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02화 (102/206)

102. 거물 총집합

다행인지 아닌지 몰라도 슬라이트와 자칼은 모두 승급에 성공했다. 거기에 스테이시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경사가 따로 없었다. 곧바로 조촐하게나마 축하 파티가 열리고 각 가문과 마탑으로 경사를 알리는 전령이 빠르게 보내졌다.

다들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몰라도 소문도 빠르게 퍼졌다. 다들 우리 집을 무슨 성지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냐면 우리 집 근처를 지키는 업무를 하고 싶다고 왕실 기사들 사이에서 경쟁이 붙었다고 한다.

일단 들어왔다 하면 성공해서 나가는 것이 보장된 느낌이니까. 귀족가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우리 쪽과 연을 이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나와 이어지는 접점이 많지 않은 데다가 중간에 차단을 하고 있는 가문들이 워낙 대단한 곳들이다 보니 내 귀에까지 들어오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일이 있었습니다.”

그 많지 않은 접점 중의 하나가 바로 집사였다. 집사에게 들어오는 청탁이 무척 많아졌다고 한다. 그것을 집사 지미 브리스는 나에게 모두 보고했다. 집사에게 들어오는 선물도 많고 나에게 전해달라는 편지와 선물로 집사의 집이 터져나갈 지경이라고 한다.

“받으세요. 주는 거 마다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럼 청탁을 받습니까?”

“아뇨. 여기서 더 식구를 늘릴 필요는 없지요. 있는 사람들도 내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요.”

“그럼 받지 않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집사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지만 지나치게 청렴한 부분이 있었다. 원래 직장이었던 내무부에서 나온 이유도 부패한 관료들과 마찰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 사람들도 대단히 크게 기대하고 집사님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은 아닐 거예요. 그냥 복권 긁는 심정이겠죠.”

“사소한 일이지만 반응이 없으면 앙심을 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 뭣하면 슬라이트나 자칼에게 도와달라고 하죠. 뭐. 그보다 오히려 돌려주면 앙심을 품을 수도 있을걸요.”

“어렵군요.”

다른 부분에선 유능하지만 이런 부분에선 좀 아쉽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면도 있겠지만,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 안의 세워둔 정의의 기준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아직 어린 제가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사람을 좀 더 이해해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받은 선물은 제가 처리해서 금고에 넣겠습니다.”

“집사님에게 들어온 선물은 그냥 가지세요. 저에게 전달해달라는 선물은 처리해서 운영비로 쓰면 되겠네요.”

이 저택의 집사라면 그 정도 특혜는 누려도 된다. 대귀족의 저택도 아니면서 업무량은 많기도 하지만 상황도 특수하다. 물론 그것을 감안해서 급료를 꽤 높게 주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 집사를 새로 구하려면 그것의 몇 배를 줘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오히려 집사가 중간에서 적당히 착복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평생 충성을 바칠 테니까.

밑에 사람을 뽑으라고 몇번이나 말을 했고 계속 사람을 구하고 있지만 지원자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나마도 지원자는 실력미달이거나 혹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 같아도 관리하는 저택에 공주를 포함해서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가문 자제들과 7성 기사까지 있는 곳은 급료가 좀 높다고 해도 사양할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정원사도 아직 뽑지 못하고 있었다. 정원사는 인력 부족이라는 다른 이유도 끼어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막상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고용인인 마사와 힐마는 직장 만족도가 대단히 높은 수준이다.

알고 보면 좋은 곳인데 오려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굳이 손을 직접 쓰려고 하진 않았는데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불청객들이 대거 난입했다.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인간들은 이번에 승급한 슬라이트, 자칼, 스테이시였다.

“뭐야?”

내가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집사를 보고 슬라이트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나한테는 실례 아니냐?”

“넌 아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놈, 먹여주고 재워주고 승급도 시켜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집사가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자 셋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슨 일인데?”

“일이 좀 생겼다.”

내 재촉에 슬라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저놈이 눈을 가늘게 뜰 때 좋은 일이 별로 없었던 기억이 있다.

[스승님이 오신대요.]

“마탑주님이?”

정작 먼저 말을 한 것은, 아니 메시지를 띄운 것은 스테이시였다. 마탑주야 두 번 봤더니 딱히 어렵게 느껴지진 않는다. 물론 속에는 능구렁이가 잔뜩 들어있는 노회한 마법사지만 대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은 아니다. 스테이시가 승급한 후 마탑에 돌아가지 않고 소식만 보냈으니 한 번쯤 찾아올 만 하다.

“우리 아버지도 오신다고 한다.”

“공작님도?”

뭐 에인프라흐 공작도 한 번쯤 올 만하다. 막내아들이 무려 6성 기사가 되었는데 나한테 감사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시선을 자칼에게 돌렸다. 또 자칼의 누나가 오는 건가?

“우, 우리 아버지도 오신데”

북부의 호랑이 올라프 에르하트 후작,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유난히 자칼이 두려워하는 느낌이다. 아마도 자칼이 이런 소심한 성격이 된 것은 과보호하는 누나 때문이 아니라 에르하트 후작 때문이라고 봐야겠지. 그래도 내가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자칼의 누나를 생각해보면 대단히 호탕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속에 구렁이 수십마리가 득실거리고 있는 마탑주나 에인프라흐 공작보다 편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분이 한꺼번에 오신다는 건가?”

문제는 이 세 사람이 한 번에 오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는 것이다.

“맞다.”

슬라이트가 확언을 해주었다.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이건 단순히 자식들과 제자를 축하하려고 모이는 것이 아니다. 또 내가 모르는 다른 뒷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보나 마나 지난번 왕궁에 가서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일 것이다. 얘들이 승급하며 변수가 생겼으니까.

“다른 사람은 안 오고?”

이 사람들만으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가장 큰 단체가 빠져있지 않은가?

“아마 왕실에서도 사람이 나올 것 같다.”

“이미 아이브 공주님이 옆집에 사는데 새삼스럽게 또 누굴 보내?”

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이브 공주로서는 체급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 왕세자 혹은 국왕이 와야겠지.

“큰형님에게 온 연락으로는 두 분이 오실 것 같다.”

국왕과 왕세자가 다 오는 건가? 확실히 왕국의 최고 인재 셋이 높은 경지에 발을 들인 것이니 국가 차원의 경사라고 해도 이상하진 않다.

“폐하와 왕세자 전하?”

“아니다.”

슬라이트가 이상하게 뜸을 들였다. 평소엔 이런 놈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뭔가 또 변수가 있는 모양이다.

“근위 기사 단장님과 이 왕자님이 오신다고 한다.”

이 왕자는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근위 기사 단장은 의외다. 그럼 이곳에 왕국의 7성 이상 기사가 국왕을 제외하고 다 모이는 건가? 내 집을 호랑이굴로 만들 생각인 모양이다.

“오면 오는 거지 뭐”

일단 의연하게 대답했다. 설마 여기서 그 사람들이 싸우기라도 하겠나?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분들 사이에 별로 좋지 않다.”

슬라이트의 표정이 진지하다.

“모이면 싸우기라도 하시나?

“지난번에는 한번 붙으셨었지?”

슬라이트가 말하자 자칼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정한다. 싸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왜 하필 우리 집이야?”

“그거야 내가 알겠나? 하지만 모일만한 구실이 있잖아.”

“그래서 언제 온다는데?”

“이틀 후”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스승님에게 달려가 일러바쳤더니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그것참 기대가 되는구나.”

전의를 불태우신다. 왕국의 7성 이상 기사가 모두 모일 수 있는 자리와 기회가 흔한 것이 아니다. 스승님에게는 처음 있는 자리다 보니 상당히 기대되시는 모양이다. 이분은 뼛속부터 무인인 양반이니까.

스승님이 이렇게 나오니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이럴 땐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싸운다고 해도 부셔 먹은 것 정도는 알아서 고쳐주겠지.

높은 양반들끼리 싸우는 것이야 집이 좀 부서지면 끝나는 일인데 이 왕자는 왜 오는 것일까? 이 왕자와 출장을 가게 된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로 정보를 조금 더 수집해봤는데 평소에 정치나 행정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기사로서 조금 소양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것도 대단한 수준은 아니라고 했었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완벽한 후계자인 형이 있다면 힘이 없는 둘째 왕자는 숙청의 대상이 되고는 한다. 그런데 갑자기 왕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인 자리에 의도적으로 참석을 한다?

물론 국왕이나 왕세자가 묵인했으니 오는 것이겠지만 순수한 의도는 아닐 것이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너무 많이 봐서 인간 불신이 고질병인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밤에는 조금 망가진 닭장의 수리가 끝나 지구에서 즐겁게 놀고 있던 꼬꼬들을 붙잡아 원래 보금자리로 돌려보냈다.

갑자기 사라진 닭들을 스테이시가 얼마나 찾아대는지 온종일 시달려야만 했다. 이제 복귀시켰으니 잔소리가 사라질 터였다.

“조금 커졌나?”

지구에서 잡은 닭들을 닭장으로 돌려놓는데 약간 커진 느낌이 든다. 설마 지구에서 겨우 하루 있었다고 갑자기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닭들을 돌려놓은 뒤 태백시를 돌며 챙길 수 있는 것을 챙겼다. 완전한 폐허나 다름없어서 챙길 수 있는 것이 많진 않았지만 뭔가 지구의 도시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공벌레들도 한번 살펴봤더니 여전히 열심히 아귀의 시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도 워낙 잘 먹어서 그런지 크기가 좀 커진 것 같다.

공벌레들을 확인하고 난 후 근처의 편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연공을 시작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다 보니 지구에서 연공을 빼먹은 것이 꽤 되었다.

연공에 들어가니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느낌이 새롭다. 마나를 받아들여 몸 안의 길을 거쳐 오러홀로 인도해 변환시키고 순환시킨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작업이다. 그런데 단지 새롭다는 느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오러가 순환하는 속도가 달라졌다. 이것은 느낌이 아니라 확신이다. 어제의 성장 이후 달라진 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었나보다.

평소보다 오러의 회전 속도가 두배는 족히 넘는 느낌이다.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러의 회전이 빨라진 것이 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것을 통제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빨라진 만큼 오러를 제어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마에서 땀이 절로 흐르기 시작한다. 무협지에서는 이러다가 임독양맥을 타통한다느니 생사현관을 타통한다느니 나오던데 스승님에게 물어보니 그런 것은 없다고 한다.

대신 오러의 길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더 속도를 내기 좋은 고속도로로 바뀌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내 운전 실력도 좋아지고 있었다.

오러를 통제하는 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쯤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연공을 끝마쳤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하늘을 보니 멀리서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밤을 새운 것이다.

옷이 흥건할 정도로 땀을 잔뜩 흘렸다. 이것도 혹시 무협지처럼 노폐물을 배출해서 냄새나는 땀이 나온 것이 아닌가 했는데 그냥 땀이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씻고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침부터 방으로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전에 암테일 영지의 기사가 되는 것을 원했던 철권단의 크리스 힝켈과 오스마르 바르트였다.

“괜히 아침부터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마음을 정했나?”

“네, 이제 완전히 정했습니다. 집에서도 허락받았고요.”

가문의 허락을 받았다는 것은 의외였다.

“영지로 가준다면야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야.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

이곳에 남아 스승님의 지도를 더 받아 빨리 4성 기사가 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이득일 것이다.

“오히려 그곳에서 더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금방 내린 결정도 아니고 나름 고심해서 내린 결정이니까. 그것을 존중해줘야 한다.

“영지로 내려가는 편의를 봐주도록 할게.”

“감사합니다.”

집사에게 말해서 기차표 정도는 끊어줘야 하지 않겠나. 이미 마탑의 경매에서 얻은 돈을 영지로 보냈고 행정관이 어마어마한 액수에 거의 기절할 뻔했다는 소식을 아버지가 전해왔었다. 거기에 이제 두 사람도 내려가면 영지가 한층 안정될 것이다.

그렇게 철권단의 졸업생이 두 명 추가되었고 송별회가 있었다. 당장 바로 내려가는 것은 아니기에 며칠 더 있어야 하겠지만 당장 내일 큰 행사가 있으니 행사에 묻히기 전에 바로 해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송별회를 마치자마자 저택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스승님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집사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나는 아이브 공주에게 부탁해 아이브 공주의 별궁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파견되어 큰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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