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폐허의 주인
아직 거리가 멀어서 크기가 정확히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드러난 머리 크기만 해도 승용차보다는 커 보였다.
아귀는 대격변 초기에 나도 몇 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냥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약한 녀석이다. 그러나 내가 만난 아귀는 저런 거대한 녀석이 아니었다.
변이체들은 사람을 잡아먹을수록 강해진다. 그리고 진화한다. 변이체의 진화는 두 가지로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저렇게 몸이 거대하게 성장하여 대형종이 되는 녀석들과 미친개처럼 처음 몸상태를 유지하되 다른 능력을 강화하는 녀석들이다.
이것은 싸움에 큰 변수가 될 것이다. 나는 저런 대형종과 싸워본 적이 없다. 다만 먼발치에서 구경한 적은 몇 번 있다.
전투계 이능력을 각성한 생존자들도 대형종과 싸우는 경우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렸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대부분 좋지 않았다.
인간이 홀로 빌딩 크기의 괴물과 싸우는 것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손에서 불을 뿜어내고 한번 도약으로 수십미터를 뛰어오르는 이능력자라고 할지라도 괴물을 이기지 못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초감각으로 느껴지는 위험도가 그리 높진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의 아귀가 미친개보다 강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미친개는 광검제에게 이미 상처를 입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이상할 정도로 약했다.
아귀 녀석이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녀석이 엎드려있던 빌딩이 갑자기 자라나는 것처럼 보인다.
물 밖으로 끄집어낸 해초처럼 지저분하게 늘어뜨린 긴 머리칼과 얼굴이 움직일 때마다 좌우로 흔들이는 흐물거리는 주먹코, 변이체의 공통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길게 찢어진 입과 그 안에 솟아난 수백개의 날카로운 이빨은 보는 이에게 불쾌감을 일으킬 정도로 못생겼다.
그리고 다이어트에 실패한 중년 아저씨 같은 체형의 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완전히 몸을 일으킨 녀석은 키가 10미터는 훨씬 넘어 보였다.
우어어어어!
녀석이 포효한다. 아주 오랜만에 나타난 먹이를 보고 흥분한 모양이다.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고막을 울리는 저음의 포효가 폐허가 되어버린 태백시를 울렸다.
“그놈 목청도 좋네.”
나는 슈바르거트를 꺼내 들고 천천히 녀석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아직 내 마법 실력이 뛰어나지 못한 이상 가까이 다가가야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놈이 자리 잡고 있는 빌딩의 최상층으로 내가 올라가는 좋은 선택이 아니다. 겨우 무너지지 않고 있을 뿐 건물 내부가 멀쩡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20년 전에도 대부분의 건물은 그런 상태였다.
내가 머물던 기상연구소가 이상하게 튼튼하게 잘 지어진 것뿐이지 내가 피난 길에 보았던 국가 기반시설들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순간 녀석이 무슨 짓을 해서 건물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면 낭패다.
대형 변이체들은 아파트나 고층 건물에 숨어있는 인간들을 처리하기 위해 건물 자체를 무너뜨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었다. 놈들을 사람을 먹는 것을 가장 좋아하지만, 그냥 살아있는 무언가를 죽이는 것을 즐긴다.
설령 힘들게 빌딩 꼭대기까지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싸우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녀석을 끌어내려야 한다.
나를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포효하는 와중에도 아귀의 시선은 나에게 단 한 순간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건방지게도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는 듯이 눈을 내리깔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효를 한번 한 이후로 녀석은 내가 근처까지 천천히 다가가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아귀는 확실히 보통 변이체들과는 다른 녀석이다. 내가 알고 있는 변이체라면 인간을 앞에 두고 기다린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이 특별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변이체들이 또 다른 진화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를 바라보던 녀석의 입에서 걸쭉한 침이 길게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귀가 뛰어올랐다. 그 거대한 몸체가 달빛을 가리며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지직!
놈이 뛰어오르는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녀석이 자리 잡고 있던 건물의 상층부가 무너져 내렸다. 내가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으면 분명 좋은 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공중으로 높게 솟구친 녀석의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원래 건물의 높이와 녀석의 도약력이 더해져 수십미터 공중에 떠 있는 녀석이 양팔을 한껏 위로 치켜올린다.
저 상태로 떨어져 내리면서 나를 내리찍겠다는 생각인가? 나를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다. 하긴 녀석이 만난 인간 중에 운동능력이 뛰어난 인간이라고 해봐야 신체 강화를 가진 생존자 정도였지 6성 기사를 만나 봤겠는가? 거기에 나는 신체 강화도 가지고 있다.
녀석의 길게 찢어진 입이 더욱 길게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까도 그랬지만 설마 이 녀석은 웃을 줄 아는 건가? 여러모로 특이한 행동을 하는 녀석이다. 어차피 끌어내릴 생각이었으므로 스스로 뛰어내려 준다면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가만히 서서 당해줄 생각은 없었으므로 나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녀석의 덩치와 팔길이를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나는 훨씬 많이 움직여야 한다.
재빨리 녀석의 공격 범위로 예측되는 곳을 벗어났다. 그러나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녀석이 바닥에 착지했을 때 바로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변이체라고 해도 물리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주 희귀하게 그것을 역행하는 놈들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아귀는 아니다. 공중에 떠올랐던 아귀가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우우웅!
땅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아귀가 땅에 박히듯이 착지했다. 멀리서 볼 때보다 가까이에서 보니 아귀는 훨씬 거대했다. 착지를 하며 몸을 잔뜩 웅크렸지만, 꼿꼿이 몸을 세운다면 키가 15미터 이상은 될 것 같았다.
그 신장과 덩치를 가진 질량 덩어리가 수십미터 상공에서 그대로 내리꽂혔으니 그 충격이 진동으로 전해져 올 정도였다.
나는 조금 멀찌감치 벗어나 그 순간을 노리고 있다가 곧바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귀도 대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노련함이 있었다.
녀석은 떨어져 내리자마자 그 긴 팔과 손을 이용해 바닥을 쓸듯이 휘둘렀다. 바닥에 널려있던 각종 건물의 잔해와 잡동사니들이 나에게 그대로 날아왔다.
검으로 쳐내기에는 너무 많고 그렇다고 피하기에는 날아오는 물체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그냥 몸으로 받아내기에도 피해를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녀석은 확실히 노련했다. 이런 폐허에서 싸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변이체가 원래 사람 죽이는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들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머리를 굴리는 녀석은 처음 본다.
비교적 덩어리가 큰 것들은 피하고 가벼워 보이는 것들은 검으로 쳐내며 녀석이 날려 보낸 것들을 처리했을 때 녀석은 이미 내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15미터의 키를 가진 거인이 땅을 쿵쿵 울리며 달려오는 박력은 대단했다. 아귀는 둔하게 생겼지만 움직임은 표범처럼 민첩했다.
그 와중에도 녀석은 내가 쉽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달리는 발로 바닥을 차서 나에게 계속 무언가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날아오는 자갈과 돌덩이들은 사실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녀석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검으로 베어서 죽이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슈바르거트가 보통 검보다 조금 더 길긴 하지만 녀석의 손가락 하나도 한번에 잘라내지 못할 것이다.
변이체의 질릴 정도로 끈질긴 생명력을 생각하면 단순하게 상처를 입혀 출혈을 유도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날아오는 자갈과 돌덩이들을 피하고 쳐내며 녀석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녀석은 달려오는 속도를 그대로 이용해 나를 축구공처럼 걷어차려고 했다.
통나무보다 굵은 다리통이 휘둘러졌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발톱이 길게 자란 발이 시야를 꽉 채우며 날아왔다.
정면으로 저걸 막아내는 것은 바보짓이다. 내가 아무리 경지가 높아진다고 한들 저 무시무시한 질량이 가진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후우우웅!
빠르게 움직여 아귀의 발을 피하자 발이 지나가며 거친 바람이 일어나 얼굴을 때렸다. 그리고 지독한 악취가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저 덩치가 몇십년을 한 번도 씻지 않았을 테니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전에 만났던 떠돌이 변이체나 미친개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귀는 유독 냄새가 심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냄새가 아니다. 나는 옆으로 피하는 것이 아닌 속도를 내어 앞으로 달려나갔다.
땅을 딛고 있는 다른 다리를 노린 것이다. 슈바르거트가 오러를 잔뜩 머금고 녀석의 가죽을 베고 지나갔다.
슈바르거트는 제 임무를 다했다. 가죽을 확실히 베어냈으나 덩치만큼이나 아귀의 살가죽은 매우 두꺼웠다. 꽤 깊게 베어냈는데도 불구하고 피조차 배어 나오지 않았다.
크오오오오!
대단한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화가 났는지 등 뒤로 아귀의 분노한 외침이 들려온다. 역시 예상대로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녀석을 상대할 수 없다.
과거에 이 정도 크기의 대형 변이체와 싸워서 생존자들이 승리하는 것을 본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그때는 전투에 투입된 생존자들도 워낙 많았지만, 작전도 매우 정교했다. 생존자들이 가장 우선시한 것은 먼저 변이체의 기동성을 빼앗는 일이었다.
그때는 생존자들의 숫자가 많았고 가진 이능력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지금 나는 혼자다. 하지만 비슷하게 흉내를 낼 수는 있다.
발에 아주 작은 상처를 입은 녀석이 자존심에 상처라도 입었는지 펄쩍 뛰어오르며 나를 깔아뭉개려고 했다. 거대해진 녀석에게는 질량을 이용한 공격이 가장 효과적인 공격수단이었을 것이다. 특별한 다른 능력이나 공격 수단이 없는 아귀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해답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을 상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변이체끼리 영역 다툼이라도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미친개가 태백시에서 밀려난 것을 보면 최소한 한번은 성공했다.
재빨리 몸을 날려 아귀의 깔아뭉개기 공격에서 벗어났다. 타고난 속력을 가진 미친개도 이런 공격에 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리고 나는 미친개보다 더 빠르다.
녀석은 마치 거슬리는 바퀴벌레를 짓밟아 죽이려는 것처럼 발로 들어 마구 찍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사이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오히려 간간이 찍어 내리는 발에 검을 휘둘러 상처를 입혔다. 같은 곳에 여러번 상처를 입히며 피가 흐르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녀석이 점점 더 흥분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떤 경험을 했는지 몰라도 보통 변이체와 상당히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 녀석이었지만, 슬슬 변이체의 본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크워어어어!
마침내 녀석이 상체를 숙이며 긴 팔을 이용해 바닥을 쓸듯이 휘둘러 나를 후려치려고 했다. 치렁치렁한 길고 지저분한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상체가 숙어지는 순간 나는 휘둘러지는 손바닥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4미터 정도는 뛰어올랐다. 이것이 바로 신체 강화와 오러가 만나 만들어낸 시너지 효과다. 스승님이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나에게 요구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가진 힘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 6성 기사의 힘을 모두 사용하지 못했고 신체 강화로 얻은 힘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10 정도의 힘을 가지고 살아오던 사람에게 갑자기 20의 힘을 준다면 얼마나 사용할 수 있을까? 잘해야 11이나 12 정도의 힘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몸은 알고 있어도 뇌가 그렇게 명령을 내리기 때문이다. 스승님이 바란 것은 내가 20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덕분에 이제 17 정도의 힘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귀가 손바닥을 뛰어넘어 오는 나를 보고 조금 당황한 것이 느껴졌지만 녀석은 이제 처음의 냉정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를 한입에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뱀처럼 크게 벌린 입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덕분에 원하지도 않은 변이체의 구강구조를 아주 자세히 관찰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아공간에서 4개의 병을 꺼내 입안으로 집어 던진 후 옆으로 피해냈다.
텁!
녀석의 입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악취가 느껴져 잠시 숨을 멈춰야 할 정도였다.
녀석의 입안에 던져넣은 것은 마탑에서 가져와서 지난번 하나를 사용하고 4병이 남았던 마비 독이다.
덩치가 커서 얼마나 사용할지를 몰라 모두 던져넣었다. 덩치가 워낙 커서 4병도 어쩌면 모자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녀석이 완전 마비가 돼서 꼼짝도 못 하는 정도가 아니다.
한 병만 사용해도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알아보겠다고 여러 번 이 짓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런 기회가 앞으로 여러 번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고 해도 어차피 소모품이다 아끼면 똥 된다.
한입에 삼키기에 실패한 녀석은 곧바로 연이어서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런 눈먼 공격에 맞아줄 정도로 느리지 않았다. 다만 놈이 의도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녀석의 공격에 깨어져 나온 도로의 파편 같은 것까지 모두 피할 수는 없어서 몇 개가 몸에 맞는 것을 허용했다.
콕콕!
손목 쪽에서 찌르는 느낌이 나서 보니 어느새 반지 형태에서 벗어나 팔목에 감겨있는 백룡이가 손목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