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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06화 (106/206)

106. 천재들을 위한 선물

아니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하려고 정해져 있던 느낌이다.

내가 그런 심증을 가지고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에인프라흐 공작이 옆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역시 자네는 감이 좋군. 뭔가 이상한가?”

“네, 정해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느낌이네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짐작한 것이 맞네.”

역시 그렇다. 스승님을 보니 스승님의 반응은 미묘하다.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지만, 자세히는 모르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와 공작의 대화에 집중하고 계셨다.

“우리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얘기는 들었나?”

“예,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듣긴 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저기 지글러 후작과 올라프 후작이 그렇고 나와 마탑주가 그렇다고 알려져 있지.”

그럼 사실은 아니라는 얘기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지글러 후작과 올라프 후작은 서로 날을 세우면서도 살기가 없었다.

“실제로는 아니라는 얘기군요.”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저기 둘은 사실 매우 사이가 좋네.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자 좋은 경쟁 상대였지.”

“그럼 공작님과 마탑주님은요? 두 분은 딱히 접점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대답은 마탑주에게서 나왔다.

“우린 서로 합의를 봤다네”

대외적으로 일부러 사이가 안 좋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이유에 대해 굳이 질문할 생각은 없었다. 제멜아크나 혹은 다른 단체를 속이려고 하는 위장일 것이 뻔하니까. 중요한 것은 이 생각의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폐하의 의중입니까?”

가장 유력한 후보는 역시 왕실 정확히는 국왕이다.

“아니, 그건 아닐세 우리끼리 합의를 보고 나중에 폐하께 보고를 드렸지.”

국왕의 뜻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이라고 한다. 단순히 제멜아크 왕국을 속이려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제멜아크 왕국 외에 그렇게 보이시려고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제멜아크 왕국도 강대한 나라라네 정보력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지.”

엘프 왕국을 제외한다면 인간세계를 반으로 양분해서 지배하고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라이브러쉬 왕국과 제멜아크 왕국이다. 지금이야 나라가 둘 뿐이지만 제국이 통일하기 전까지는 수십 개의 나라로 나뉘어있던 드넓은 대륙이었다.

그런 거대한 대륙의 반을 지배하고 있는 곳이니 국력이야 말이 필요하지 않다. 더구나 이미 백 년 가까이 전쟁도 없었다. 힘을 잔뜩 축적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적을 속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다네.”

적을 속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아군을 속이는 것이 목적이라는 얘기다.

“그렇게까지 하실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 두 나라의 상태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가?”

“너무 범위가 넓어서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두 나라는 아주 오랫동안 전쟁이 없었지”

강대한 나라가 긴 국경을 맞대고 붙어있는 것치고는 작은 분쟁도 거의 없는 편이다.

마도 병기의 발전으로 물량 승부가 어려워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두 국가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기 때문이었다.

“두 나라 모두 엄청난 힘이 비축되어 있지요. 그리고 그것이 터지는 순간”

“엄청난 비극이 벌어지겠지.”

지구의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열심히 공부했던 내용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러면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전쟁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는 거군요?”

“그렇지. 모두 그렇게 뜻을 함께했네.”

국왕을 비롯해 최고 권력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피와 비명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구르는 것은 전생의 경험으로 충분하다.

왕국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7성 기사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주전론을 주장하는 인간들에게는 상극이나 다름없다. 어느 한쪽이 찬성한다고 해도 다른 쪽은 무조건 반대를 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귀족들이 여러 개의 파벌로 나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왕국의 힘이 집중되지 못하는 단점도 있겠지만 전쟁을 회피한다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확실하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지.”

“제멜아크 왕국이군요.”

동부의 사막이 날아갔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지만 라이브러쉬 왕국의 북부를 지키는 올라프 후작과 같이 그 경계를 지키는 많은 병력이 있었다.

그 병력이 할 일이 없어졌다. 그리고 제국의 유산에 정예 병력이 먹혔다. 얼핏 보면 균형을 맞춘 것 같기도 하지만 제멜아크 내부에 균열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은 두 국가 사이의 균형도 틀어졌다는 것이다.

“그렇지, 이해했나?”

“예,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슬라이트와 자칼, 스테이시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다른 둘은 그렇다 쳐도 슬라이트 너는 뭘 이해하기는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거냐?

“그래서 이번 참가가 중요한 것이네”

“하지만 그쪽에 우선권이 있지 않겠습니까?”

엄연히 제멜아크의 영토에 있는 던전이다. 우리를 불러들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공략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 우리는 단순히 선전 도구일 것이다.

“그쪽에서도 준비하겠지만 쉽지 않을 걸세. 나는 다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네.”

“우리 차례가 온다고 해도 공략이 쉬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이미 경험이 있다. 그것은 공략하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등불에 달려드는 불나방을 태워죽이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겠지, 제국의 유산이라는 것이 얼마나 극악한 곳인지는 우리도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리는 비장의 무기가 있지. 그것은 출발 전에 폐하께서 전해줄 것이네.”

에인프라흐 공작이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뭔가 수가 있긴 한가 본데 과연 그것이 뭘까? 설마 이미 경험이 있는 스승님과 나를 믿고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지금 저희에게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앞에 나온 이야기만 하더라도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야말로 극비에 해당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모르겠나?”

에인프라흐 공작이 이죽거리면서 물었다. 그 웃음을 보니 왠지 화가 난다. 하지만 그 정도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내가 어리진 않다.

“네, 모르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에잉, 재미없기는···.”

공작이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를 해주 않을 셈인가?

“자네들을 우리 편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네.”

답은 마탑주가 해주었다. 이제야 나를 자신들의 영역에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슬라이트를 비롯한 어린 천재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쟤들은 가문의 소속이나 마탑의 소속이니 언젠가 그들의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될 예정이었겠지만 난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스승님의 덕이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반대로 이런 극비사항을 들었으니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만약 여기서 반기라도 들었다간 거물들의 집중 공격을 받을 것이다. 아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축하하네”

가장 먼저 축하를 건넨 것은 슬라이트의 큰형인 슬레이프였다. 이게 축하까지 받을 일인가 싶었지만 축하는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나도 축하하지. 왕국을 위해 활약해주게.”

한쪽에서 조용히 있던 둘째 왕자도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는 순간 등골이 찌릿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둘째 왕자는 4성 기사이니 위험 신호는 아니다. 적의가 느껴졌다. 그것도 아주 강렬한 적의가 순간적으로 느껴졌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 자식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괴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공작이 짝하는 소리가 크게 나도록 크게 손뼉을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 그럼 오늘 가장 중요한 행사를 시작하도록 하지.”

에인프라흐 공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글러 후작과 올라프 후작이 장비를 꺼내 몸에 착용하기 시작했다.

각자 몸에 맞는 갑옷을 꺼내 입는 것을 자칼과 쿠프가 도왔는데 7성 기사쯤 되면 사실 갑옷이 크게 의미가 없다.

그 정도 오러라면 막아낼 수 있는 갑옷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히려 움직일 때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굳이 챙겨입는다는 것은 그만한 기능을 가진 갑옷이라는 얘기였다.

지글러 후작의 갑옷은 움직임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인지 아주 얇은 재질의 가죽 갑옷이었는데 보통 가죽이 아니고 뱀 가죽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상급 마수의 가죽을 가공한 모양이었다.

반면에 올라프 후작은 보기에도 숨이 막힐 정도로 두꺼운 금속 갑옷이었다. 보통 7성 기사라면 절대로 입지 않을 그런 종류의 갑옷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올라프 후작이 두꺼운 전신 금속 갑옷을 입자 사람이 아니라 장갑차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갑옷을 입고 나자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는데 지글러 후작은 갑옷과 비슷하게 아주 얇은 세검 종류의 검이었다. 그런데 검신이 보통 한손 검보다 훨씬 길었다. 아마도 찌르기 위주의 검술을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예상된다.

올라프 후작은 검이 아닌 거대한 도끼였다. 거의 자신의 키와 비슷할 정도로 거대한 도끼라서 올라프 후작이 들었을 때나 대형도끼로 보이지 다른 사람이 사용한다면 도끼 창처럼 보일 것이다. 애초에 저것은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무기라고 할 수 있겠다. 얼핏 봐도 100킬로그램 가까이 나갈 것처럼 보이는데 저걸 올라프 후작 외에 누가 사용할 수 있겠나.

“잘 봐두도록 하게 이것은 흔치 않은 기회야. 자네들이 우리 세계에 들어온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네.”

공작이 젊은 천재들에게 찡긋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7성 이상의 절대자들이 싸우는 것을 볼 기회는 흔치 않다.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라고 볼 수 있었다.

지난번 스승님이 자무새를 상대하는 것을 본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었다. 후작들의 대련이 끝나고 마탑주와 공작도 대련도 있을 것 같으니 더욱 기대되었다.

공작의 쳐둔 기막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연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난쟁아”

“쓸데없이 덩치만 큰 게 어디에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느냐!”

원래 절친이라는 두 사람이 갑자기 기세를 끌어올리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우리는 재빨리 두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에인프라흐 공작과 스승님의 뒤로 숨었다.

두 사람이 격돌하기 시작하면 그 충격파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것을 막아줄 벽이 필요했다.

두 사람의 연기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근위 기사단과 북부기사단의 사이에도 긴장이 흐르기 시작할 때 먼저 움직인 것은 지글러 후작이었다.

파앗!

지글러 후작은 빨랐다. 그냥 빠른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빨랐다. 내 좋아진 시력으로도 잔상이 보일 만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 지글러 후작의 찌르기가 올라프 후작의 목을 정확히 노렸다.

콰앙!

이거 적당히 대련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나? 앞에서 공작과 스승님이 기막으로 충격을 상쇄해주고 있는데도 몸이 저리도록 충격파가 전해져온다. 어쩌면 이런 것을 느끼라고 적당히 막아내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올라프 후작은 두꺼운 도끼의 면으로 지글러 후작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후, 마치 파리를 쫓듯이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 지글러 후작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10미터는 뒤로 빠진 지글러 후작이 도발을 날렸다.

“곰 같은 놈아, 그렇게 느려서야 돼지 목이라도 썰 수 있겠느냐?”

올라프 후작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되받아쳤다.

“모기가 날아다니나?”

지글러 후작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사라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빨랐다. 달리는 것인지 아니면 날아다니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대신 이번엔 직선이 아니었다. 곡선을 그리며 올라프 후작의 측면을 공격하려는 그때 올라프 후작의 도끼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에 두꺼운 갑옷까지 입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경이로울 정도의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지글러 후작이 달려들고 있는 방향으로 거대한 도끼가 휘둘러지자 지글러 후작은 맞서거나 좌우로 방향을 트는 것보다 위를 선택했다.

도끼를 피해 위로 뛰어올라 올라프 후작의 머리를 유난히 기다란 지글러 후작의 얇은 세검이 노렸다.

“걸렸구나!”

하지만 올라프 후작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올라프 후작이 위로 뛰어올랐고 머리를 향하던 검이 올라프 후작의 가슴을 그대로 뚫어버릴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헙!”

올라프 후작의 위기에 자칼이 깜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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