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아귀
“둘째 오라버니는 겉과 속이 다른 분이에요. 조심하세요.”
단순한 망나니가 아니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훨씬 더 무섭게 느껴지긴 한다. 그래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명심하겠습니다.”
일단 대답은 하지만 직접 만나봐야 어떤 사람인지 알 것이다.
“아버지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어요.”
이번엔 아이브 공주가 전령 역할인가?
“어떤 말씀입니까?”
“그리 빠르게 일이 진행될 것 같지는 않다네요.”
그렇다면야 나는 좋다. 굳이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거기에 이 왕자라는 변수까지 등장했으니까.
슬라이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왕자가 동참하기로 했다는 것 말고 아직 슬라이트도 제대로 이야기를 하기 전이었으니까. 슬라이트가 들은 얘기도 비슷한 모양이다.
“제멜아크 왕국의 내부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이야.”
슬라이트가 이야기를 덧붙였다.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내부 사정이 복잡할수록 던전 공략을 앞당겨서 여론을 한곳으로 모을 필요가 있다.
“아마 제멜아크 왕국에서도 그곳에 왕자 급의 누군가를 보낼 생각인 모양인데 아직 그곳은 후계가 완전히 정해진 것이 아니거든.”
“그렇다면 그럴 수 있지.”
나는 단번에 납득했다. 이것은 독이 든 성배와 같다. 누군가는 가야하고 성공한다면 후계에 가까워질 업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쨌든 잘됐다. 나름 꽤 바쁜 몸이다.
무엇을 노리고 우리 쪽 사람까지 불러들이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됐든 던전 자체는 제멜아크 영토에 있고 공략을 한다 해도 보물의 소유권은 그쪽이 가지게 될 확률이 높다. 굳이 내가 가서 힘을 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쉽다. 빨리 가고 싶었는데.”
슬라이트가 입맛을 다셨다.
“던전 공략을 하고 싶나?”
“누구나 원하는 일 아니냐?”
슬라이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여태까지 던전 공략을 하다 죽어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제국의 유산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여태까지 발견된 던전 대부분은 침입자에게 매우 적대적인 곳이다. 귀족은 자신의 영토에서 발견된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병사들이나 백성들을 먼저 밀어 넣고 그렇게 얻어진 정보를 토대로 정예를 투입해 공략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던전의 공략법이다.
슬라이트의 말은 앞에 투입된 힘없는 사람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나온 말이나 다름없다. 물론 나쁜 뜻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곳에 도착한 우리가 들러리만 서다 오게 될지 던전 안에 투입될지 모르겠지만 만약 들어가게 된다면 자연히 매운맛을 한번 보게 될 것이다.
“글쎄, 그건 가보면 알게 되겠지.”
이미 경험해본 제국의 유산이다. 그 악랄함이라면 잘 알고 있다.
스승님께도 슬라이트와 아이브 공주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해드렸다. 스승님은 보기 드물게 미간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셨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그렇구나. 이 왕자가 함께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소문은 들었지만, 그 정도로 행실이 좋지 않습니까?”
스승님이 걱정할 정도로 망나니인가? 그럼 그건 이미 사람 수준이 아니지 않나?
“아니 그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 네가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뭐가 걱정이십니까?”
“제멜아크 왕국에서도 파견될 왕자를 고민하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우리 왕국도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겠느냐?”
일리가 있다. 그런 고민을 한 끝에 결정된 것이 이 왕자, 슬라이트 그리고 나인가? 노회한 정치인들을 역시 우습게 볼 것이 아니다. 버리는 패가 되도 상관없지만 뭔가 기대해볼 만한 패인가?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전 이미 경험자가 아닙니까?”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실력을 올리는 것이 우선이다. 더욱 수련에 집중하자꾸나.”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스승님의 훈련 강도가 갑자기 몇 배로 늘어났다. 몸은 힘들지만, 오히려 바라고 있던 일이다. 스승님은 갑자기 늘어난 신체 능력과 오러를 다루는 법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지도를 해주셨다.
슬라이트와 자칼도 어제 나와 대련으로 자극받았는지 격렬하게 검을 주고받고 있었다. 천재 놈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승급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스테이시는 훈련을 빠지고 닭장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사실 스테이시는 우리들과 함께 훈련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꼬꼬들이 스테이시의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지구로 들어갔다. 오늘은 태백시에 도착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해가 떨어진 후에 움직이는 것이 큰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밤하늘에 뜬 달이 무척 크고 밝다. 대격변 전의 세상의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달이다. 별도 빼곡하게 검은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
시골에서나 볼 수 있었다고 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이제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대격변 이후 시간이 흐르며 점차 맑아진 밤하늘을 보는 것을 좋아했었다.
잠이 들지 못하는 나에게 밤하늘은 말없이 무슨 이야기라도 들어주는 친구와 같았다. 밤하늘에 뜬 달과 별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빨리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때는 밤이 인간에게 친절한 존재는 아니었다. 낮보다는 밤의 습격이 훨씬 자주 일어나고 당했을 때 훨씬 치명적이다. 변이체뿐만이 아니라 같은 생존자끼리의 습격을 포함해서다.
비명과 피가 얼룩진 밤이라고 해도 나는 밤하늘을 좋아했다.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유일하게 좋아진 점이었다.
인간이 사라지면 자연이 되살아나고 어쩌고 했던 이야기를 들었었다. 결과적으로 자연은 살아나지 못했다. 그래서 마시는 공기가 좋아진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 텁텁한 느낌이 들었었다.
이제와서는 그것이 지구에 마나가 주입되는 과정이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는 몰랐었다.
밝은 달과 별의 힘이 아니라 해도 오러 사용자가 된 지금은 전생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밤눈이 밝아졌다. 여차하면 마법으로 광원을 만들어내도 된다.
오래된 길을 걷다 보니 인류의 흔적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자동차였던 것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대격변의 날 도시를 빠져나가기 위해 도로를 가득 메웠던 자동차들은 대부분 그날 주인을 잃었다.
이곳은 외곽지역이라 아직 그렇게 자동차였던 것의 흔적이 많진 않지만, 이곳의 경우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널려있는 자동차들의 뼈대가 조금 아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져가서 녹인 후에 재활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너무 수고가 많이 들어가는 방법이고 이익도 크지 않다.
빠른 속도로 걷다 보니 바닥에 쓰러진 표지판이었던 것의 흔적이 있다. 글씨는 다 지워져 하나도 보이지 않고 철판에 시뻘건 녹이 슬다 못해 다 부스러진 수준이었지만 도시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침반을 꺼내 방향을 확인해보았다. 방향으로만 보자면 맞게 가고 있는 것 같다. 이곳에서 서쪽으로는 태백산을 넘으면 바다밖에 나올 것이 없으니 동쪽을 향할 뿐이다. 정확히는 남동쪽이 되겠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하다가 무심코 지나칠 뻔했지만 아주 먼 거리지만 희미하게 불빛이 보인다. 달빛이나 별빛이 반사된 그런 것은 아니다. 인공적인 빛이었다.
‘누구냐 넌?’
사람일까? 광검제가 저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악마 추적기도 손에 들었다.
빨라진 걸음은 이내 달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도로를 벗어나 불빛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빠르게 불빛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광검제 혹은 변이체일 수도 있다. 아니면 부교주나 마신교에 관계된 인물일 수도 있다.
부교주를 제외한다면 딱히 두려운 것은 없다. 희미했던 불빛이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푸른 빛이다. 자연적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불꽃의 색깔이다. 그런데 불빛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불빛으로 무언가를 유혹하듯이 바람에 흔들리는 초롱처럼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대지를 박차고 달리던 다리에서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한가지 목적은 이뤘다. 저 불빛이 흔들리는 곳 주변이 바로 태백시였던 것이었다.
달빛으로는 멀리서 확인할 수 없던 것들이 가까이 접근하면서 보이기 시작했다. 약 20년 정확히는 19년 만에 돌아온 태백시는 내가 떠났을 때보다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마치 오래된 유적을 보는 기분이다.
전화국은 어디쯤 있었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저 불을 흔드는 놈을 먼저 처리해야만 한다.
미친개가 태백시를 벗어나 멀리 떨어져 있던 이유를 알았다. 태백시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일명 아귀라고 부르던 놈이다. 밑장을 빼는 그 아귀와 닮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진짜 물고기 아귀와 비슷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아귀는 머리에서 솟아난 기다란 촉수의 끝에서 저렇게 빛을 냈었다. 사람이 지능이 없는 물고기도 아니고 겨우 그런 것으로 사람이 유혹당해서 잡아먹히겠냐 싶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상당히 멍청한 동물이 되기도 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보면 하루살이처럼 그곳으로 다가간다. 당장 나만 봐도 잠시지만 낚이지 않았던가?
누군가는 불을 가진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혹은 불을 가진 인간을 약탈하기 위해 인간들을 불빛에 접근했고 그곳에는 빛이 나는 흉측한 촉수를 가진 변이체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저것은 내가 아는 아귀가 아니긴 했다. 내가 아귀를 처음 본 것은 대격변의 초기였다. 아귀는 그리 희귀한 변이체가 아니었고 변이체 중에서는 강한 축에 들지도 못했다. 크기도 보통 건장한 남자 정도의 덩치였다.
그런데 저곳에서 흔들리고 있는 불빛의 크기를 보면 아귀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아직 악마 추적기가 감지를 하지 못할 만큼 꽤 멀리 있다. 그런데 이 거리에서 저렇게 보일 정도면 크다. 아니 거대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것은 대격변의 시기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귀일지도 모른다. 불빛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본체는 엄청난 크기일 것이다.
저 정도로 커지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잡아먹었을까? 내가 태백시에 있을 때만 해도 저런 녀석은 없었으니 그 후에 어딘가에서 밀려오거나 떠돌다가 이곳에 와서 미친개의 영역을 강제로 빼앗은 모양이다.
어쨌든 답은 바뀌지 않는다. 변이체 놈들은 보이는 족족 죽인다. 과거의 복수라고 해도 좋고 녀석들의 힘을 흡수해서 내가 더 강해지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다.
잠시 숨을 고르고 폐허가 되어버린 태백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녀석을 처리하고 돌아가려면 오늘은 시간이 조금 빠듯할지도 모르겠다.
“기다려라 못생긴 놈아.”
빠른 속도로 걷다 보니 어느새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흩어져있는 태백시의 초입에 들어설 수 있었다.
-부르르르
악마 추적기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악마 추적기는 아공간 안으로 집어넣었다. 지금은 필요가 없다. 뻔히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태백시 남아있는 건물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이는 건물 위에서 기다란 촉수가 아래로 축 늘어져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나를 잡으러 오라는 듯이 손짓하는 느낌이다. 어쨌든 저 촉수는 오늘 자기 할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
몇십년 만에 나타난 인간이 저 촉수의 빛에 이끌려 이곳까지 오지 않았던가?
잠잠하던 초감각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등골이 짜릿하게 위험신호를 알렸다. 그와 동시에 예전엔 꽤 고층 빌딩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반쯤 무너져 5~6층 정도로 보이는 건물 위에서 이마 한가운데 기다란 촉수를 매단 아귀가 거대한 머리를 들어 올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아귀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달빛에 어스름히 비치는 아귀의 얼굴은 확실히 못생겼다. 변이체들은 대부분 못생겼지만, 아귀는 그중에서도 상위권이다. 거대해진 만큼 더 못생겨 보인다.
“오랜만이야.”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녀석이 넓적한 입을 길게 찢으며 웃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