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슬프도록 아름다운
내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검이었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하늘을 꿰뚫듯 솟아있는 검으로 변해있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옆을 보니 아이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설마 저게 나만 보이는 건가?
“너희들 저거 안보이냐?”
“뭐가? 넌 왜 갑자기 욕을 하고 그러냐?”
슬라이트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듣고 확신했다. 나만 보이는 모양이다.
스승님이라도 옆에 계셨다면 물어봤을 텐데 지금은 한참 앞쪽에 계시니 물어볼 수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니 에인프라흐 공작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고 웃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공작이 의도한 것이다. 무슨 이유와 원리로 내 눈에만 보인 것인지 궁금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는 두 괴물의 대련에 집중해야 했다.
눈 한번 깜박일 찰나의 시간도 놓칠 수 없다. 보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다.
공작이 검을 머리 위로 들어 곧추세웠다. 그러자 이번엔 정말로 검이 거대해졌다.
에인프라흐 공작의 검에서 솟아난 선명한 유형의 오러가 20미터 가까이 늘어나 거대한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우아아아아!”
젊은 천재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나도 감탄했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아주 잠시였긴 하지만 초월의 영역에 들어간 적이 있는 몸이다.
공작이 무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단했다. 인간의 몸으로서 저 정도 수준이 되려면 얼마나 큰 재능과 노력이 필요했을까?
지글러 후작의 속도? 올라프 후작의 단단함과 힘? 공작의 저 일검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공작이 단지 검에 오러를 피워내고 들고 있을 뿐인데도 스승님과 두 후작이 식은 땀을 흘려가며 그 기세를 차단하고 있었다. 세 명의 7성 기사가 그런 노력을 하고 있음에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짜릿한 기세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자신이 갈고 닦은 검의 완성, 그것을 지금 공작이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검을 받아내는 상대도 역시 괴물이었다.
마탑주가 양손을 로브 안에서 꺼내는 순간 마탑주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마법진이 나타났다. 마법진을 마력으로 연성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기술이다. 여러모로 미숙하긴 하지만 3 서클 마법사인 나는 1개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것을 수십 개를 동시에 완성해서 구동시킨다는 것은 이미 마탑주도 인간의 한계를 진즉에 뛰어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마탑주 역시 자신이 갈고 닦아온 마법의 완성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아!”
스테이시가 육성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공작의 검이 휘둘러졌다. 그저 수직의 내려치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완벽한 일검이다. 애초에 검술이라는 것은 베기와 찌르기가 기본이다. 그중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내려치기다. 에인프라흐 공작은 모든 검술의 가장 기본인 동작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하고 있었다.
기본 동작이지만 그 위력만은 그렇지 않았다. 20미터짜리 오러소드가 베지 못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버릴 것만 같은 기세로 내리꽂히던 검은 막혀버렸다.
어느샌가 생성된 수십겹의 반투명한 벽이 오러소드를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쾅! 쾅! 쾅!
공작의 검은 처음에는 굉음과 함께 거침없이 그것을 부숴나갔다. 그러나 10개를 넘어서면서 검이 느려졌고 20개를 넘어서면서 눈에 띄게 멈추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30개 넘어서며 마침내 멈춰섰다.
벽이 하나 깨질 때마다 충격파를 막아서고 있던 두 후작과 스승님의 몸이 눈에 띌 정도로 휘청거렸다. 셋 모두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공작의 오러소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마탑주의 주위에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다시 나타났다.
거대했던 에인프라흐 공작의 오러소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작아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스승님이 보여주었던 중첩의 오러 그것을 공작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스승님이 보여준 3 중첩이 아니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히 4겹의 오러였다.
에인프라흐 공작은 저것으로 무엇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기술적인 부분이다. 그와 동시에 마탑주는 이번엔 또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아까부터 뇌리 한쪽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다. 성장이었다. 얻기는 했지만 정작 어떻게 사용하고 작용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알 수 없는 능력이다. 그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얼마 전 내가 자각했던 나의 검은 생존이었다. 그런데 생존하는데 가장 확실하고 쉬운 방법이 무엇일까?
당연한 말 같지만 강해지는 거다. 나는 지글러 후작처럼 빠르지 못하고 올라프 후작처럼 강하지 못하며 스승님처럼 기술적이지 못하다. 하물며 눈앞에서 저런 기예를 선보이는 에인프라흐 공작에 비교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람과 닮고 싶냐고 하면 당연히 에인프라흐 공작이겠지만 꼭 공작만을 닮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욕심쟁이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나는 지글러 후작의 속도도 가지고 싶고 올라프 후작의 힘도 가지고 싶으며 스승님의 기술도 가지고 싶다. 그리고 에인프라흐 공작의 저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경지에도 오르고 싶다.
내 생각에 맞춰 ‘성장’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야 이 녀석의 사용법을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에인프라흐 공작이 그 거대했던 오러의 검을 압축하고 또 압축해 4 중첩의 오러를 만들자마자 앞으로 쏘아졌다.
지글러 후작보다 빠르다. 지글러 후작은 잔상이라도 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작은 내 시선이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초감각을 이용해 어떻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가까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탑주의 무지막지한 마법이 마치 융단폭격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연무장’
이미 반으로 갈라진 연무장이었지만 이제는 회생 불가 판정이 확정이다.
불과 얼음 그리고 전기, 바람 거의 모든 속성의 마법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마법에 맞은 바닥이 폭발하듯 뒤집어지고 흙먼지가 치솟기 전에 다음 마법이 작렬한다.
일반적인 마법이 아니다. 그것은 마법에 대해 초보나 다름없는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마법으로 이 거대한 왕국의 정점에 올라선 절대자가 일평생을 갈고 닦은 마법이다. 마치 조금 전 공작이 내리친 일검과 같은 것이다.
어떤 생물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지옥 같은 폭격 속에서 에인프라흐 공작은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법을 피하고 막아내기도 하며 되받아치기도 한다. 그러나 공작에게도 마탑주의 끝없이 쏟아지는 강력한 마법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는지 전진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강력한 마탑주의 마법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탑주는 단순하게 강력한 공격 마법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마법사들이 그렇듯이 땅을 솟구치게도 하고 착지하는 부분을 늪으로 만들기도 하며 안개를 만들고 거기에 전격계 마법을 날리는 등 교란 마법도 충실히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었다.
단순히 마법의 위력이 아니라 사용하는 순간과 연계되는 마법의 순서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괴물 같은 8성 기사의 발을 어떻게 느려지게 하겠는가.
공작의 발이 마침내 멈추고 쏟아지던 마탑주의 마법도 끝이 났다. 그러나 그 지독한 마법 폭격을 벗어난 공작은 옷자락 하나 잘리거나 그을린 흔적도 없었다.
“졌습니다. 여전히 강하시군요.”
마탑주가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마탑주도 정진한 것이 느껴집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내가 위험할 수도 있겠습니다.”
에인프라흐 공작도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남은 거리는 약 5미터 공작의 검에는 아직 한겹의 오러가 남아있었다.
에인프라흐 공작의 실력을 감안하면 상대가 아무리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목을 날릴 수 있는 거리다.
마탑주는 안색이 조금 좋지 않았다. 그 정도 마법을 퍼붓고도 안색이 약간 변한 것 정도라는 것도 충분히 괴물이다. 만약 그 마법들을 대군이 밀집한 곳에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상대가 일반 병사라면 수천 명은 죽었을 것이다. 기사라고 해도 하급 기사라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장’이 조금 더 바빠졌다. 나의 생존에 대한 갈망은 저 마법도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에인프라흐 공작과 마탑주는 멀쩡한데 대결의 여파를 막아내고 있던 7성 기사 셋이 탈진해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젊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가족과 스승들을 향해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고 나 역시 스승님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조금 지친 것 뿐이다.”
내가 포션을 내밀었지만, 스승님은 그것을 사양하셨다. 그런데 스승님에게서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실제 기운이 아니고 의지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스승님의 두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뼛속까지 무인인 사람이 그 대단했던 대결을 두 번이나 눈앞에서 보았으니 피가 끓어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전하시렵니까?”
“이젠 네가 내 속도 읽는구나.”
스승님은 자신의 속을 들킨 것을 개의치 않으셨다. 그것은 누구라도 지금의 스승님을 본다면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스승님의 시선은 오직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에인프라흐 공작이었다. 스승님에게 평생 넘을 수 없던 벽으로 있었던 공작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스승님은 도전을 원하고 계셨다.
나도 그 심정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비록 사람에 대한 호승심은 아니지만 나는 지난 생의 평생 변이체 놈들을 잡아 죽이길 원했다.
어쩌면 외딴곳에서 그렇게 외롭게 병으로 죽는 것보다는 마지막에는 화끈하게 도전하고 죽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몇 번 했었다.
스승님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일어서서 에인프라흐 공작에게 천천히 걸어가셨다. 나는 그저 스승님의 등을 바라보며 응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작님 저에게도 기회를 한번 주시겠습니까?”
공작 앞으로 다가간 스승님이 정중하게 요청하셨다.
에인프라흐 공작은 처음엔 매우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여태까지 보여준 적 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당장 죽는 한이 있어도 자네의 검이야 받아줘야지!”
그렇게 다시 무대가 만들어졌다.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연무장이었지만 어느샌가 회복한 마탑주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마법으로 평평하게 지면을 만들었다.
이제까지와 대련과 다르게 스승님과 에인프라흐 공작은 아주 가까이에 마주 보고 섰다. 그냥 검을 휘두르면 닿을 정도의 거리다.
“준비는 되었는가?”
“제가 준비한 것은 일검입니다.”
스승님이 무엇을 펼쳐 보일지는 이미 알고 있다. 스승님의 절기, 아마 내가 본 그것을 전력으로 펼치실 것이다.
“자네의 검을 받게 되어 영광이군.”
“저도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둘이 거의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누가 더 강한지는 이미 확실하다. 그러나 에인프라흐 공작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한 동료이자 친구가 평생을 수련해 만들어낸 최고의 일검을 받아낼 기회다.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혹시 한 50년쯤 후에 슬라이트나 자칼과 대련하면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저는 이것을 만검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스승님의 검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에인프라흐 공작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취했다.
“좋군. 아주 좋아! 마치 자네와 같은 검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공작은 이미 모든 것을 본 사람처럼 말했다.
스승님의 검이 내가 봤던 것보다 천천히 아주 더 천천히 움직였다. 누구나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린 검이다. 그러나 그것을 본 최고의 실력자들은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과연!”
두 후작이 스승님의 검을 보며 감탄하는 소리에 울컥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스승님이 평생을 바친 검이 왕국 최고의 기사들에게 인정받았다.
나에게도 이런 감정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지만, 가슴이 울리는 것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승님의 검이 더 느려질 수 없을 것처럼 아주 천천히 움직일 때 나는 검이 그리는 아름다운 한줄기 선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