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손놈들
준비는 완벽하다. 아무리 거물들이라고 해도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다만 우리 집에 모이는 것은 단지 구실일 뿐 그들이 모인 목적이 뭐냐가 궁금할 뿐이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조급하진 않다.
언제 도착할지 말이나 해주면 좋을 텐데 아침부터 철권단까지 포함해서 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점심시간을 좀 앞둔 무렵 드디어 첫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마동차 십여대가 저택으로 줄줄이 들어섰다. 집에 남는 공간이 많아서 다행이다. 오늘 우리 집 방문자 신기록을 세울 것 같다.
마동차들이 거의 동시에 멈춰 서며 탑승자들이 절도 있게 하차했다. 그렇게 하차한 사람이 약 40명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전부 기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굉장히 깐깐하게 생긴 중년인이 내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딱 봐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오늘 우리 집에 오는 사람 중에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셋이지만 나이로 볼 때 왕자는 아니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둘인데 저 사람은 키가 큰 편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한명이다.
근위기사단장이자 7성 기사 지글러 아인워드 후작이다. 왕의 검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왕궁에 몇 번 방문했을 때 만났을 법도 한데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충!”
좌우로 도열한 기사들이 제식을 하며 경례를 했다. 최하 4성 이상의 기사들 40명이 모여 저러니 박력이 있고 멋있기는 한데 이게 무슨 쓸데없는 짓인가 싶다. 위력 시위라도 하는 건가?
기사들이 좌우로 도열해 만든 길 가운데로 지글러 후작이 걸어왔다. 그 뒤를 젊은 기사 한명이 따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스승님이 앞으로 나서서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지글러 아인워드 후작 오랜만이오.”
“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공무가 바빠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늦게나마 축하드립니다. 노엘 브라스 백작님”
스승님과는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인가? 스승님의 경력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예전과 지금은 천지 차이일 것이다.
예전에 스승님은 그저 공작가의 기사였고 평생 벽을 넘지 못한 6성 기사였지만 이제는 지글러 후작과 동급인 7성 기사이고 백작이다.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훈훈했지만 미묘하게 둘 사이에 느껴지는 신경전이 있었다.
“이쪽은 내 제자 빅터 하네스라오.”
스승님이 먼저 나를 소개해주었다.
“안녕하십니까. 후작님 빅터 하네스라고 합니다.”
“자네가 그 소문이 자자한 천재인가? 직접 보니 오히려 소문이 모자라군.”
“과찬이십니다.”
지글러 후작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하기야 나도 근위 기사단에 들어갈 가능성이 열려있으니까.
“이쪽은 제자인 쿠프 리스타라고 합니다.”
쿠프 리스타는 20대 중반의 기사였다. 경지는 대략 5성 정도로 느껴졌다. 충분히 뛰어난 기사다. 내 주위에 이상하게 괴물들이 있을 뿐이다.
“노엘 브라스 백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쿠프 리스타는 얼핏 보기엔 지글러 후작보다 오히려 스승님과 성향이 비슷해 보였다. 뼛속까지 기사인 바른 생활 사나이 같은 느낌이다.
쿠프 리스타와 나는 눈빛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어차피 잠시 후에는 어른들만 따로 모일 것이고 어린이들끼리 자연스럽게 모일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럼 먼저 자리를 잡으시지요.”
스승님이 지글러 후작을 막 안내하려는 찰나 또다시 십여대의 마동차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예를 취하고 있던 근위 기사단이 물러나자 그 자리를 새로 들어온 마동차에서 내린 기사들이 메웠다.
이번에 내린 기사들은 조금 전에 봤던 근위 기사단과는 완전히 느낌이 다르다. 일단 허리에 찬 무기가 검이 아니라 도끼와 둔기 등이 섞여 있었고 기사들이 하나 같이 덩치가 크다. 딱 봐도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알 수 있었다.
“북부를 위하여!”
이번 기사들도 똑같은 짓을 한다. 왜 우리 집에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지? 옆을 보니 마중을 나와 있던 자칼이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최소한 북부에 정상인은 한명 있었다. 아니 자칼이 정상인으로 보이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마동차에서 내렸다. 애초에 그 마동차만 주문 제작한 것인지 크기가 달랐다.
북부의 호랑이 올라프 에르하트 후작이다. 1킬로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칼의 누나인 비올라도 정말 덩치가 컸지만, 이 사람은 거대했다. 순수한 인간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다.
“여!”
차에서 내리자마자 올라프 후작이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정확히는 지글러 후작을 향한 인사였다.
“저 빌어먹을 덩치 놈이”
지글러 후작이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마 나만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더니 지글러 후작과 올라프 후작이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올라프 후작이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우리 앞에 섰다. 가까이에서 마주 보자 정말 크다. 사람이 아니라 중형 마수를 마주한 느낌이다. 그 정도로 거친 느낌이 전해져왔다.
“처음 뵙겠소. 올라프 에르하트라고 하오. 아들이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노엘 브라스라고 합니다.”
스승님과 인사를 나눈 올라프 후작은 덩치만큼이나 큰 부리부리한 눈으로 자칼을 내려보았다. 자칼은 아버지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그렇지 않아도 소심하게 움츠려있던 어깨가 더욱 쪼그라들었다.
그 모습을 본 올라프 후작의 얼굴에 조금 못마땅한 기색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잘했다.”
그 말과 함께 솥뚜껑만한 두꺼운 손이 자칼의 어깨 위에 올려졌다. 자칼의 고개가 들렸다.
“가, 감사합니다.”
떨리는 자칼의 음성에는 측정할 수 없는 기쁨이 담겨 있었다.
올라프 후작의 손이 거두어지고 올라프 후작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시선만으로도 느껴지는 기세가 얼마나 거친지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자칼이 저렇게 된 이유를 단번에 이해했다. 멀쩡한 사람도 저런 시선을 매일 받는다고 하면 자칼처럼 될 것 같았다. 자칼은 단지 시선만이 아니었을 거다.
불같은 시선으로 나를 내려보던 올라프 후작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고개를 한번 끄덕하더니 지글러 후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순간 둘 사이에서 강력한 기세가 터져 나왔다.
“읍”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세를 가까이에서 받은 지글러 후작의 제자 쿠프 리스타가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봤나?”
올라프 후작이 이죽거리며 지글러 후작을 마치 깔보듯이 내려다봤다. 지글러 후작은 기사치고는 덩치가 작은 편이다 보니 엄청나게 비교가 되었다.
“뭘 말이냐?”
하지만 기세로는 밀리지 않았다.
“내 아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아들 자랑이었다.
“봤지. 이제 좀 사람 구실을 하겠더군.”
지글러 후작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하자 둘 사이에서 충돌하던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이러다 진짜 싸우진 않겠지?
“허허, 두 분 다 조금 참으시지요.”
스승님이 중간으로 한 발짝 나서며 두 사람의 기세를 자연스럽게 흩어놓으셨다. 역시 오러의 운용으로는 왕국 최고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두 후작이 모두 놀랐다는 눈으로 스승님을 바라보았다. 승급이 늦었다고 스승님이 자신들보다 아래로 여겨졌던 것일까?
“흠, 실례했습니다.”
“자중하지요.”
두 후작이 기세를 죽이며 떨어지자 잔뜩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그런데도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양측 기사단은 서로를 노려보며 무기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기사까지 있었다.
그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생겼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익숙한 비행체가 보인다. 나도 한번 타봤던 공작가의 비행선이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같은 왕도에 살면서 비행선을 타고 오는 경우는 또 뭔지 모르겠다.
하늘 위에서 멈춘 비행선의 문이 열리더니 사람이 하나 떨어진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일부 군중이 소리를 질렀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좋아진 시력 덕분에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봤기 때문이다.
“슬라이트, 너희 아버지 오신다.”
“어이구야. 왜 저러시는 거야.”
슬쩍 알려주자 뻔뻔하기 짝이 없는 슬라이트도 이번만은 앓는 소리를 낸다.
그리 높지 않다고 해도 100미터 이상의 높이로 비행하고 있던 비행선에서 그대로 뛰어내린 에인프라흐 공작이 굉음을 내며 연무장에 멋진 히어로 랜딩을 하는 것을 조금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던 공작의 몸이 급격히 속도를 줄이며 허공에 멈춰섰다. 저게 그 무협지에 나오는 허공답보인가 그거인가?
“안녕들하신가?”
에인프라흐 공작이 지면에 사뿐히 내려서며 자연스럽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했지만 그야말로 묘기에 가까운 기예였다.
과연 이것이 8성 기사라는 느낌을 주는 실력 행사였다. 공작의 실력 행사에 질린 사람들이 누구도 공작의 인사에 답하지 못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오직 스승님만이 자연스럽게 나서서 공작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몇십년을 옆에서 보좌했던 사람인데 저 정도는 몇 번 본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제 한 사람, 아니 올 사람이 두 명 남았는데 설마 마탑주도 이런 쇼를 하지는 않겠지?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이 하늘을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스테이시를 슬쩍 보니 스테이시는 일부러 다른 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로써 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최소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 다들 잘 지냈나?”
마탑에서 마법사들이 날아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공작이 후작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후작들은 좀 전의 기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풀 죽어서 공작과 인사를 나눴다.
마법사들보다 먼저 공작가의 비행선이 먼저 착륙했다. 그곳에서는 의외로 단 한명만이 하선했는데 왕세자와 느낌이 비슷한 중년인이었다.
“우리 큰형님이다.”
슬라이트가 슬쩍 알려주었다. 공작가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수완가이고 정치인이며 에인프라흐 공작만큼이나 높게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다.
공작이 한쪽에서 후작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 슬라이트의 큰형인 슬레이프 에인프라흐 백작은 스승님에게 목례한 뒤 곧장 우리에게 왔다.
“장하다. 내 동생”
슬라이트 덥석 끌어안으며 등을 두드려주는 모습은 형과 동생이 아닌 마치 부자 관계를 보는 듯 했다. 막냇동생과 해후를 짧게 나눈 슬레이프 백작은 나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동생을 잘 돌봐줘서 늘 감사하고 있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항상 신세 지고 있습니다.”
사실 알게 모르게 슬레이프 백작에게는 신세 진 일이 꽤 많다. 그런데 악수를 하는 손으로 무언가가 전해져왔다.
굳이 눈으로 확인해보지 않아도 슬레이프 백작이 몰래 무언가를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슬레이프 백작은 내 대응을 보더니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혼자 있을 때 보도록 하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새삼 왕세자와 정말 비슷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사람 위에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슬라이트에게 가문을 물려주려고 한다고? 직접 보니 슬라이트의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슬라이트는 확실히 검술의 천재이고 알고 보면 그리 나쁜 놈은 아니지만, 지배자로서 자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녀석이다. 그것을 공작도 이 사람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슬레이프 백작이 내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에인프라흐 공작 쪽으로 이동할 때 마침내 마탑의 마법사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도착했다. 마탑주가 번쩍거리는 금색의 로브를 휘날리며 가장 앞에서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날아오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저 로브는 또 뭔지 모르겠다. 마탑주와 마법사들이 일제히 바닥에 착지할 때 마탑주를 따라왔던 마법사들이 하늘을 향해 마법을 발사했다.
일종의 불꽃놀이와 비슷한 효과를 가진 마법이 하늘로 쏘아져 하늘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였다. 옆을 보니 스테이시가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마구 때리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한동네 살면서도 자주 보기가 쉽지 않으이”
마탑주의 시선은 에인프라흐 공작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렇군. 나는 자네를 자주 안 봐서 좋았는데 말이야. 오늘도 기분이 좋았는데 말이야. 자네가 말을 시키는 순간부터 기분이 나빠지는군.”
공작이 저렇게 누군가를 대놓고 싫어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사이가 안 좋은 것이 두 후작만이 아니었던 건가? 공작과 마탑주가 싸우기 시작하면 이건 우리 집이 날아가는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이 양반들이 손님인 줄 알았더니 손놈이었다.
공작과 마탑주가 이를 드러내며 분위기가 험악해지며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은 스승님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지 난감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스승님이 나서기엔 이쪽은 급수가 좀 높다.
그때, 마치 이 상황을 구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흰색의 마동차 수십 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차에서 내린 관료 복장의 사람이 오늘 마지막 등장인물을 알렸다.
“크레이브 라이브러쉬 왕자님 행차하십니다.”
호위 기사와 수행 인원들이 절도있게 차에서 내려 예를 갖추자 마지막으로 둘째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에서 천천히 내리는 둘째 왕자를 보고 내가 느낀 첫인상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다.
늑대, 마치 한 마리 늑대 같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