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성장의 연속
실제로 뭘 깨달은 것은 아니다. 그냥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답이 나온 것도 아니고 무아지경에 빠진 것도 아니다.
오로지 성장이라는 능력에 의해 강제로 반 각성 상태에 있는 것뿐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성장을 할 것인가.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기왕 떠오른 김에 검이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사실 이것은 기사들 사이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화두이다. 나도 몇 권인가 그것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검이라는 것은 본질 그대로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병기이고 검술은 그것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극대화된 것이다. 라는 말을 하는 검의 대가도 있었다.
검이라는 것은 팔의 연장이고 검술은 늘어난 팔을 잘 사용하는 법이라는 생각을 가진 유명한 기사도 있었다.
검은 도구일 뿐이고 용도는 휘두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검을 휘두르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심오한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검은 기사의 친구이기 때문에 검과 친해지면 자연히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이론을 내놓은 사람들은 과거 모두 대단한 경지에 올랐던 검의 대가들이었다. 결코 모두에게 공통된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백 명의 기사가 있다면 백 개의 답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검의 답은 어떤 것일까? 여태까지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검은 검일 뿐이다. 내가 지구 출신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지구인은 이곳 사람들과 달리 어렸을 때부터 검을 휘두를 일이 거의 없고 생계의 수단이나 생존의 수단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나는 운이 좋게도 김경식에게 검술을 배웠지만, 전생에 그것을 제대로 사용해본 적은 없다. 내가 검을 배웠을 때는 이미 변이체들이 상당히 강해져 있어서 오러나 전투계 능력이 없는 사람이 검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장검도 구하기 힘들뿐더러 소지하고 다니기엔 너무 불편한 물건이었다. 변이체가 아닌 인간들을 상대로 검을 사용해야 할 때도 군용 대검이나 회칼 혹은 정글도 같은 것을 사용했었다.
나는 그저 살기 위해 검을 배웠고 살아남기 위해 날붙이를 휘둘렀다. 그랬다. 내게 검이라는 것은 생존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얻은 것은 있느냐?”
식탁의 맞은편에 앉아 계시던 스승님이 물으셨다. 그런데 무엇을 얻었고 어떤 성장이 있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습니다.”
“괜찮다. 너는 이미 충분히 빠르다. 아직 시간이 많고 천천히 알아가도 늦지 않아.”
“알겠습니다.
스승님이 나를 위로하셨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크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나에겐 결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다음에 부교주를 만나는 순간 죽을 수도 있다.
식당을 나와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슬라이트가 들러붙었고 뒤에 자칼도 슬쩍 숨어있었다.
“뭐냐? 또 얼마나 강해진 거냐?”
“잘 모르겠는데”
“무슨 깨달음을 얻은 거냐?”
“내가 왜 검을 배우고 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라고 할까?”
기사들은 이런 화두를 개인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감추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자산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중에 제자를 키우게 된다면 이 화두를 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슬라이트와 자칼이라면 딱히 감출 이유가 없다. 그들에게 이런 조언을 해줄 기사들은 가문에 돌아가면 수십명은 있을 것이다. 당장 얘들의 아버지만 해도 왕국 최고의 강자들이다.
“흐음···.”
슬라이트가 미간을 구기며 내가 던진 화두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 보였다. 뒤에서는 자칼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다고 갑자기 깨달음이 오거나 하진 않···. 왔다. 그것도 둘이 동시에 왔다. 이 괴물 같은 천재 놈들이 갑자기 깨달음의 영역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었나? 정작 나는 깨달음 비슷한 흉내만 내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 같은데 이놈들은 진짜로 무엇을 얻으려는 모양이다.
오러의 흐름이 거칠어지자 안에 계시던 스승님이 재빨리 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고 반쯤 몸이 굳어있는 슬라이트는 조심스럽게 안아 들으셨다.
“너는 자칼을 조심해서 들어라.”
“네!”
여긴 아직 집 안이다. 만약 이놈들이 이번에 깨달음을 얻어 승급이라도 하게 된다면 오러의 폭풍으로 인해 집이 박살이 날 것이다. 나도 자칼을 재빨리 안아 들고 스승님과 함께 문을 부술 듯이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집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둘을 멀찌감치 앉혀놓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냐?”
일단 사태를 정리한 스승님이 물으셨다.
“제가 생각했던 화두를 전해준 것인데 갑자기 둘이 저렇게 되더군요.”
“허허···.”
스승님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트리셨다. 그리고 둘의 사이에 서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 폭풍의 위력을 힘으로 누르기 시작하셨다.
갑자기 일어난 난리에 멀리 있던 철권단들이 몰려와서 구경하기 시작했다. 잘하면 6성 기사가 동시에 둘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평생이 아니라 생을 두어번 살아도 볼 수 없을 만한 진귀한 일이었다.
그런데 닭장 쪽에서 갑자기 또 마나의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설마 스테이시도?”
스테이시는 아직 4 서클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사이에 있으니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지 스테이시도 왕국에서 손에 꼽는 천재이고 마법사쪽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다.
“그쪽은 네가 어서 가봐라.”
“네!”
스승님의 말에 나는 바람처럼 닭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기사와 달리 승급할 때 반동이 그리 크지 않다. 그런데 지금 스테이시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동은 보통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닭장으로 달려가자 마침 닭들을 돌보고 있었는지 닭장 앞에서 폴켄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단장님!”
“괜찮아. 너는 주변으로 사람이 오지 못하게 해라.”
“네”
튼튼하게 만들어놓은 덕분인지 닭장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지만 당장 무너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확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파동이 물리적으로 느껴졌다.
스테이시는 닭장 한가운데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고 꼬꼬들은 놀랐는지 구석에 몰려 홰를 치고 있었다. 이쪽은 스테이시를 옮기기엔 늦었다.
그렇다면 꼬꼬들을 옮기면 된다. 다행히 근처에 폴켄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폴켄이야 이미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아이다.
나는 통로를 열고 꼬꼬들을 붙잡아 안으로 던졌다. 비록 기상연구소 안이었지만 원래 지구에서도 살았던 아이들이다. 먹을 것이 없긴 하겠지만 하루쯤 지구에 풀어놓는다고 해도 어떻게 되진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폭풍에 휘말려 죽거나 밖으로 꺼내져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스테이시의 주변에 서서 오러로 터져나오는 마나의 폭풍을 스승님처럼 상쇄시키기 시작했다. 스승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해서 그렇지,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기술이다.
거칠게 뿜어지는 마나를 나의 오러로 받아내어 힘을 상쇄시킨다. 정밀한 오러의 운용이 필요한 기술이다.
아귀와 싸울 때도 별로 흘리지 않았던 땀이 줄줄 흐른다. 자칫 잘못해서 닭장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스테이시가 크게 다치는 수준을 넘어설 수 있다. 깨달음을 얻어 본격적으로 무아의 상태에 빠졌을 때 몸에 충격을 받으면 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때 또 팔목에서 움찔거리는 느낌이 난다. 보나 마나 백룡이일 것이다. 살짝 시선을 돌려 보니 백룡이가 어제처럼 또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해봐”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녀석인 것 같으니 설마 나나 스테이시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진 않을 것이다.
내 허락을 받은 백룡이가 고개를 끄덕하더니 방패와 비슷한 모양으로 변했다. 그런데 작다. 어제처럼 내가 가진 마나를 꺼내 쓴 것이 아니다. 그런데 백룡이의 몸집이 실시간으로 커지는 것이 보였다. 스테이시가 뿜어내는 마나의 폭풍이 백룡이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나를 흡수할 수도 있는 건가?’
그럼 다른 공격 마법 같은 것도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백룡이는 마법사에게 천적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될 수가 있다. 과연 대마법사의 만든 역작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씩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고 있는 백룡이였다.
백룡이가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하자 나머지를 내가 막아내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그리고 이미 스테이시에게서 뿜어지는 마나의 양이 줄어들고 있었다. 마법사는 기사와 달리 승급할 때 반동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지금 이것도 스테이시가 특별한 것이지 다른 마법사는 절대 이 정도가 아니다.
“백룡이 돌아가.”
이제 백룡이가 없어도 혼자서 감당할 수 있다. 백룡이의 이런 모습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 특히 스테이시에게는 더욱 그렇다. 타깃을 닭들에서 나로 바꿀지도 모를 일이다.
마나를 흡수해 잔뜩 커져 버린 몸을 줄이는 것에 한계가 있는지 백룡이가 반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팔찌로 변해 팔목에 감겨왔다.
이윽고 점점 잠잠해지더니 스테이시가 깨어났다. 말하지 않아도 스테이시가 한단계 올라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축하해”
[감사해요.]
스테이시는 대답하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꼬꼬들을 찾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 잘 대피시켰어.”
[다행이에요. 감사해요.]
스테이시가 안심되었는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들 덕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어요.]
닭이 깨달음을 줘서 5 서클 마법사가 만들어지다니 평생 4 서클에도 못 오르는 마법사들이 알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을 느끼건데 아직 슬라이트와 자칼은 현재진행형으로 보였다. 역시 기사 쪽이 승급할 때 더 까다롭다. 저쪽은 6성으로 승급이기도 하니 더욱 그렇다.
과연 승급을 할지 아니면 깨달음으로 끝날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스승님이 막아내고 있는데도 여기까지 느껴지는 기운을 보면 아마도 승급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5성 기사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6성 기사가 되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그것도 말 몇 마디에 말이다. 재능충돌은 이래서 싫다.
라고 밖으로 속마음을 꺼내 말한다면 적반하장이라며 엄청나게 욕을 먹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분명 그렇지만 나와 쟤들은 다르지 않은가.
“그럼 일단 나갈까?”
엉망이 된 닭장 안에 오래 있어 봐야 뭐하겠는가.
[참 이번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어요.]
스테이시가 일어서자마자 검지손가락을 세우더니 손가락 끝에서 불을 밝혔다. 스필버그 감독의 외계인 영화 주인공이 되기로 한 건가? 물론 스테이시가 그 외계인처럼 못생기진 않았다.
“대단한 발견인 거야?”
보여줘도 그냥 손가락 끝에서 빛이 나는구나 하는 느낌이다. 천재의 생각을 나 같은 범재가 따라갈 수가 있겠나.
[일단 캐스팅이 없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미 보여드렸고 이건 선택적으로 집중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고보니 전신에서 빛을 뿜어낼 때보다 손가락 끝에서 나는 빛이 더 강하게 느껴지긴 한다.
[이걸 응용하면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스테이시가 앞으로 손가락을 향하자 손끝에서 레이저 같은 광선이 발사되어 닭장의 벽을 뚫었다. 이거 뭐야? 무서워.
[빛을 집중시키는 거예요. 어때요? 쓸만하죠?]
쓸만한 정도가 아닌 것 같다. 저걸 대련 때 사용하면 스테이시가 우리를 다 이기는 것 아닌가?
“전신의 어느 부위라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네, 연습은 많이 필요하겠지만요]
온몸의 어느 곳에서도 언제든지 캐스팅도 없이 레이저를 발사하는 마법사라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가? 보호막 같은 것도 그런 식으로 시전할 수 있다면 방어 능력도 엄청나게 상승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사용한다면 어떨까?
“그거 배우는 거 어려울까?”
[음, 잘 모르겠어요.]
“대충 어떤 방식인 거야?”
[그러니까. 빛닭이 마나의 파동이···.]
스테이시의 강의는 거의 10분 동안 이어졌다. 그중 내가 알아들은 것은 닭들의 이름밖에 없었다.
“아, 응 그렇구나.”
이럴 것이라 생각은 했다. 그런 엄청난 기술을 쉽게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멀리서 느껴지는 기운을 보니 이제 저쪽도 슬슬 끝나가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터진 난리 블루스가 끝나가고 있었다. 왕국의 역사에 남을 경사다. 하지만 단순하게 이것을 경사로 생각할 수만은 없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