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05화 (105/206)

105. 저택의 위기

아니 그런 중요한 문제를 왜 우리 집에서 논의하는 거지?

다른 것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마침 모일 구실이 생긴 것은 알겠는데 국왕의 의중을 전하느니 그냥 왕궁에서 회의하면 되잖아?

“그럼 나는 제외되는 건가?”

왕자가 그런 것은 관심 없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기존 인원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추가되는 인원이 있을 뿐이죠.”

왕자의 태도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지글러 후작이 설명을 해줬다.

나도 잘하면 빠질 수 있겠다는 희망 회로를 잠시 돌렸었는데 바로 차단당했다.

“폐하께서 전력을 보여주라 하셨으니 역시 내가 가야겠군.”

에인프라흐 공작이 나서려 하자 바로 옆에 앉아있던 큰아들 슬레이프 백작이 차단에 나섰다.

“아버지는 지금 할 일이 많으십니다. 그리고 가실 수 없는 다른 이유도 있지 않으십니까?”

“아니 그거야 뭐 네가 해도 되는 일 아니더냐?”

“원래 아버지의 일입니다.”

낮게 깔리는 슬레이프 백작의 목소리에서 수십 년간 아버지의 일을 대신 해온 아들의 한이 느껴지고 있었다.

다른 이유라면 아마도 마신교가 아닐까? 교주의 행방이 묘연한 지금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에인프라흐 공작이 물러나자 이번엔 올라프 후작이 나섰다.

“하하! 그렇다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군. ”

호탕하게 웃으며 나선 올라프 후작이었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럼 북부는 누가 지키나?”

아들에 의해 뜻이 좌절된 에인프라흐 공작이 뾰로통하게 쏘아붙였다.

“제가 없어도 충분히 잘 돌아갑니다. 별 사고도 없지 않습니까?”

“그건 자네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애초에 그곳은 사고가 한 번이라도 나면 안 되는 곳이네.”

분노한 엘프 여왕이 나선다면 그것은 재앙이다. 차라리 제멜아크 왕국과 전쟁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공작님의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불온 세력이 엘프 숲을 노리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뭣이? 어떤 씹어먹을 놈들이 북부를 노린단 말이야?”

지글러 후작도 공작의 말에 동의했다. 이것은 올라프 후작도 몰랐던 정보였던 듯 하다.

“엘프 해방단이라는 미친놈들이 기억나나? 그놈들이 요즘 다시 결성해서 움직인다는 정보가 있다.”

“그건 네가 처리했어야 되는 문제 아니냐?”

엘프 해방단은 또 처음 들어보는 단체다.

“내가 너처럼 한가한 사람인 줄 아냐? 너처럼 북부에서 놀고 먹는 게 아니라 왕국 전체를 관리해야 하는 몸이다.”

“말로만 관리한다고 하지 뭘 제대로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싸우자는 거냐?”

“오냐, 오랜만에 자웅을 겨뤄보자.”

이내 지글러 후작과 올라프 후작이 치고받을 것처럼 서로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여태까지 조용히 있던 마탑주가 나섰다.

“그럼 제가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마탑주께서요?”

“그렇지요. 저는 딱히 누구를 지킬 필요도 없고 맡은 일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번에도 에인프라흐 공작이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탑주는 왕국 소속이 아니지 않소?”

“그게 문제가 됩니까? 저도 제국의 유산에 관심이 많습니다.”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소이다. 그때 탑주는 나설 수 없지 않습니까?”

공작의 말이 맞다. 마탑은 국가의 소속이 아니다.

“하지만 참여하는 것은 문제가 없겠지요?”

“그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엔 지글러 후작이었다.

“또 뭐가 문제입니까?”

“만약 우리가 제국의 유산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배분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마탑은 그것을 포기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탑주께서 나서시면 제멜아크의 마탑도 참여하게 될 겁니다.”

마탑주는 입을 다물었다. 이권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제멜아크의 마탑과 경쟁하게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이 사람도 안 되고 저 사람도 안되고 왕국의 전력을 어떻게 보여주겠다는 거지?

“아! 뭐가 그리 복잡해! 그렇게 따지면 지글러 너도 안될 것 아니냐? 그럼 결국 노엘 백작님에게 다 떠넘기겠다는 소리 아니냐?”

내 생각을 올라프 후작이 대변해주었다. 스승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표정이 좋지 않으셨다. 뼛속까지 기사인 양반이라 해도 바보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모두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이지 않나?”

에인프라흐 공작이 조금 거칠어진 분위기를 가라앉히며 나섰다.

“그래 노엘 자네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공작이 스승님에게 묻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제가 가야 할 일이라면 가야지요. 하지만 빅터도 가기로 확정된 상태에서 저까지 가야 한다면 그것은 조금 어긋난 처사가 아닌가 합니다. 저도 그렇고 빅터도 나라의 녹을 먹는 처지는 아니지 않습니까?”

역시 스승님이다. 한마디로 뭘 내놓으라는 말이다. 나에게 답을 내라고 해도 스승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도 여러 가지 이유로 참가는 불가합니다. 그러나 근위 기사단에서 정예 30명을 차출하도록 하지요.”

지글러 후작이 먼저 제안했다. 근위 기사단 30명이라... 확실히 대단한 전력이다. 하지만 스승님이 말씀하신 건 저런 것이 아닐 것이다.

“젠장, 내가 가고 싶었는데! 그럼 우리 북부에서도 기사 30명을 내놓겠소. 그리고 우리 자칼도 데려가시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호명된 자칼이 고개를 번쩍 들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자다가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뭐라고 하고 싶은 말은 많은 것 같지만 소심한 자칼이 이런 자리에서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그럼 우리 마탑에서도 마법사 30명과 스테이시를 보내겠소.”

마탑주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제멜아크 마탑과 관계는 괜찮겠소?”

“그쪽은 제가 알아서 처리해보도록 하지요.”

마탑주가 직접 나서는 것도 아니고 저쪽 마탑과도 합의를 보겠다고 하니 막을 명분이 없었다.

“에인프라흐 공작가에서도 기사 30명과 오갈 수 있는 비행선 그리고 경비 일체를 제공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슬레이프 백작이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에게 의미가 없다. 정예 기사 90명에 마법사 30명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외에 왕실에서도 지원이 있을 겁니다.”

지글러 후작이 스승님의 눈치를 보며 사족을 붙였다. 그러나 스승님의 표정은 풀리지 않고 있었다. 내 심정과 같을 것이다.

“나는 그렇다 치고 직접 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빅터, 네 생각은 어떠냐?”

스승님이 폭탄 돌리기를 시전하셨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던 바다.

“제멜아크 왕국은 300명이 들어가서도 실패했다고 하셨지요? 그것도 상당한 정예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런데 실패했지요.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고요. 그런 위험한 일에 참여하는데 보상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스승님의 말마따나 저와 스승님은 왕국에서 녹봉을 받는 처지도 아닌데 말입니다.”

지글러 후작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완전한 왕실의 편은 지글러 후작 하나밖에 없다.

지글러 후작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처음 이후로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둘째 왕자였다. 내 발언에 왕자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걸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폐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계시네 일이 끝나고 나면 충분한 보상을 내리실 것이네.”

나중에 말이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믿나? 난 기본적으로 인간 불신을 가지고 있지만 보통 사람도 정치인을 믿지는 않는다.

지글러 후작이 기세를 끌어올리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표정으로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정도에 주눅이 들 내가 아니다.

“폐하를 믿지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그걸 미리 확정해서 답을 주셨으면 합니다만 저와 스승님뿐만 아니고 다른 참가자들 몫까지요.”

순간 여러 명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조용히 있던 둘째 왕자가 입을 열었다.

“빅터 하네스라고 했던가? 저자의 말이 사리에 맞다. 거기에 내 몫도 좀 약속받았으면 좋겠군.”

너는 녹봉을 받다 못해 세금으로 먹고사는 몸 아니냐? 너는 공짜라고 해도 가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원사격은 고마웠다.

왕자까지 그렇게 말하자 지글러 후작은 후퇴할 곳이 없었다. 같은 편이어야 할 왕자가 적이 된 것이다. 어쩌면 망나니 왕자를 이곳에 부른 것부터가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것은 폐하와 상의를 해보도록 하지요.”

지글러 후작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생각했던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참고로 말씀드리는데 마땅한 보상이 없으면 저는 불참도 고려하겠습니다.”

쐐기를 박았다. 조금 선을 넘은 느낌도 있긴 한데 왕실이 시키는 일을 무조건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인 줄 아는 법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다.

“그것은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행히도 스승님이 편을 들어주셨다. 이래서 스승을 잘 만나야 하는 법이다.

“그래도 시간이 더 생겼으니 다행이지 않소? 제멜아크도 실패를 감추기 위해 준비를 더욱 단단히 할 테니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이번에는 반드시 우리를 부르겠지. 우리 앞에서 자신들의 성공을 뽐내야 목적을 이루는 것일 테니까.”

에인프라흐 공작도 나를 도와주었다. 지글러 후작이 반쯤 포기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동부 사막은 진짜 어떻게 된 겁니까?”

올라프 후작이 화제를 돌렸다.

“사라졌다고 하네 지금 그곳은 바다가 되었지.”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건 우리도 모르지. 아니 세상 누구도 모를 것이네. 초월자도 그런 일은 불가능하니까 말이야. 다만 가능하다면... 음”

공작이 마지막 말을 아꼈다. 공작이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신의 힘. 하지만 지금 대륙에서 신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다.

“그보다는 거기 마신이 있었던 것이 문제 아닌가?

둘째 왕자가 또 폭탄을 터트렸다. 확실히 이 자식은 망나니가 맞다. 저 정도면 일부러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신교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난감할 표정을 지었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젊은 사람들만 귀를 쫑긋 세웠다.

“그도 자취를 감추어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답은 마탑주가 해주었다.

“마신쯤 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최대한 회피하려고 했지만, 왕자는 집요했다.

“만약에 말이야. 제멜아크와 그쪽이 한통속이라서 짜고 그런 일을 벌인 거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모두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왕자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기대되는데? 그랬으면 좋겠어.”

“왕자님 말씀을 삼가십시오.”

듣다 못한 지글러 후작이 한마디 하자 왕자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나는 첫인상으로 왕자가 독사와 비슷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인간은 독사와 같은 고고한 늑대 같은 것이 아니다. 늑대의 탈을 쓴 괴물인 것이다.

대격변이 시작되자 얼굴에 가면을 쓰고 살아왔던 일부 사람들은 가면을 벗기 시작했다.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쓰고 자신의 본성을 감추고 있던 괴물들은 대격변과 함께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미친놈들이 세상에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변이체보다 더 위험한 것이 이 괴물들이었다.

변이체는 피하고 막으면 된다. 하지만 이 괴물들은 정상인의 연기를 하며 쉘터에 가입한다. 그 후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쉘터가 무척 많았다. 웃긴 것은 그런 괴물들을 사냥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놈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친놈들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둘째 왕자의 꺼낸 말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파견되는 인원들은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럼 얘기도 끝난 것 같고 오랜만에 우리 한바탕해볼까?”

“질질 짤 준비나 해라.”

올라프 후작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지글러 후작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지글러 후작이 눈을 빛내며 일어섰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그럼 우리는 다음 차례구려”

“기대하고 있습니다. 새로 개발한 마법이 많거든요.”

에인프라흐 공작과 마탑주도 갑자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 우리 집이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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