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광검제의 초대
설마 완전히 죽이지 못했던 건가?
그래서 재생력으로 다시 살아난 녀석이 도망친 것일까?
하지만 몇번을 생각해봐도 생명 반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했었다. 그리고 만약 살아있었다면 신체 강화 능력이 나에게 전승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통로를 통해 반대편을 열심히 살폈지만, 핏자국 외에 딱히 다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제대로 확인하려면 지구로 넘어가야 한다. 아직 주위에 시체를 치운 대상이 있고 나를 노리고 있다면 기습당할 우려가 있다.
하지만 정말 나를 노리고 있었다면 미친개와 싸울 때 습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심하진 않았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지구로 넘어가 초감각으로 주위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걸리는 것은 없었다. 지난번에도 나를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그때도 감지하지는 못했으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통로로 보이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물건이 하나 멀찌감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해보니 종이쪽지다. 바람에 날아가지 말라고 돌멩이로 고여놓기까지 했다. 종이는 지구의 물건이 아니다. 약간 거친 재질의 백색이 아닌 약간 누런 색의 종이다. 아노더스에서 흔히 쓰는 종이와 같다. 만약 지구의 종이라면 더 하얗고 매끄러워야 한다. 지구에 그런 멀쩡한 상태의 종이가 아직 남아있을 리 없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쓰여있는 글씨는 한국어라는 점이었다.
-읽어라
뭘 읽으라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이 쪽지를 남긴 사람은 내가 사이코 메트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한국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누구일까. 부교주? 아니다. 부교주도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내게 사이코 메트리가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설령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친절한 쪽지를 남겨두었을 리가 없다.
읽으라고 하니 무언가 메시지를 남겨두었을 것이다. 이런 전달 방식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고 사물에 의도적으로 기억을 남길 수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일단 미지의 존재가 시키는 대로 쪽지를 주워 들고 기억을 읽기 시작했다.
시야가 바뀌며 한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검은 머리를 가진 젊은 남자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으나 벌써 몇번이고 물건의 기억 속에서 봤던 사람이다.
광검제, 지르크 폰 가이스트. 마왕의 침공을 두 번이나 막은 용사이며 명실상부 대륙 역사상 최고의 강자다.
“나를 찾아라. 기다리고 있다.”
광검제는 특유의 그 오만해 보이는 자세와 얼굴로 그 한마디만을 했다. 그리고 기억이 끝났다.
기억에서 깨어난 나는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광검제가 아직 살아있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직접 남긴 메시지를 보기까지 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럼 벌써 400살이 훌쩍 넘은 나이일 텐데 기억 속의 모습과 달라진 것도 없어 보였다. 초월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하더니 그럼 저렇게 오래 살 수도 있는 건가?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그럼 광검제가 이 지구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광검제도 나와 같이 통로를 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죽은 것처럼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광검제가 사실은 지구에 살고 있었다? 광검제가 사라진 것은 약 300년 전이고 그때 한국은 조선시대였다. 계산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광검제가 지구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면 내가 최후의 생존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검술을 알려줬던 생존자 김경수의 경우에도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광검제가 한국어를 쓴 것을 보면 광검제와 김경수는 확실히 어떤 연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지구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부교주라는 기분 나쁜 존재도 통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지구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 우호적인 절대강자가 이 세계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니 뭔가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빌어먹을 부교주 놈, 겁 없이 돌아다니다가 광검제나 만났으면 좋겠다. 광검제라면 단칼에 죽여주지 않을까?
직접 만난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사람과 연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어디로 찾아오라는 것일까? 그리고 광검제는 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새로운 만남은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를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원래 계획대로 나는 태백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혹시 떠돌이 변이체를 만날 수도 있으니 악마 추적기도 꺼내놨다.
반마라고 불리는 사제가 만드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공 변이체 놈들도 악마 추적기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했었는데 아직 실험을 해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가능성은 조금 낮게 보고 있었다. 내 생각보다 마신교의 역사는 오래되었고 만약 반마도 추적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마탑의 마법사들이 이미 추적기로 반마를 찾았을 지도 모른다.
변이체 특유의 마나 파장을 감지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인공 변이체는 파장이 조금 달라서 감지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구의 경험으로 보면 이런 정밀기기일수록 조금의 오차만 있어도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빠른 속도로 계속 걸었다. 내가 태백시로 향하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가장 가까운 도시라는 점이 있었고 인간의 흔적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모두 폐허가 된 곳이긴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물건 중에서는 저쪽 세상에서 충분히 비싼 가격에 거래될만한 것들이 있었다. 다른 것은 둘째치고 널려있는 금만 모아도 큰 돈이 될 것이다.
돈은 이제 엄청난 부자가 되었으니 절실하게 필요한 수준은 아니지만, 많아서 나쁠 것도 없는 것이 바로 돈이다. 그리고 기존에 돌턴골드 상단과 하던 거래도 있다. 이제는 그것보다 더 큰 돈벌이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말도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니.아예 암테일 영지로 보내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적어도 금속 자체의 평균적인 질은 아노더스보다 지구가 우월한 편이고 아노더스는 종류를 막론하고 금속 자체가 조금 모자란 느낌이 있었다.
일부러 큰 수고를 들일 필요까지는 없지만 어쨌든 챙길 수 있는 것은 챙기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노리는 것은 다른 물건이었다. 그것이 아직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볼 가치는 충분했다.
태백시의 생존자들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피난처는 전화국의 지하였다. 대격변 이후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깊은 지하실을 가지고 있는 현대식 건물은 많지 않았다.
거기에 은폐가 가능한 구조를 가진 건물은 더욱 적었는데 깊은 지하실을 보유하면서 은폐성과 도주의 용이함도 갖춘 시설이 바로 전화국이었다.
어쨌든 내가 머물렀던 전화국 지하에 보물이 아직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태백시에 모였던 생존자 중 항상 걱정이 많았던 김희철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나보다는 몇살 어렸던 동생인데 감정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은 친구였다. 그렇다고 나약했다는 것은 아니다. 나약한 인간이었다면 대격변 이후의 세상에서 몇십년을 살아남지 못했을 테니까.
김희철은 울보라는 점만 빼면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비슷했던 것이 바로 수집가 기질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다른 생존자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품이 아니면 바리바리 싸서 들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와 희철이는 달랐다. 다만 나는 순수하게 특이한 물건을 모으는 고물상 같은 취향이었다면 희철이는 희망을 모았다.
희철이는 언젠가 지옥 같은 대격변이 끝난 후를 대비한 물건을 모으는 것이 취미였다.
그중 내가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희철이가 모았던 씨앗들이었다. 언젠가 좋은 시절이 오면 밭을 갈고서 심을 것이라고 모은 씨앗이 한 보따리였다. 무엇을 얼마나 모았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품종개량이라는 위대한 과학의 결실을 맺은 지구의 씨앗이라면 저쪽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마지막 그날 정신없이 도망친 이후로 전화국 지하의 피난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미친개가 전화국 건물 자체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면 아직 그곳에 남아있을 것이다.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있는 파괴된 도로를 따라 걸었다. 인간이 이룩했던 거대한 문명이 사라지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격변 전에 다큐멘터리에서 인류가 사라진다면 가장 오래 남아있을 건축물로 몇 개를 소개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모두 외국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예상대로 아직 남아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바다를 건널 수단이 없는 지금 내가 그곳들을 찾아가 볼 기회는 아마 없을 것이다. 죽고 다시 태어나서도 해외여행 한번 가보지 못하는 신세라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꽤 오래 걸었지만, 태백시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방향을 잘못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늘은 여기까지다.
나에겐 이제 지구보다 아노더스의 삶이 더 중요하니까. 아노더스의 오늘을 준비하려면 슬슬 쉬어야 할 시간이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잠에 드는 시간이 빨라졌고 자는 시간도 조금 늘어났다. 중간에 깨는 일도 적어졌다.
여전히 다른 보통 사람들보다는 자주 깨고 훨씬 적게 자고 있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어제는 어쩌다 보니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아침부터 슬라이트를 불러서 할 말이 있었다.
“너 공작님에게 얘기 들은 것 없냐?”
“무슨 얘기?”
아직 슬라이트에게는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다.
“너하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한다는 얘기.”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는 왕실에서 있었던 얘기와 마탑에서 들은 정보를 요약해서 전달해 주었다. 물론 마신교에 이야기는 빼놓았다.
“제국의 던전이라고?”
슬라이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이 자식은 제멜아크 왕국 동쪽의 사막지대가 통째로 날아간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 너하고 내가 거기 끌려갈 수도 있다. 물론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할 지도 모르고 가는 것이 확정된 것도 아니야.”
“그럼 어떤 준비를 해야 하지?”
“그쪽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정보가 필요하다. 네 큰형님에게 부탁 좀 해봐. 어쩌면 공작님이 이미 준비해놨을 수도 있다.”
“알았다. 큰형님에게 연락해보지.”
슬라이트가 아침밥도 먹지 않고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아마 머릿속에는 던전을 탐험할 생각으로 가득할 것이다.
이미 한번 경험해본 유경험자로서 말하자면 절대 즐거운 곳이 아니다. 제멜아크의 움직임이 변수다. 자국의 영토에서 발견된 던전에 과연 우리가 들어가게 해줄까? 아마 우리는 들러리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바랐다.
그곳에 스트라이더 1000번이 있다고 한들 공략하다가 죽으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솔직히 지난번에 내가 던전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아직도 내가 어떻게 임시로 초월급의 힘을 쓰게 되었는지 시험에서 봤던 두 사람은 누구인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아침 식사를 한 후에는 평소처럼 스승님의 지도 아래 훈련을 했다. 다만 나는 실전 대련에서 제외되었다. 이미 나는 슬라이트나 자칼과의 대련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신 스승님이 대련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지금은 혼자 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하셔서 구석에서 혼자 내가 가진 힘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아침부터 사라졌던 슬라이트가 돌아왔다.
“큰일 났다.”
돌아온 슬라이트의 얼굴이 어두웠다.
“무슨 일인데?”
“우리가 파견되는 것은 맞나봐.”
“그렇다고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추가된 사람이 있어.”
예상한 일이었다. 당연히 우리만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슬라이트도 명성과 실력이 있다고 하지만 아직 작위도 받지 못한 도련님일 뿐이다.
“누군데?”
“이 왕자”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 왕자의 명성은 들은 바가 있다. 슬라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왕도의 망나니로 유명했다.
내 주위에 이상한 애들은 이미 많지만, 알고 보니 전부 소문보다 괜찮은 애들이었다. 거기에 이 왕자 하나 더 추가된다고 별일이 있겠나.
“망나니야 이미 하나 있는데 하나 더 추가된다고 별일이야 있겠어?”
“아니 그건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직접 경험해보면 다를걸? 그보다 나는 네가 이 왕자를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이놈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둘째 오라버니는 조금 문제가 있어요. 그건 제가 보증할 수 있지요.”
아이브 공주가 똘똘이와 빅토리아 아그네스 1세를 품에 안고 나타나서 끼어들었다.
가족의 보증이라면 이건 좀 얘기가 다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