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백룡이의 가치
“갑자기 왜 그래?”
팔목을 감고 있던 백룡이가 몸을 격렬하게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뭔가 하고 싶다는 그런 뜻이야?”
날아오는 파편을 피하는 와중에 물으니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인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얘도 무려 용사가 탐을 냈던 물건이다. 여태까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스트라이더 999번의 이름값을 못 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럼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지능이 있는 녀석이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형태로 몸을 변화시키는 것 말고는 뭘 할 수 있는지 내가 잘 모르니 자유를 줘보기로 했다.
순간 몸에서 마나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에 다리가 휘청했다. 백룡이가 몸에서 마나를 빼간 것이다. 평소에는 아주 소량의 마나만 빼가기에 방심하고 있었더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나 보다.
잠시 휘청이는 바람에 또다시 파편 몇 개를 막는 데 실패했으나 몸에 맞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내 앞에 커다란 방패가 공중에 떠서 파편을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룡이?”
크기 변화도 가능했던 거였나. 역시 스트라이더 999번이라고 해야 하나. 조엘 에이크만이 탐을 냈던 이유가 있었다.
방패로 변한 백룡이가 마치 으쓱거리는 듯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공중에 떠 있긴 하지만 빠르게 이동하는 내 움직임을 따라오기도 한다. 이러면 손이 한 개 더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좋았어.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런데 마나를 꽤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 조금 문제이긴 하다. 지금 내 수준으로는 아주 길게 사용하지는 못할 것 같다.
처음부터 최대한 빠르게 처치할 생각이긴 했지만, 아귀와의 싸움을 길게 끌고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아귀는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 계속 공격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큰 덩치치고는 매우 민첩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직접 잡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다만 근처에 있는 건물의 잔해를 발로 차서 날린다거나 손으로 잡아 던지는 공격은 꽤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제 백룡이가 모두 막아내 주고 있었다.
그렇게 마비 독의 효과가 돌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좀처럼 녀석의 움직임이 느려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덩치 때문에 고작 4병으로는 효과가 없는 걸까?
뭔가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녀석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게 느려지기 시작했다. 변이체들의 대사 능력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박자씩 느린 모양이다.
아귀도 뭔가 마비 독이 작용하는 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확실히 이놈은 뭔가를 생각한다. 기존의 변이체와는 다르다.
혹시 앞으로 만나게 될 다른 변이체도 이놈과 같다면 굉장히 성가실 것 같았다.
“자, 들어가자”
혼자였다면 하지 않았을 말이지만, 백룡이와 함께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입이 트였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무언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내가 진정한 동료를 얻게 된다면 이곳으로 데려와 함께 싸우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임이 둔해진 아귀의 옆으로 손쉽게 접근했다. 자신의 움직임이 둔해진 데가 내가 가까이 접근하자 아귀가 견제하려고 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발로 밟으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진부한 공격이었다. 이것이 특별한 능력이 없는 녀석들의 한계다. 멀쩡했을 때도 맞지 않았던 공격이 지금 와서 성공할 리 없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이 발을 들어 밟으려고 할 때 땅을 딛고 있는 발의 밑에 준비해둔 마법을 시전했다. 슬라이트와의 대련에서도 자주 써먹은 미끄러지게 하는 마법이다.
효과는 있었다. 순간 녀석이 휘청하며 중심을 잃었지만, 마법으로 미끄럽게 할 수 있는 바닥의 면적에 한계가 있어서 쓰러뜨리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것도 예상한 일이었다. 녀석이 잠시 중심을 잃은 사이 녀석의 주변에 있는 건물의 잔해 중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곳을 밟고 뛰어올랐다.
잔해의 높이와 내 도약력이 합해져 꽤 높이 뛰어오를 수 있었다. 그대로 녀석의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크어어!
녀석이 발광하며 손으로 나를 잡으려고 했지만, 녀석의 행동은 느려져 있었고 나는 다람쥐처럼 머리카락을 잡아타고 올랐다.
머리카락에서 심한 악취가 풍기고 좋지 않은 감촉이 느껴졌지만 잠시 참아야 할 때였다. 순식간에 녀석의 얼굴 근처까지 타고 오르자 녀석이 커다란 입을 벌려 물려고 했다.
머리카락을 놓으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린 곳에 있던 것은 녀석의 이마에 달린 촉수다. 머리카락처럼 축 늘어져서 아무렇게나 흔들리고 있던 촉수를 붙들었다.
촉수를 붙잡고 매달린 나를 떼어내려고 녀석이 다시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나에게는 백룡이가 있었다.
텅!
녀석의 손끝을 백룡이가 거뜬하게 막아내는 동안 나는 무엇이 잔뜩 묻어있었는지 냄새나고 미끄러웠던 머리카락보다 잡기가 편한 촉수를 붙잡고 끝까지 타고 올랐다.
이마 한가운데 달라붙은 나를 떼어내려고 아귀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지만 슈바르거트를 녀석의 이마에 박아넣고 버텼다.
크아!
화가 나는 것인지 아픈 것인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소리를 지를 때 슈바르거트를 이마에서 뽑아내 붙잡고 있던 촉수를 향해 내리쳤다.
스컹!
녀석의 상징인 빛을 내는 촉수가 끊어졌다. 촉수의 끝에 달린 빛을 내는 부분이 빛을 잃어갔다.
촉수를 놓고 이마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던 나는 그대로 슈바르거트를 녀석의 초점 없는 눈알에 쑤셔 박았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백룡이 바늘 모양!”
방패 형태로 나를 지켜주던 백룡이를 변형시켰다. 백룡이가 작았을 때야 바늘이지만 지금은 어지간한 단창과 같다.
백룡이를 한손으로 붙잡고 오러를 불어넣자 슈바르거트와 비슷하게 오러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어째 내가 사용하는 무기들은 연비가 영 좋지 않은 느낌이지만 성능만 좋으면 연비가 좋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들 그 맛에 스포츠카도 타고 그랬던 것 아니겠는가?
단창 형태로 변한 백룡이의 백금색 몸체에 오러가 실리고 그것을 그대로 슈바르거트가 박혀있는 눈알에 던지듯이 찔러넣었다.
푸욱!
깊은 파육음과 함께 질기고 두꺼운 가죽과 다르게 연약한 눈알을 백룡이가 달궈진 바늘로 버터를 찌르듯이 깊게 파고 들어갔다.
크학!
아귀가 발광하며 양손으로 나를 노렸지만 나는 슈바르거트를 뽑아내고 손잡이 정도만이 밖으로 나와 있는 백룡이의 뒷부분을 슈바르거트로 후려치고 그 반동을 이용해 멀리 떨어졌다.
등 뒤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는 아귀의 손에 조금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은 초감각을 통해 충분히 여유 있게 움직인 것이었다.
바닥으로 떨어지며 고개를 돌려 확인하자 눈알에 박혀있던 백룡이는 슈바르거트로 후려친 힘으로 완전히 눈알 안쪽으로 박혀 들어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백룡이 별 모양!”
푸학!
순간 아귀의 한쪽 눈알이 터져나가며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끄아아아!
이제야 좀 제대로 고통스러운 비명이라고 확신이 드는 소리를 내는 아귀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변이체가 지르는 비명은 나에겐 더없이 감미로운 음악과 같다.
조금 변태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수십 년을 놈들에게 쫓기며 살다 보면 나처럼 된다. 나 말고도 장시간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반응이었다.
15미터 높이에서 떨어졌지만 이 정도는 이제 나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바닥에 착지한 나는 그대로 다시 앞으로 달려들어 눈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녀석의 다리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백룡이 바늘 모양! 돌아와!”
백룡이가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계속 막대한 양의 마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눈앞 깊숙이 박혀있는 백룡이를 다리 사이에서 귀환 명령을 내리면 어떨까?
푸푸푹!
눈알 깊숙한 곳에서부터 수직으로 몸 안의 연한 조직과 내장 기관을 모두 뚫고 마지막으로 다리 사이의 은밀한 부위까지 뚫어내면서 백룡이가 내 손으로 돌아왔다.
“백룡이 방패 모양”
위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아귀의 피를 백룡이로 막아내며 거리를 벌렸다.
내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녀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람이었다면 열 번은 즉사하고도 남을 치명상이지만 변이체이기에 버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변이체라면 저런 고통 정도는 신경 쓰지 않고 나를 죽이기 위해 움직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녀석은 좀 다르다. 감정을 표현하고 머리를 사용하며 고통을 더 느낀다.
진화한 것이겠지만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생체병기 같은 느낌인 변이체의 기준으로 보면 퇴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쿠웅!
부들거리며 떨고 있던 녀석이 바닥에 양쪽 무릎을 꿇었다. 터져버린 한쪽 안구와 가랑이 사이에서는 여전히 피를 쏟아내고 있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죽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이대로 둬도 며칠 정도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회복하는 것이 바로 변이체였다.
지금 끝을 봐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녀석을 처치하기 위해 더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변이체들은 학습하고 진화한다. 오늘 살려두면 내일은 더 강해지는 것이 변이체였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변이체를 이기지 못했다.
“백룡이 바늘 모양”
녀석이 무방비하게 무릎을 꿇고 있다고 해도 완전히 무력해진 것은 아니다. 마음 놓고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어이없이 한 끼 식사가 될 수도 있다.
약해 보이는 연기를 하는 녀석도 있다는 것은 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학습이란 건 변이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원래 인간의 전유물이었다.
오러를 양껏 먹은 백룡이가 아귀의 촉수가 뿜어내던 빛이 사라진 폐허의 밤에 빛으로 한줄기 선을 그려내며 날아갔다.
푸욱!
아귀는 뒤늦게 팔을 움찔했으나 그보다 빠르게 백룡이가 가슴 한가운데에 박혀 들어갔다.
이번에는 다른 모습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명령을 내리기 전에 녀석이 백룡이를 먼저 뽑아냈다. 역시 녀석은 완전히 무력해진 것이 아니었다.
아귀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백룡이를 패대기치듯 던졌다. 바닥에 던져진 백룡이가 바닥에 튕기며 저 멀리 날아갔다.
국왕 앞에서 재롱을 부릴 때만 해도 다들 관심이 없었지만, 사용법을 알아낸 지금은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이 백룡이인데 땅에서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아귀는 다시 힘을 내기로 했는지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백룡이를 뽑아낸 가슴에서도 검은색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대체 저 많은 피는 어디에 들어있었던 것일까. 변이체의 차가운 피가 대지를 적시고 있을 때 나는 백룡이에게 귀환 명령을 내리며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아귀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정공법이다. 접근하는 나를 막기위해 휘두르는 손을 피해내며 손가락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전진한다. 어느새 날아서 돌아온 백룡이를 다시 손에 쥐고 던졌다. 아귀는 근거리에서 쏘아진 백룡이를 미처 피하지 못했다.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마비 독 때문인지 반응이 느리다. 백룡이가 이번에는 목에 제대로 박혔다. 조금 아쉽다. 원래는 나머지 한쪽 눈을 노리고 던진 것이었는데 늦었지만 반응하며 고개를 돌려버린 결과다.
이번에는 목에 박힌 백룡이를 녀석이 뽑아내기 전에 변형시켰다. 학습은 변이체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방패 모양으로 변한 백룡이가 목의 상처를 크게 벌렸다. 목에서도 대량의 피가 터져 나왔다. 변이체는 그 근본이 무엇이냐에 따라 신체 구조가 조금씩 다르다. 아귀는 당연하게도 인간이 변한 경우다.
그 말은 골격구조나 급소도 인간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백룡이를 귀환시키며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녀석의 뒤로 돌아들어 가 무릎 뒤의 힘줄을 끊었다.
역시 발목 쪽보다는 이쪽의 가죽이 훨씬 약했다. 녀석이 요동치며 발악했지만, 백룡이가 적절하게 나서서 막아내 주었다.
예전 생존자들 사냥했던 대형 변이체가 그랬듯 기동성을 잃은 녀석은 조금씩 내게 잡아먹혔다. 남은 다리의 힘줄을 끊고 난 다음에는 팔이었다. 양팔까지 힘을 쓰지 못하게 된 녀석은 마치 개처럼 기어서 입으로 물려고 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백룡이가 몇차례 더 창으로 변해 녀석에게 날아갔다. 팔과 다리를 잃은 녀석은 하나 남은 눈까지 잃었다. 그 후에는 일방적인 폭력이 이어졌다.
얼마 후 나는 15미터짜리 고깃덩어리 위에 앉아서 녀석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나도 상당히 지쳤다. 체력적으로는 아직 문제가 없었지만 백룡이와 슈바르거트가 먹어대는 마나와 오러가 엄청났다.
백룡이는 이미 반지로 돌아가 있었고 슈바르거트는 녀석의 심장에 갈라진 심장에 박혀있었다. 정육점의 고기처럼 해체가 된 녀석이 살아날 가능성은 없다.
여차하면 지난번 떠돌이 변이체와 싸울 때 큰 효과를 보았던 혈액독까지 사용하려고 했으나 그것까지는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차가운 아귀의 등에 앉아 녀석의 몸을 살펴보니 무수한 상처 자국이 보였다. 내가 낸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있던 흉터다. 변이체의 재생능력을 생각하면 하나하나가 치명상에 가까울 정도의 상처였을 것이다.
“너도 힘들게 살았겠지.”
녀석도 수많은 싸움을 거쳐 이곳까지 왔다는 증거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살아남은 변이체들도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녀석들이다.
변이체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우습지만 나를 이해해줄 상대는 어쩌면 변이체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녀석의 생명 반응이 완전히 사라지며 등위에 앉아있던 나는 자동으로 새로운 각성을 했다.
설마 아귀처럼 이마에서 빛이라도 뿜는 능력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미묘한 능력을 새로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