자체가 허무하다기보다는 상대가 너무 쉬워서 허무했다. 그래도 가슴속의 무언가가 막혀있던 것이 사라진 기분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복수 후에 입맛이 쓰다고 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복수의 맛은 언제나 달콤했다.
아무래도 미친개가 처음부터 큰 상처를 입고 지쳐있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감각에도 걸리는 것이 없다. 미친개를 상대하고 나면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미지의 존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근처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이 멸망한 세계에서 어떤 존재가 미친개에게 그런 상처를 입히고 변이체가 도망을 치게 했을까.
유력한 용의자로 부교주가 생각되지만 부교주라면 아마 모습을 숨기진 않았을 것이다.
주위를 경계하며 흉한 모습으로 널브러진 미친개의 시체에 손을 가져갔다. 상황이 이래도 챙길 것은 챙겨야지.
미친개의 뛰어난 능력은 후각과 속도다. 어떤 것이 진짜 능력인지는 알지 못한다. 후각은 원래 개였기 때문에 뛰어났던 것일 수도 있다.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면 속도다. 갑자기 후각이 발달하면 맡고 싶지 않은 냄새를 맡아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내가 딱히 냄새로 무언가를 추적할 일도 없기도 하다. 있으면 어떻게든 활용하겠지만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면 속도 쪽이 더 활용범위가 넓다.
시체에 손이 닿는 순간 어김없이 각성이 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새로 생긴 능력은 예상외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생각하던 것은 아니었다.
정작 미친개에게 얻은 능력은 후각도 속도도 아닌, 그냥 신체 강화였다. 다만 반마라고 부르는 반품이 변이체에게 얻었던 것이 아닌 제대로 된 신체 강화다.
각성하자마자 온몸의 근육이 단단해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신체 강화의 좋은 점이라면 이것 역시 초감각처럼 사용에 대가가 거의 없는 능력이라는 것이었다.
생존자 중에서도 신체 강화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았다. 내가 가졌던 위험감지도 좋은 능력이었지만 신체 강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막상 가지게 되었지만 대단한 감흥은 없었다. 6성 기사의 신체 능력은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신체능력과 오러의 힘이 합쳐졌을 때 일어나는 시너지 효과는 조금 기대됐다.
주위를 경계하며 통로를 열고 지구로 돌아왔다. 미친개의 시체는 다리 한 짝만 들고 와서 공벌레들의 먹이로 던져주었다. 이 녀석들을 키워서 뭐에 쓸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왕 키우는 애들인데 굶길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마지막까지 미지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해서 찝찝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모든 일이 내 마음처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
더러워진 몸을 씻고 잠을 청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움직여서 그런지 금방 잠이 들고 말았다. 꿈에 태백시 쉘터에서 함께했던 동료들이 나타나 인사를 하고는 멀리 떠나갔다.
잠에서 깨어보니 얼굴에 눈물이 흐른 자국이 남아있었다. 어느 순간부턴가 눈물샘이 고장 난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제대로 작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스테이시가 일찍 찾아왔다. 사실 어제 바로 찾아오지 않을까 했었는데 바쁜 일이 있었는지 스테이시는 어제 나타나지 않았었다.
[판매에 관한 이야기가 끝났어요.]
“그래? 고생했어. 고마워.”
[워낙 고가의 물품이고 원하는 사람이 많아서 상의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가격은 잘 쳐주는 거지?”
[물론이죠. 제가 최고로 받아낼 방법을 찾아서 합의를 봤어요.]
스테이시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랑스러운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신나서 이야기했다. 문득 색욕의 시험에서 봤던 스테이시가 생각났다. 음... 확실히 시험에서 봤던 스테이시 쪽이 더 위풍당당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거죠?]
“아, 아니야. 잘했다고.”
[어쨌든 직접 마탑으로 오셔야 할 것 같아요.]
“그건 어렵지 않지.”
스승님에게 말씀을 드린 후 스테이시와 함께 마탑을 방문했다.
“어서 오게”
마탑에 도착하자마자 마탑주가 입구까지 직접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안녕하셨습니까. 마탑주님”
“나야 뭐 늘 안녕하지. 하핫!”
마탑주는 보통 마법사와는 결이 좀 달랐다. 원래 마법사라는 생물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피곤함에 절어 있는 대학원생 같은 모습이 기본인데 마탑주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다. 마탑주쯤 되면 교수라고 봐야 하는 걸까?
“바쁘실 텐데 직접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그건 신경 쓸 것 없네. 귀한 물건을 가지고 오는데 이정도야 별거 아니지.”
사실 별로 바빠 보이지도 않는다.
“거래는 어떤 식으로 하면 될까요?”
“경매형식으로 할까 하네. 구입을 원하는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말이야.”
그냥 물건을 건네주고 돈만 받아 갈 생각이었다. 애초에 그런 귀찮은 방식을 택할 거라면 상단에 넘겨주지 왜 직거래를 하겠나. 하긴 스테이시가 방법을 찾았다고 했지, 금액을 맞춰놨다고 하진 않았었다.
“걱정 말게 지원자는 최대한으로 추려놨으니까. 경매는 금방 끝날 거야.”
그런 내 속마음을 들켰는지 마탑주가 말을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트집을 잡긴 어렵다. 허술해 보여도 왕국 최고 실력자 중에 하나다. 스승님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실력자다.
“그런데 자네 그사이에 또 성장했군?”
“운이 좋았습니다.”
“운도 준비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지.”
마탑주 역시 내 성장을 눈치챘다. 혹시 몰라 백룡이도 잠시 슬쩍 빼두었다. 마탑주쯤 되는 인물이라면 백룡이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전에 백룡이가 사람 말을 알아듣고 움직이는 모습만 보여줘도 마법사라면 환장을 할 것이다.
마탑주를 따라간 곳은 제법 넓은 회의실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에 나이가 많아 보이는 마법사들 스무명 정도가 이미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자! 여기가 귀한 물건을 가져오신 빅터 하네스 공자라네. 모두 박수!”
마치 레크리에이션 강사 같은 마탑주의 능숙한 소개에 나는 꾸벅 인사를 했고 마법사들의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럼 다들 바쁜 사람들이니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경매를 진행하도록 하지. 물건을 하나씩 꺼내주겠나?”
나는 가장 먼저 생각초를 꺼내 미리 준비되어있던 받침대에 내려놓았다. 원래 가장 중요한 것일수록 나중에 꺼내는 법이다.
“첫 번째는 생각초입니다.”
생각초를 꺼내놓자 마탑주가 이리저리 보며 감정을 하는 듯 하더니 물건을 소개했다.
“약 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추정되는 생각초! 시작은 금화 천개부터 시작하겠네!”
“금화 천개!”
“금화 천이백개!
여기저기서 손이 들리며 액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눈에 봐도 몇 명을 제외하곤 손을 들지 않고 있었다. 힘을 모으는 느낌이랄까.
생각초 정도는 마탑에서도 그럭저럭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상급 마수의 시체다.
“금화 이천이백개! 더 없나? 그럼 낙찰!”
그래도 금화 2200개라는 거금에 생각초가 낙찰되고 낙찰받은 마법사가 그 자리에서 금화를 내놓고 생각초를 가져갔다. 이제 본 게임이다.
“이번에는 준성체 자무새의 시체입니다. 많이 훼손된 상태이고 깃털도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꺼내도 되겠습니까?”
“걱정 말게 여기가 어딘가?”
내가 먼저 장갑을 끼고 자무새의 시체를 꺼내자마자 허공에 둥둥 떠서 모여있는 마법사들이 보라는 듯이 한 바퀴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마탑주가 힘을 쓴 모양이다.
“다들 상태는 확인했겠지? 그럼 시작가는 금화 만 개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큰 금액이다. 그냥 전국을 떠돌며 마수 사냥이나 할까?
“금화 삼만개!”
경매를 시작하자마자 마탑주가 먼저 큰 금액을 질러버렸다. 주최자가 이래도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