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00화 (100/206)

100. 고향의 맛

내가 모은 물건들은 그야말로 고물이다. 내 마음에 든 물건들을 아무거나 모은 거다.

원래 어렵게 살아서 그런지 세상이 망하기 전이라면 가치가 있었을 만한 것들이 많았다. 잔뜩 쌓아둔 현금 뭉치는 여전히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총기류가 있었다. 권총과 소총이 한정씩 있었다. 탄도 제법 있었다. 물론 태백시에 있던 것을 수거한 것이지 이곳에서 쏴 본 적은 없다.

대격변 후에 변이체에게 개인화기가 통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변이체들이 빠르게 진화했기 때문이었다. 개인 화기가 통하는 시기가 지나고 나서 총을 사용한다는 것은 날 죽여달라고 변이체를 부르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총은 대격변 이후에도 인간을 상대하는 수단이었다. 그마저도 생존자 중에 이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효과적인 공격수단이 되진 않았다.

그래서 총을 든 사람들은 생존자 무리로부터 배척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수 혹은 고의로 총을 사용해 변이체를 불러들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도 아니면 총을 같은 생존자에게 사용하는 약탈자라는 뜻이었으니 척살 대상에나 오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어쨌든 나는 태백시에서도 굴러다니던 총을 한 자루씩 주워다 놓았다. 녹이 잔뜩 슬어있는 것은 둘째치고 오래된 총알을 믿을 수 없기에 여전히 사용하지는 못하겠지만, 권총을 챙겼다. 이것은 단순한 수집이다. 이건 사나이의 로망 아니겠는가?

그 외에는 금은방에서 주워온 귀금속과 보석들이 있었다. 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전히 그것들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저쪽 세상에서도 가치가 있기에 전부 챙겨 넣었다.

그 외에 어렸을 때 가지지 못했던 고급 장난감도 있었고 초침 소리 때문에 사용하진 않았지만, 초고가의 오토매틱 시계 같은 것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고물상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내가 가장 대박이라고 생각했던 건 따로 있었다.

“고향의 맛”

태백시에서 정말 운 좋게 구한 고향의 맛을 내는 조미료 1kg짜리 다섯 봉지가 있었다. 정찰의 달인 정이형 형님이 외딴곳에 떨어져 있던 허름한 가정집의 싱크대 밑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정말 이런 것을 찾는 데는 귀신같은 재능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중 두 봉지는 사용했고 세봉지가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거 먹어도 되는 건가?”

유통기한은 딱히 없는 것인 줄 알고 있지만 밀봉되었다고 해도 워낙 시간이 오래 지나서 조금 의심이 된다. 그래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을 수는 없다. 무려 고향의 맛이 아닌가? 아무리 저쪽 세상의 요리가 화려하다고 해도 이 맛을 내는 것은 아직 불가능했다. 나는 혹시라도 포장이 뜯어질까 봐 소중히 그것을 챙겼다.

슬슬 돌아가야 하는데 다시 신체 변형을 사용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방에서 나와 동료들이 쓰러져간 구석구석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

나도 다시 태어났으니 동료들도 어딘가 다른 세상에서 다시 태어났을 수도 있다. 그렇게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나답지 않게 쓸데없이 감성적이 되는 것 같다.

몸은 젊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 늙어서 그런가? 그래도 다행히 주책맞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참았을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내가 운다면 나를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 시간을 끌었던 동료들을 욕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도형이라면 이럴 때 나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웃어 병신아.”

환생한 후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하···.”

그래서 웃었다. 텅 빈 전화국의 지하에 공허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또다시 두 번의 지독한 고통을 겪고 나서 전화국 밖으로 빠져나왔다. 밖에 나오니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효율이 좋아졌다고 해도 네 번을 연속으로 사용하니 지독한 허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집사가 대량으로 사탕을 구입해둬서 다시 보급한 사탕을 우둑우둑 씹으며 통로를 열고 집으로 돌아왔다.

꼴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누가 보기 전에 얼른 씻고 아침 식사를 했다. 아침부터 대량의 음식을 흡입하는 나를 보고 슬라이트가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어차피 내가 이상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평소처럼 따로 오전 수련을 진행하는데 스승님이 뭔가 달라진 것을 눈치채셨다.

“어제보다 움직임이 훨씬 좋아졌구나?”

이쪽 방면으로는 확실히 귀신같은 양반이다. 밤새 아귀와 싸우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적응훈련이 된 모양이다.

“스승님의 가르침이 좋은 덕분이겠지요.”

“그랬으면 좋겠다만···.”

너스레를 떨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딱히 추궁하진 않으셨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어제 아귀와의 싸움에서 단지 대형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꽤나 고전했다. 앞으로 대도시로 진출이라도 하게 되면 아귀보다 강력한 대형종을 만날 일이 많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보완이 시급했다.

“무엇이냐?”

“대형 마수를 상대할 때 좋은 기술은 없습니까?”

대형 마수라면 대형종 변이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기본적인 상대법이라면 이미 알고 있지만 경험이 많은 스승님이라면 뭔가 특별한 방법을 알고 계실 것 같았다.

“네가 기본적인 전술을 몰라서 물어보는 것은 아닐 테고···.”

스승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검을 뽑아 드셨다.

“일반적인 방법을 물어보는 것은 아닐 테고 아마 네가 원하는 것은 강력한 일격을 먹일 방법이겠지?”

“딱히 그런 것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좋습니다.”

“일단 잘 보거라.”

스승님이 반지를 빼고 검을 들자 어마어마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난번 자무새를 사냥할 때도 이 정도로 오러를 발산하시진 않았다.

검에 오러가 모이기 시작한다. 오러가 뚜렷한 유형의 형태로 검을 뒤덮어 형상을 이룬다. 이것까지는 오러의 양을 제외한다면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스승님은 한 걸음을 더 나가셨다.

오러의 위로 한겹이 더 씌워졌다. 그리고 또 한겹이 더 씌워졌다. 오러를 세겹으로 만든 것이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지? 삼 중첩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삼겹 오러라고 해야 하나. 삼겹 오러는 뭔가 우습게 들리니 삼 중첩이라고 해야겠다.

“보았느냐?”

“네”

내가 대답하자마자 검에서 힘을 거두셨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예전에 공작님이 하시던 것을 따라 해본 것인데 세 겹은 지금도 쉽지 않구나. 네게 보여주긴 했다만 유지하면서 싸우는 것은 어렵겠어.”

스승님이 어려울 정도면 나는 사용할 수 없는 기술 아닌가?

“효과는 어떻게 됩니까?”

“더 강하지.”

아니 그거야 당연하고요.

“오러라는 것은 정해진 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마법과 같다고 할 수 있지. 너의 상상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다. 다시 보거라.”

스승님이 다시 검에 오러를 불어넣으셨다. 오러를 두 겹으로 만든 스승님이 하늘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정말 무성의하게 그냥 휘두른 동작이었다.

그러자 검에 씌워져 있던 두 겹의 오러 중 한겹이 벗겨지며 쏘아졌다.

“이렇게 쏘아낼 수도 있고.”

사라진 한겹을 다시 만드신 스승님이 이번엔 하늘을 향해 찌르기를 하셨다.

콰앙!

순간 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멀리서 수련하고 있던 이들도 모두 이쪽을 바라보았다.

“터트릴 수도 있다.”

폭발이 일어난 검에는 여전히 한겹의 오러가 남아있었다. 그럼 검을 찔러넣은 뒤 내부에서 오러를 폭발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변이체나 마수를 상대할 때 상당히 유용한 기술일 것 같다.

다시 두 겹의 오러를 만드신 스승님이 이번엔 아무렇게나 휘두르고 찌르는 것이 아닌 제대로 자세를 잡고 전에 보여주었던 시간을 거스르는 것 같은 마지막 절초를 펼치셨다.

샤아아아악!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하는 느린 검인데도 무언가를 가르는 소리가 난다. 가까이에 있던 나는 분명히 보았다. 검이 공간을 갈랐다. 거창하게 차원을 가른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저 검은 어떤 것이라도 베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두 겹으로도 이런 위력이다. 공작이 했던 것을 따라 했다고 하셨으니 공작은 세 겹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 8성 기사는 얼마나 괴물인 걸까? 하물며 초월자들이었던 용사들은 얼마나 강했던 것일까.

“보았느냐?”

“네, 봤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

“아직은 어렵습니다.”

흉내도 낼 자신이 없다. 당장 7성 기사가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니 지난번처럼 임시로 초월의 영역에 발을 들인다고 해도 따라 할 자신이 없다.

“아니다. 너는 지금도 할 수 있다.”

“제가요?”

“그걸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흘흘흘”

스승님은 평소와 달리 노인처럼 웃으며 검을 다시 집어넣으셨다.

“숙제다. 스스로의 힘을 믿어라. 그리고 너의 상상력을 발휘해보거라.”

스승님은 그렇게 말을 남기고서 저택으로 돌아가셨다. 오늘 오전 수련은 끝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숙제라고 하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오전 수련이 생각지도 않게 일찍 끝나는 바람에 시간이 남아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닭장을 들여다보니 안에서 번쩍번쩍하는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요즘 닭장 안에서 살고 있는 스테이시가 빛닭이를 괴롭히기라도 하나 싶어서 들어가 보니 스테이시의 몸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빛닭이의 마력 파장을 흉내 낼 수 있게 되었어요.]

“그게 한다고 되는 거야?”

[되던데요?]

역시 이놈의 천재들이란···.

“혹시 그게 더 효율이 좋은 거야?”

[아니요.]

“그럼 따라 할 이유가 없잖아?”

[지금은 그렇지만 이것 언령마법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요. 그리고 이건 완전히 새로운 마법 구동 방식이에요. 개량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학파를 만드는 수준이 될 거라고요.]

스테이시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진짜 대단한 발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언령마법은 언령이라도 사용하지만, 이것은 언령 없이도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빛닭이나 철닭이가 딱히 캐스팅해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철닭이 것도 따라 할 수 있어?”

[할 수는 있지만 옷에 구멍이 나더라고요.]

말을 하며 스테이시가 얼굴을 붉혔다. 철닭이는 깃털을 금속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그럼 스테이시가 사용한다면 머리카락 같은 것이 금속으로 변하는 건가? 머리카락이 금속으로 변하는데 왜 옷에 구멍이 나는 거지?

“아무튼 축하해. 이론이 정립되면 나도 많이 가르쳐줘.”

캐스팅 없이 여러 가지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면 나 같은 마검사는 몇 배로 강해질 수도 있다. 스테이시는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스테이시를 응원해주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평범한 이 세계의 식사다. 아니 상당히 고급 식단과 좋은 맛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제 지구에서 손에 넣은 고향의 맛을 내는 조미료가 자꾸 생각난다. 이것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을까? 그냥 제이시나 마사에게 전해주기에는 좀 그렇고 양이 그렇게 많지도 않다.

결국 나 혼자만 몰래 사용해야 한다는 건가? 그런데 난 요리에는 재능이 없다. 마법의 조미료가 있다고 한들 기본은 있어야 맛을 내는 법이다.

순간 작은 깨달음이 왔다. 기본이 없다. 나는 검에 기본이 없는 것이 아닐까? 나이에 비해서는 빠르게 높은 경지에 올랐고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는 검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밥 먹다 말고 갑자기 멈춰선 나를 보고 스승님이 손짓해서 모두 물러나게 하셨다.

“저 괴물 딱지 같은 놈. 또 뭐야?”

“쉿!”

슬라이트가 작은 소리로 욕하는 것을 들었다. 자칼이 조심스럽게 슬라이트를 조용히 시키는 것도 들었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느끼고 있었다. 아쉽게도 승급이 되는 과정은 아니다. 그것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작은 깨달음 정도는 이미 몇번이나 경험해 봤다. 그런데 그때와는 감각이 달랐다.

뭐랄까. 승급할 때의 깨달음이 심장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머리에서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머릿속 깊숙한 곳에서 ‘성장’이라는 능력이 나 여기 있어! 하고 손을 흔들며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

뭔가 애매한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효과를 빠르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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