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라이브러쉬의 전력
둘째 왕자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사람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화성시에서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때만 해도 대격변의 초기라서 생존자들이 많이 있을 때였다.
그때는 사람만을 노리는 약탈자도 많았다. 그런 약탈자 중에서 독보적인 인물이 있었다. 일명 독사라고 불리는 약탈자였는데 다른 약탈자와 달리 조직을 구성하지 않고 혼자 활동하는 사람이었다.
독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 이 사람도 무척 지독한 사람이었다. 모든 것이 뒤집힌 세상에서 혼자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그랬다.
소문으로는 교도소에서 탈출한 살인범이라는 말도 있었고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말도 있었다. 물론 모두 소문일 뿐으로 마지막까지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독사는 약탈 대상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냥 자신의 행동반경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그것이 어린 소녀이거나 무장을 잔뜩 하고 있는 다른 약탈자 무리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한번은 멀리서 독사가 싸우는 것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상대는 7명쯤 되는 다른 약탈자 무리였는데 독사는 정말 잘 싸우는 사람이었다. 싸우기 위해 태어난 기계처럼 움직였고 악귀처럼 덤벼들었다. 독사도 상처를 제법 입었으나 약탈자 7명은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었다.
당시의 나에게는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나도 독사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다른 약탈자들과 대형 쉘터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독사는 꽤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대격변 이후의 세상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독사가 사람에게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독사라면 변이체에게도 악귀처럼 달려들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독사에게 풍겼던 느낌이 지금 눈앞에 있는 둘째 왕자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생긴 것이 험악하거나 한 것이 아니다. 왕세자처럼 과한 미남은 아닐지라도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다.
이런 사람이 진짜 위험한 사람이다. 자신의 날카로운 송곳니를 어떻게 감추고 있는지는 몰라도 기회만 찾아온다면 언젠가 드러낼 사람이다.
그리고 저런 부류의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지 못한다. 동료나 친구는 필요 없다. 자신의 명령에 무조건 따를 하수인이 필요할 뿐이다.
“먼저들 오셨었군요. 늦어서 미안합니다.”
둘째 왕자의 목소리는 느낌과 다르게 상당한 미성이었다. 하지만 당당했다. 먼저 도착했던 거물들이 왕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다지 곱지 않다.
단순히 망나니라서? 앞으로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없는 둘째 왕자라서? 아니다. 내가 만나본 거물들이 그런 것으로 이런 반응을 보일 것 같지 않다. 아마도 나와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에인프라흐 공작을 시작으로 거물들이 왕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으로 스승님이 인사를 나눈 후 사람들을 안내하기 시작하셨다.
“그럼 일단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안으로 드실까요? 대단하진 않지만 드실 만 할 겁니다.”
“그건 내가 보장할 수 있지.”
스승님의 말을 에인프라흐 공작이 거들었다. 거물들과 그 외에 관계자들이 우르르 이동하기 시작했다. 내가 밖에 남아있는 수행 인원들이 신경 쓰여 잠시 머뭇거리자 슬라이트가 와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도 익숙해져야 한다.”
난 아직 귀족의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한 모양이다. 어쩌면 평생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일단 저택의 경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여기 있는 기사들과 마법사들만 가지고도 전쟁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어쨌든 이 집의 주인은 나인지라 빠르게 걸음을 옮겨 스승님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뭔가 많이 준비하는 것 같더구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스승님이 작은 소리로 물으셨다. 오늘 내가 준비한 것은 아직 스승님에게도 비밀이었다.
비장의 무기가 준비되어 있다. 왕족이나 대귀족이 어떤 식사를 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따라 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오늘 나올 요리의 맛은 어디에서도 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름 여유 있게 지은 식당이지만 거물들이 들어서자 기분 탓인지 몰라도 꽉 찬 느낌이 든다.
“의자가 너무 작군”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올라프 후작이 앉지 못하고 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절대 의자가 작은 것이 아니다. 저 사람이 너무 큰 탓이다.
다행스럽게도 눈치 빠른 집사가 재빨리 다른 의자를 하나 더 가져와 의자 두 개를 붙였다.
“죄송합니다. 준비된 의자가 없으니 이것으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핫하! 신경 쓰지 말도록 이런 일은 자주 있으니까. 익숙하네.”
내가 나서서 사과하자 올라프 후작은 호탕하게 웃으며 의자 하나에 엉덩이 한 쪽씩을 올리며 앉았다. 그래도 의자 둘이 힘겨워한다. 이 사람은 정말 순수한 인간일까?
“무식하게 덩치만 커서는”
앞에 앉은 지글러 후작이 한소리를 하자 올라프 후작이 다시 후끈 달아올랐다.
“너는 조금 후에 손을 봐주도록 하지.”
“가능할까? 지난번처럼 울지나 마라”
둘이 야수들처럼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니 꼭 사이가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하고 있지만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이가 지나치게 좋은 것이 아닐까?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집사와 고용인들이 재빨리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전채 요리로는 간단한 과일과 수프를 준비했다.
분명 평범하기 짝이 없는 구성의 요리다. 그러나 수프를 한 숟갈 떠먹는 순간 미묘한 소리들이 나기 시작했다.
“음?”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의외로 둘째 왕자 크레이브였다. 그리고 연이어서 반응이 나타났다.
“오?”
“흐음?”
두 후작이 반응하고 지켜보던 스승님과 에인프라흐 공작도 수프를 떠서 입에 넣더니 표정이 변했다.
“이것은 평소 먹던 것과 맛이 다르구나?”
그럴 수밖에요. 비장의 수단인 고향의 맛을 사용했으니까요. MSG의 위력을 느껴보시지요.
지난밤에 마사와 힐마에게 고향의 맛을 좀 덜어주고 이것을 이용한 요리를 만들어보라고 했다. 뛰어난 요리사인 마사는 고향의 맛에 금방 적응했다. 대체 이것이 뭐냐고 몇번이나 물어왔지만 아주 비싼 마법의 가루라고만 알려줬다. 사실 돈 주고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니 비싼 가루인 것은 맞다.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내가 겸손하게 대답하자. 여러 사람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요리에도 이런 조예가 있을 줄은 몰랐네.”
지글러 후작을 시작으로
“이 수프의 레시피를 알려줄 수 있겠나?”
마탑주는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을 했고
“미묘하게 당기는 맛이로군.”
이미 그릇을 비운 둘째 왕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프의 맛을 인정했다. 누구보다 좋은 것을 많이 먹어봤을 왕자가 인정하는 것을 보면 고향의 맛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전채 요리가 나왔으니 이제 본 게임에 들어갈 차례다. 우리 집에서 내놓을만한 요리라면 다른 것이 있겠는가? 몇 가지 다른 요리와 함께 각종 치킨이 식탁 위에 놓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소문의 닭요리로군?”
멀리서 살아서 그런지 아직 치킨을 맛볼 기회가 없었던 올라프 후작이 입맛을 다시며 크게 한접시를 덜어 가져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들 치킨을 먹은 적이 있는지 크게 기대하지 않고 덜어가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다들 표정이 달라졌다.
“이건 전에 먹었던 것과 맛이 다르군?”
“저도 하도 소문이 자자해서 먹어봤었는데 이곳과는 차원이 다르군요. 역시 원조는 다르군요.”
왕자와 지글러 후작이 감탄할 때 이미 올라프 후작은 말도 안 하고 치킨을 흡입하듯이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나는 집사에게 얼른 더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것도 평소와 맛이 다르구나?”
“전에 먹었던 것과 다르군! 뭔가 다른 비법이 생겼나?”
스승님과 공작도 한마디를 보탰고 거물들의 곁에 있느라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지만 같이 식사를 하고 있는 슬라이트와 자칼, 스테이시 그리고 슬라이트의 큰 형 슬레이프와 지글러 후작의 제자인 쿠프까지 재빨리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더 준비하라고 미리 주문했는데도 워낙 사라지는 속도가 빠르다 보니 금방 치킨이 동이 났고 그러자 나머지 음식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반응은 비슷했다. 모두 고향의 맛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내가 평소에는 이렇지 않은데 요리가 계속 들어가는군.”
왕자가 감탄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킨이 다시 대량으로 만들어져 배달이 되어오자 말 없는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역시 사람은 먹을 것을 입에 물려줘야 조용해지는 법이다. 모두가 양껏 치킨을 흡입한 뒤 후식으로 과일빙수를 내왔다. 지구에서 먹던 그 빙수와 같지는 않지만, 빙수라는 것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들은 매우 즐거워했다.
일단 식사 대접은 매우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왕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두 모여 머리를 박고 치킨을 뜯어 먹는 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럼 배도 부르고 하니 우리 밖으로 나가지요? 차는 그쪽으로 내어주게”
공작이 무슨 속셈인지 일행을 모두 밖으로 이끌었다. 둘째 왕자도 아무 말 없이 따르는 것이 뜻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는 느낌이다.
그런데 옆의 슬라이트를 비롯한 어린이 그룹을 보니 모두 비슷한 반응이다. 이럴 땐 확실히 나이가 깡패라는 것을 느꼈다.
아직 몸이 너무 어리다. 중요한 일에 끼워주지 않으니 정보의 유입이 느리다. 어떻게 해결할 수도 없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모두 밖으로 나가 연무장 근처의 야외에 자리를 잡고 차가 배달되어 나오자. 어느 순간 주위의 소리가 차단되었다. 이것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에인프라흐 공작뿐이다.
“그럼 이제 본론을 이야기해봅시다.”
소리가 차단되자 입을 연 것은 왕자였다.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제국의 유산 공략에 제멜아크 왕국이 실패한듯합니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왕자에게 보고하듯이 말했다.
“그것 우리와 함께 시작하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랬었지요. 그런데 욕심이 생겼나 봅니다. 정보를 수집한다는 이유로 선발대를 투입했는데 그 규모가 선발대가 아닌 본진과 비슷한 규모였다고 합니다.”
역시 사람이란 건 믿을 수가 없다. 더욱이 국가 간의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피해는 얼마나 된다고 합니까?”
“300명이 들어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전멸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것은 잘 됐군.”
왕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반응이지만 느낌이 다르다. 왕자는 정말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희도 제국의 유산 공략에 참여하는 인원과 방식을 좀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버림패로는 안된다는 말인가?”
크레이브 왕자가 툭 뱉은 말에 주위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하지 못했던 것을 너무 쉽게 말했기 때문이다.
“오해십니다. 여기 빅터 하네스나 제 막내아들을 포함해 모두 왕국의 뛰어난 인재였습니다. 하물며 왕자님이 버리는 패라니요.”
에인프라흐 공작이 열심히 수습하려고 했지만, 왕자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망나니 소리를 들을만하긴 하다.
“저 두사람이야 오늘 보니 확실히 뛰어난 인재더군. 그런데 난 아니지 않소? 어차피 다 아는 얘기이니 그렇게 둘러댈 것 없습니다.”
“흠흠, 다음은 지글러 후작이 하게나”
에인프라흐 공작이 헛기침하며 물러나자 지글러 후작이 일어서서 말을 이어갔다.
“폐하께서도 이 일에 대단히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명을 내리셨습니다. 흠흠!”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라”
지글러 후작이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자 올라프 후작이 곧바로 항의했다. 그러자 지글러 후작은 올라프 후작을 죽일 듯이 한번 노려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라이브러쉬 왕국의 전력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