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99화 (99/206)

99. 친구의 흔적

아귀에게서 새로 얻은 능력은 ‘성장’이었다. 단어로만 보면 굉장히 좋은 능력 같은데 알고 보면 상당히 애매한 능력이다.

일단 대가 없이 상시 적용되는 능력이라는 것은 나쁘지 않은데 그냥 능력 자체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육체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지금 엉덩이 밑에 깔려있는 아귀처럼 10미터가 넘는 거인이 된다고 하면 정말 곤란하니까.

그냥 말 그대로 성장이었다. 성장 촉진도 아니고 그냥 성장이다. 아귀가 다른 변이체와 조금 달랐던 것이 이것 때문인 모양이다.

그런데 그 성장 방향이 인간과 비슷해지는 것이라면 대단히 잘못된 선택이 아닌가 싶다. 인간을 멸망시킨 것이 변이체인데 그 변이체가 성장해서 인간과 같아진다는 것은 굉장한 모순이 아닌가.

그럼 나도 조금 더 인간에 가까워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평범한 사람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확실하게 어떤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시간을 두고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여태까지 경험으로비추어 볼 때 없는 것보다는 뭐라도 있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설령 아무 효과가 없더라도 최소한 손해 보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공벌레들에게는 지난번처럼 조각 하나를 던져줄까 하다가 공벌레들을 전부 꺼내서 풀어놨다. 공벌레들은 밖에 풀어주자마자 쪼르르 달려가 아귀를 시체를 포식하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덩치를 해치우려면 공벌레들도 한참은 걸릴 것이고 나도 당장 태백시를 떠날 것은 아니니 배불리 먹인 뒤 나중에 회수하기로 했다.

쓰러져있는 아귀의 거대한 덩치를 보니 새삼 내가 대형종을 사냥했다는 것이 실감이 되었다. 아귀는 원래 약한 변이체다. 이렇게까지 크게 자란 녀석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대형종 중에서는 약한 개체일 것이다.

오늘 전투에서 마지막에는 조금 아슬아슬했다. 슈바르거트와 백룡이는 분명 엄청난 성능을 가진 무기지만 효율이 높지 않다. 보통 사람보다 월등한 오러와 마나를 가진 나로서도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 부분을 개선해야 더 강한 변이체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있는 대형종은 정말 대적이 불가능할 것 같은 어마어마한 녀석들이 많이 있었다. 앞으로 분명 그런 녀석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녀석들이 전성기보다 약해졌다고는 해도 아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할 것이다. 태백시는 변두리다. 대도시에서 인간을 잔뜩 잡아먹고 진화한 변이체들은 그야말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괴물이었다.

아귀의 시체를 뒤로 하고 대충 시간을 보니 아직 조금 시간이 있었다. 바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원래의 목적대로 전화국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귀와 전투를 앞두고 있을 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과거에 내가 알던 태백시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도 했다. 오래전 일이고 엄청난 후각을 가지고 있었던 미친개를 피하느라 지상에서 활동을 극히 줄이다 보니 지상에서 활동할 일이 별로 없기도 했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전화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무너진 건물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서 있는 건축물은 전혀 없었고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곳이 많았다.

아귀의 흔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연의 힘으로 보인다. 대격변 이후 태풍과 장마 혹은 가뭄처럼 자연재해가 잇달아 나타났다. 그것은 과거보다 훨씬 대단한 규모였다.

최소한 대격변 이전에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풍에 사람이 날아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대격변 이후의 태풍은 차원이 달랐다. 재난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사람이 하늘 높이 날아가고 건물이 무너졌다. 심지어 변이체도 태풍에 휘말려 날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생존자의 말로는 일본이 지진 때문에 가라앉았다는 말도 들었다. 인간의 대격변 이후 변이체뿐만 아니라 자연재해와도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다시 잠잠해졌다. 대격변 이후 20년쯤 지났을까? 내 기억으로는 그 정도부터였다.

지금 건물들의 상태를 보면 내가 죽은 후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꽤 대단한 자연재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워낙 폐허만이 이어지다 보니 전화국이 있던 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대형건물의 흔적을 보고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이정표가 될만한 것을 찾았다.

“너도 아직 살아있었구나.”

그것은 오래된 나무 한 그루였다. 난 나무에 다가가 손으로 거친 나무껍질을 쓰다듬었다. 이 녀석도 엄연히 대격변 이전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생명체다.

처음 태백시에 들어섰을 때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태백시 이전에 나는 안동에 있었고 그곳의 생존자 그룹에 있었던 두 사람과 함께 태백시로 넘어왔었다.

안동시 생존자 그룹의 부대장이었던 배도형과 탁월한 정찰 꾼이었던 정이형이라는 형님이 함께였다. 안동시의 생존자 쉘터 역시 모든 쉘터의 마지막이 그렇듯이 변이체의 공격에 무너졌다.

리더의 판단이 문제였다. 당시 안동시 쉘터의 대장이었던 안상철은 배도형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중간에 합류해서 예전 일은 잘 모르지만, 안상철은 매우 뛰어난 리더였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쉘터의 대장으로 잘 이끌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끝없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안상철은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난폭해졌다. 그래서 부대장인 배도형과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실수와 판단 오류가 겹치며 결국 안동시 쉘터는 변이체의 공격에 와해되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나와 배도형 그리고 정이형은 안동시를 벗어나는 것을 택했다.

우리 셋은 안동시를 벗어나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태백시에 도착했다. 유난히 뜨거운 여름이었다. 시내에 들어선 우리는 이 나무의 그늘 아래 드러누웠다. 매우 지쳐있었고 며칠은 굶은 상태였다. 우리는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한수야.”

“왜?”

나와 동갑인 배도형은 안동시를 벗어나면서 서로 말을 놓기로 했다. 안동시에서는 부대장이었지만 쉘터가 와해한 순간 더 이상 부대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담배 있냐?”

“있겠냐?”

담배라는 것을 구경해본 지 10년도 넘었다.

“기다려보드라고 내가 곧 한 갑 찾아 줄게”

옆에 나란히 누워있던 이형 형님이 너스레를 떨었다. 정이형 형님은 이능력을 빼놓고 생각해도 타고난 정찰 꾼이었고 가끔 생각지도 못한 것을 찾아오고는 했다.

“그 전에 죽겠는데요.”

“그럼 어짤 수 읍지.”

죽음에는 이미 담담한 우리 세 사람이었다.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아왔던가.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한수야.”

“쓸데없이 왜 자꾸 불러 기운 없어.”

“나 먼저 가면···.”

“네가 먼저 가겠냐? 신체 강화도 있는 자식이 엄살을 부리고 지랄이야. 가도 내가 먼저 가겠지.”

당장 변이체가 나타난다고 해도 한 걸음도 움직일 기운이 없이 드러누워 헛소리나 하고 있을 때 나무 그늘 사이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서 다들 뭐해요?”

태백시의 생존자 김희철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희철이를 따라 태백시의 쉘터인 전화국 지하로 안내받았고 살아남았다.

이곳에서부터 희철이의 등만 보고 따라 걸었던 여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의 기억에 홀린 것처럼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같이 온 동료도 없었고 주위의 환경도 너무 달라졌다. 심지어 나는 죽고 다시 태어나 사람조차 바뀌었지만, 그날의 기억이 겹쳐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폐허가 된 도시의 밤길을 걸어 도착한 곳에전화국이 있었다. 기억이 보여주던 환상이 끝났다. 내가 기억하던 전화국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반쯤 무너지고 그나마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 같은 나머지 절반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문제는 내가 저곳의 지하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혹시나 들어갔을 때 무너져서 입구가 막히기라도 한다면 낭패가 따로 없다. 아무리 6성 기사라고 해도 수십톤의 돌무더기를 날려버릴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안을 잠깐 둘러본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너진 잔해를 피해 전화국 로비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전화국 안으로 들어가자 어렴풋이 전화국 내부의 구조가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장수한 생존자들에게 쉘터의 구조를 익히는 것은 가장 기본 사항이었다.

변이체의 공격에 도망치거나 맞서 싸울 때 가장 필수적인 것이 쉘터의 구조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로비를 지나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를 확인한 나는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가 무너진 잔해로 막혀있었다. 조금 들어내서 해결될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고 작업을 잘못하다가는 다른 붕괴를 일으킬 위험도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한 것은 아니다. 전화국이 좋은 쉘터였던 이유는 지하로 들어가는 통로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가장 가까운 예비통로를 향했다. 전화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통신용 맨홀이었다. 원래 이곳에는 전화국에서 빠져나오는 통신선이 가득 들어차 있었으나 우리가 고생 끝에 통신선을 모두 제거하고 통로를 만들었었다.

그러나 도착한 맨홀은 역시나 막혀있었다. 이곳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통로 자체가 무너져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 멀리 가야 한다.

미친개의 공격에 내가 빠져나왔던 곳이다. 이것은 원래 없던 것인데 내가 개인적으로 만들어두었던 개구멍이었다.

지하의 허물어진 벽을 뚫어서 작은 개구멍을 파기 시작해 지상까지 길을 내는데 1년이 넘게 걸렸었다. 동료들 모두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나를 살렸다.

가장 허술하게 만들어진 곳이었기에 나는 이곳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가장 적다고 생각했다. 그저 확인 차원에서 들러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아있었다. 내가 만들었던 개구멍이 조금 막혀있긴 했지만, 원형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아, 제길···.”

반쯤 막혀있는 구멍을 다시 파내서 복구시키는 것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다른 방법이 생각났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방법보다는 이것이 가장 쉬운 일이었다.

나는 말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신체 변형을 사용해 몸을 뱀처럼 만들어 반쯤 무너져내린 개구멍을 통과했다. 진짜 뱀처럼 몸을 꿀렁거리며 구멍을 기어서 통과해 반대편으로 빠져나온 나는 몸을 원상복구 시키며 욕을 잔뜩 내뱉었다.

“쓰읍”

몇 번을 해도 이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하다. 몸의 변화가 있고 난 뒤에 고통이 조금 줄어들었는데도 이번에는 전신을 뱀처럼 가늘게 만들다 보니 여태까지 겪은 변형 중에 고통이 가장 심했다.

더욱 최악인 점은 이곳을 빠져나갈 때 한 번 더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화국의 지하는 완전한 어둠이었기에 마법으로 광원을 하나 만들어서 주위를 밝혔다. 전화국의 지하는 그날의 흔적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미친개가 난입해 날뛰었던 흔적과 우리가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흔적 하나하나가 기억났다.

“여기 있었구나.”

지하의 구석에서 사람이었던 것의 흔적을 발견했다. 갈가리 찢어진 빛이 바랜 청바지와 초록색 티셔츠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낭자한 핏자국이 흐릿한 흔적이 되어 아직도 남아있었다. 주변에는 격렬했던 저항의 흔적이 역력했다.

이 친구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운 것이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그냥 죽으면 억울하니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단 1초라도 더 벌어주기 위한 선택이었다.

시체는 뼛조각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알 수 있다. 배도형이다. 아니 배도형이었던 것의 흔적이다. 내가 만나봤던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쉘터의 리더이자 마지막 친구의 흔적을 보니 심장 한편이 욱신거린다.

“복수는 했다.”

친구의 흔적을 보며 중얼거렸다. 미친개를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언젠가 혼자 있을 때 마셔보려고 마음먹고 몰래 아공간에 챙겨두었던 술을 꺼내 한잔 따라 앞에 두었다. 한국식으로 절이라도 할까 하다가 그것은 그만두었다.

바닥에 박혀있는 부러진 군용대검을 뽑아 들었다. 친구의 애병이었던 녀석이다. 나는 그것을 소중히 챙겨 넣었다.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을 따라가니 다른 동료들의 흔적도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이형 형님의 흔적 그리고 쉘터의 막내 김자루의 흔적도 발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나 걱정이 많았던 희철이의 흔적까지 발견했다. 역시 아무도 이 쉘터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이형 형님이나 희철이는 어쩌면 이곳을 벗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흔적만 있을 뿐 시체는 남아있지 않았다. 굶주린 변이체에게 당하면 이렇게 된다. 그나마 미친개가 대형 종이 아니라서 한입에 삼키지 않아 흔적이라도 남은 것이다.

모두의 흔적 앞에 술을 한 잔씩 따라 바쳤다. 그리고 우리가 생활했던 공간으로 향했다.

통신실이었던 것을 개조해 생활공간으로 사용했던 방은 물건들이 비교적 멀쩡하게 남아있었다.

나와 희철이가 모아둔 물건도 마찬가지였다. 구석에 잔뜩 쌓인 물건들이 있었다. 가뜩이나 좁은 방인데 자꾸 고물을 주워다 쌓아둔다던 동료들의 불평이 아직 들리는 것 같았다.

반은 내가 모은 것들이고 다른 절반은 희철이가 모은 것들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그 물건들을 뒤져가며 희철이의 보물 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방 노란색 금속 상자를 찾았다. 겉은 비록 녹이 잔뜩 슬어있었지만, 상자를 열자 몇겹으로 포장해둔 내용물이 나타났다. 포장을 풀자 온전해 보이는 씨앗들이 잔뜩 있었다. 몇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아 지구를 멸망시킬 거라던 비닐 포장이 희철이가 죽을 때까지 소중히 간직했던 씨앗들을 살렸다.

“이건 내가 잘 키워보마”

이제 이곳에는 없는 희철이에게 감사를 표하며 나머지 물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희철이가 모은 물건들은 언젠가 대격변이 끝났을 때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각종 책과 씨앗 그리고 음악 CD 같은 것들이었다. 아쉽게도 책들은 다 썩어서 알아보기도 힘들었고 CD는 재생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망가져 있었다. 저쪽 세상에 심었을 때 잘 자랄지는 아직 모르지만, 씨앗을 건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반면에 내가 모아둔 고물들은 아직 남아있는 제법 쓸만한 것이 있었다.

“오우,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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