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94화 (94/206)

94. 사라진 시체

“주변 사람이 죽는다고요? 살인자였던 건가요?”

“아니에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이 주변 사람들은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죽었어요.”

“그럼 꼭 남편분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단지 운이 나빴던 것일 수도 있잖아요.”

잉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마법사인데 그런 미신을 믿을 리가 없잖아요. 시체를 직접 조사해본 적도 있어요. 그이와 관련되어 사망한 사람들은 마치 생명력이 고갈된 것처럼 보이더군요. 물론 이건 제 감상이니 무슨 증거가 있던 것은 아니에요. 나중에 그이가 떠나기 전에 직접 말하더군요. 모두 자기가 죽인 거라고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 정도면 치안대에서 수사도 했겠는데요?”

“물론이죠. 남편은 유력한 용의자였죠. 하지만 치안관들도 아무 증거도 찾지 못했지요.”

“방법도 말하던가요?”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고 하더군요.”

슬슬 감춰져 있던 그림이 보이는 기분이다.

“남편분과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모두 죽은 건가요?”

“아뇨. 당연히 그렇진 않았지요. 그랬다면 제일 먼저 죽는 것은 제가 아니었을까요?”

“남편분이 떠나신 후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지 않았나요?”

“그걸 어떻게 알았죠?”

잉헬리아의 남편 그러니까 바보 마법사의 아버지는 마신교 사람이다. 그리고 많은 생명을 필요로 했던 모양이다. 조각난 퍼즐을 모으니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혹시 주변 사람들이 남편분을 따로 부르던 호칭이 있었나요?”

“딱히 그런 것은 없었지만, 언젠가 지나가듯이 사제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어요. 워낙 불경한 말이라서 모른 척 했지만요.”

아직 내가 만나보지 못한 녀석이다. 하지만 꼭 만나보고 싶은 인간이다. 반마 혹은 반쪽짜리 변이체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마신교의 사제다.

“죄송하지만 아까 전해드린 유품을 제가 다시 확인할 수 있을까요?”

잉헬리아는 품에서 내가 전해줬던 유품을 꺼내 내게 돌려주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반지의 기억을 읽었다. 행복해 보이는 두 남녀가 보였다. 지금과 조금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잉헬리아 마법사와 젊은 남자였다. 사제는 희미한 인상을 가진 정말 평범하고 착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혹시 부교주가 아닐까도 생각했었지만, 유품의 기억 속에서 보이는 남자는 부교주는 아니었다. 어쨌든 사제의 얼굴을 확인했다.

왕실에서도 사제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까? 정황상 알고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교주와 부교주 때문에 사살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교주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지금이라면 어떨까? 부교주가 강하다고 해도 혼자는 그리 두렵지 않다. 왕국 차원에서 소탕작전이 들어간다면 가장 먼저 죽여야할 것은 부교주가 아니라 사제다.

화장실에서 나와 유품을 돌려주고 그만 일어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곳에 더 볼 일은 없다. 쟁반 가득 있었던 쿠키도 스테이시가 이미 다 먹어 치운 후였다. 여자들은 후식을 넣는 배가 따로 있다더니 저 작은 몸뚱아리에 어떻게 그 많은 쿠키가 들어갔는지 의문이었다. 설마 배속에 아공간을 만든다던가 한 것은 아니겠지?

“보답한다고 해놓고 정신을 놓고 있었네요.”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보답이 아니라 보복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빅터 공자도 마법을 익혔지요?”

“네, 독학으로 배운 것이라 대단한 수준은 아닙니다만.”

“그 나이에 그 정도면 훌륭한 수준이에요. 다만 공부가 깊지 않은 것은 아쉬워 보여요.”

그것은 나도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스테이시에게 이따금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따로 마법 스승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이걸 선물로 줄게요. 내가 직접 쓴 책이에요.”

잉헬리아가 두꺼운 책 몇 권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뭔가요?”

“나는 불 마법과 기초 마법의 개량을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친 사람이에요. 그걸 정리해놓은 책이에요.”

“이런 귀중한 것을 제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세상에 널리 알리려고 연구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건 기초적인 부분만 정리해놓은 것이에요. 혹시 그것들을 다 익히거든 찾아오도록 해요. 심화과정을 주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큰 수확을 얻었다.

“나도 유명한 사람이 내가 진전을 익혔다고 하면 도움이 되는걸요.”

“절 알고 계셨습니까?”

“마탑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걸요?”

옆을 보니 스테이시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여러 사건이 있었다. 마탑 한정으로는 이제 꽤 유명한 사람이 된건가?

“그래도 감사합니다. 저에게 부족한 부분이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요.”

잉헬리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마탑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왔냐?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네.”

암테일 영지에 두고 왔던 슬라이트를 비롯한 철권단이 모두 돌아온 것이었다.

“공주님이 그곳에서 그리 오래 머무실 수는 없으니까.”

대답하는 슬라이트는 뭔가 내게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혼자 두고 왔다고 삐진거냐?”

“삐지지 않았다.”

“그럼 뭐냐?”

슬라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는 사실 뻔한 것이다. 내가 먼저 승급했으니 그런 것이다.

“오랜만에 한 번 붙어볼까?”

“치사한 놈.”

이제는 슬라이트가 내 상대가 될 수 없다.

“자칼이랑 둘이 덤벼라.”

“감당할 수 있겠냐? 아직 익숙하지 않을 텐데?”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고.”

구석에서 다른 철권단과 함께 모두의 왕국을 즐기고 있던 자칼을 끌고 오고 스테이시까지 더해져 삼 대 일의 대련이 갑자기 성사되었다.

원래 자칼까지만 더하려고 했지만, 스승님이 스테이시까지 참가시켰다.

잔뜩 긴장한 모습의 슬라이트와 자칼이 전방에 서고 그 뒤에 스테이시가 자리를 잡았다. 정석적인 배치다.

“그럼 시작해라.”

스승님의 신호와 함께 자칼과 슬라이트가 가운데를 비워놓고 양쪽으로 갈라졌다.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마법사가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테이시는 보통 마법사가 아니다. 공격을 포기하고 견제 마법을 사용하며 마음먹고 회피만 한다면 5성 기사인 누구도 스테이시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그런 스테이시를 믿고 쓰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난 이제 일반적인 5성 기사가 아니다.

파아앙!

발이 연무장 바닥의 돌을 박차고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몸이 앞으로 화살보다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오러에 신체 강화가 더해진 속도는 왕년의 미친개에 비교할만한 정도였다. 거리를 압축하듯 다가오는 상상 이상의 속도에 스테이시가 당황하며 마법을 사용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내가 더 빨랐다.

파샥!

거리를 허용한 마법사는 동급의 기사에게도 매우 약한 존재다. 이제 두단계가 차이 나는 나에게는 더욱 그렇다. 스테이시가 미리 시전해놓은 보호막이 일검에 박살 나며 검이 스테이시의 목 앞에서 멈췄다.

“스테이시 탈락”

멀리서 스승님이 이 상황을 예상하셨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스테이시를 이탈시킨 후 뒤를 돌자마자 자칼과 슬라이트가 양쪽에서 덤벼들고 있었다. 자무새를 상대하기 위해 연습했던 성과가 이곳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양쪽에서 동시에 치고 들어온다. 시차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협공의 위력이 대폭 반감된다.

이놈들이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작당을 했는지 살기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자칼까지 그 정도이니 슬라이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 나는 우리 셋을 상대했던 스승님의 기분을 조금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발악해도 별 의미 없다.

그게 지금 둘을 바라보는 내 생각이었다. 둘이 다가오는 속도가 한없이 느리게 느껴진다. 이제 겨우 6성에 오른 내가 그렇게 느끼는데 스승님은 오죽하셨겠나.

스승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서 상대를 해주었기에 저런 작전을 썼던 것이지만 나는 스승님이 아니다. 세상의 쓴맛을 좀 알려줘야만 할 것 같다.

먼저 슬라이트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일부러 뻔히 보이는 검로로 검을 휘둘렀다. 방어를 강요하는 것이다.

피하지 못할 것이라면 방어를 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피하기에는 어려운 속도와 각도를 만들었다. 선택을 강요받은 슬라이트가 이를 악물며 마주 검을 휘둘렀다.

같은 5성 기사일때도 오러의 위력은 내가 훨씬 위였다. 지금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에도 그때보다 위력이 훨씬 상승했다.

콰앙!

슬라이트가 검을 놓치며 뒤로 날아갔다. 힘 조절을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힘이 과하다. 슬라이트가 검을 놓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이것은 오러보다도 물리적인 힘이 만들어낸 결과다.

신체 강화가 내는 힘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일단 슬라이트는 전열에서 이탈했으니 내버려 두고 자칼 쪽을 돌아보자 이미 지척까지 다가와서 등에 검을 찌르고 있었다. 이 자식들 진짜 나를 스승님 상대하듯이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자칼의 검은 너무 정직하다. 방어와 동시에 반격을 할 때는 그렇지 않지만 이렇게 단독으로 공격할 때는 너무 직선적이다. 함께 오래 수련하다 보니 서로의 약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칼의 검을 가볍게 쳐내고 남은 손으로 멱살을 잡아 던져버렸다. 5~6미터는 날아간 자칼이 가까스로 몸을 돌려 고양이처럼 바닥에 착지했다.

“그만!”

더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스승님이 대련을 중지시켰다. 공교롭게도 다친 사람은 슬라이트 뿐이었다.

바닥에 뻗어있는 슬라이트에게 다가가 찢어진 손에 포션을 뿌려줬다.

“괜찮냐?”

“괴물 같은 놈. 갑자기 그 힘은 뭐냐?”

슬라이트가 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름 걱정해서 치료까지 해주는 사람에게 괴물이라니 매우 배은망덕한 주둥이다. 그래서 주둥이에 포션 병을 거꾸로 박아넣어 주었다.

“내가 볼 때는 너도 괴물이야.”

나는 죽을 둥 살 둥 해서 간신히 올린 경지를 별것도 아닌 깨달음으로 마구 올리는 놈들이 더 괴물이다.

6성에는 어쩌다 보니 내가 먼저 올랐지만 아마 7성은 깨달음이 필요한 영역이다. 아마 나보다는 저런 천재들이 훨씬 쉽게 오르게 될 것이다.

“새로 얻은 힘을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라. 그렇지 않아도 새옷을 얻었는데 보통 사람보다 훨씬 큰 옷을 얻은 셈이니 적응하는데 더 오래 걸릴 것이야.”

대련을 지켜본 스승님이 조언하셨다. 맞는 말씀이다. 아직 갑자기 얻은 신체 강화도 그렇고 오러를 다루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 오른 경지만큼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스승님에게는 마탑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엄청난 액수를 벌었지만 공작가에서 경험 때문인지 스승님은 매우 놀라지 않으셨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만약 상급 마수가 날뛰었다면 돈보다 큰 것을 잃었을 것이야.”

“그럼 이 돈은 어떻게 할까요?”

“내가 얻은 것은 영지에 다시 투자하도록 하자. 나머지는 네가 스스로 얻은 것이니 네가 맘대로 쓰도록 해라.”

“그럼 저도 영지에 투자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아무 특색도 없는 영지지만 거액이 투자된다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당장 내가 내놓은 무구들을 개조하는 것만 해도 큰돈이 들어갈 것이고 그것을 사용할 병사와 기사를 뽑아 훈련시키는 것은 더욱 큰돈이 들어갈 것이다.

스승님과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철권단의 두 사람이었다.

크리스 힝켈과 오스마르 바르트 철권단 중에서는 가장 오러에 재능이 있는 이들이었고 유이하게 3성에 오른 단원들이었다.

“저희는 암테일 영지에 부임하려고 합니다.”

“왜 갑자기? 더 좋은 선택지도 많지 않아? 전에 마그나하고도 좋게 얘기가 오가지 않았어?”

두 사람의 암테일 영지의 기사가 되려고 하고 있었다. 중앙 귀족가 출신의 사람이 지방 영지의 기사가 되는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다.

왕도에서 택시 기사를 할지언정 지방으로는 가지 않는다. 그것이 보통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마그나가 있을 때 두 사람에게 꽤 작업을 많이 했었다. 실력을 떠나 믿을 수 있는 가신은 쉽게 얻기 힘든 존재다.

“그곳에는 저희보다 실력 좋은 사람이 많으니까요.”

“실력으로만 중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잖아? 마그라나면 잘 해줄 텐데.”

“저희는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암테일 영지라면 앞으로 장래도 밝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가서 잠시 지내보니 좋은 곳이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영지에 기사가 필요한데 젊은 3성 기사 둘이 충원된다면 아버지의 숨통이 좀 트일 것이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스승님하고 아버지에게 말을 해둘게. 며칠 말미를 줄테니 다시 잘 생각해봐.”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감사를 표하고 돌아갔다. 조만간 철권단에 새로운 졸업자가 생길 모양이다.

밤이 되어 나는 조금 일찍 통로를 열었다. 어쩌다 보니 미친개를 먼저 처리했지만, 아직 태백시에 도착하려면 밤새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통로를 여는 순간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금방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원인을 찾았다.

‘없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야 했을 미친개의 시체가 없었다. 나는 어제 다리 한 짝만을 들고 돌아왔을 뿐 나머지 시체는 그대로 두고 왔었다. 그런데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 피가 흘렀던 자국뿐 미친개의 시체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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