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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09화 (109/206)

109. 성장의 비밀

한없이 느린 검

누구나 그냥 그 앞에 검만 갖다 대면 막아낼 수 있을듯한 검이다.

혹은 옆으로 한 걸음만 비켜서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검이었다.

그러나 왕국 최강자라는 에인프라흐 공작을 쉽게 그 검을 막아내지도 피하지도 못했다.

왜 느리기 짝이 없는 검을 피하거나 막지 못하는지 아는 사람은 대결의 당사자를 제외한다면 모두 세 명, 두 후작과 나 뿐이었다.

“저건 피할 수 없겠군.”

누구보다 빠르다는 지글러 후작의 말이었다.

“나도 저건 막아낼 자신이 없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올라프 후작의 감상이었다.

한 검사가 일평생 쌓아 올린 검술의 정수가 그 일검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괴물이었다.

타앙!

스승님의 검을 에인프라흐 공작의 검이 막아냈다. 여태까지 다른 대련과 다르게 반동도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드드드드!

맞대어진 스승님과 공작의 검이 굉음을 내며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흐읍!”

숨을 급하게 들이켰지만, 공작의 검이 뒤로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과연 이 왕국에서 누가 에인프라흐 공작의 검을 밀리게 할 수 있을까?

한순간 이러다가 스승님이 이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교차한 검의 진동이 점점 더 격해지며 공작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는 순간. 공작의 표정이 변했다. 아니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무인으로서 승부욕, 공작이 그것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검의 진동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작 쪽으로 밀리던 검이 멈추어 섰다.

진동이 멈추고 두 사람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미동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교차한 검이 떨어지는 순간.

콰아아앙!

대폭발이 일어나며 양쪽으로 튕겨 날아갔다. 거대한 충격파는 다행히 후작들과 마탑주가 막아내 줬다. 나는 곧바로 스승님에게 달려갔다.

대련이 끝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혹시 억지로 계속한다 해도 스승님이 공작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스승님은 엉망이 된 채로 흙바닥 한구석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계셨다.

“스승님!”

나는 재빨리 스승님의 상세를 살피며 포션을 건넸다. 이번엔 스승님도 포션을 거부하지 않으셨다.

다행히도 스승님은 옷가지가 너덜너덜하게 변했을 뿐 큰 상처는 없었다. 포션을 마신 스승님의 얼굴은 대단히 평온했다. 그러다 한마디 내뱉으셨다.

“졌구나.”

패배를 시인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평온하다. 억울하거나 분하다는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네”

“조금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네, 저도 그렇게 봤습니다.”

“허허! 그래 그 정도면 되었다.”

스승님은 몸을 일으켜 저만치에서 이미 걸어오고 있는 공작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셨다.

“졌습니다. 역시 어림도 없군요.”

“그렇지 않네. 내 평생 받아본 검 중에 가장 받아내기 어려운 일검이었네. 아마 자네가 나와 같은 경지였다면 절대 막을 수 없었겠지.”

에인프라흐 공작이 하는 말이 빈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설령 빈말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것은 빅터에게 양보하고 싶군요. 저 아이라면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그것을 받아내는 건 내 아들이겠지.”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것은 자연의 이치 지요.”

“하지만 아직은 어림도 없지, 앞으로 20년은 버틸걸세.”

공작과 대화를 마친 스승님이 돌아오자 두 후작이 가슴에 손을 대며 경의를 표시했다. 스승님은 겸손하게 같은 동작을 보여 답을 하셨다.

“그럼 오늘 할 일은 다 끝났겠지?”

공작이 다른 이들을 보며 확인하듯이 물었지만, 이견은 없었다.

물론 나는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당신들이 망가뜨린 내 연무장 좀 고쳐주고 가세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잠자코 있던 둘째 왕자가 나섰다.

“어른들만 놀고 끝나면 젊은 사람들이 너무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젊은이들에게도 기회를 줘야지요. 나와 함께 할 사람들의 실력은 미리 봐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왕자의 말에는 명분이 있다. 그런데 그 말을 꼭 지금 했어야만 했을까? 그리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것도 왠지 내키지 않는다.

구경이나 한번 하게 앞에서 싸워보라는 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대표로 저만 시범을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대 혼자 말인가?”

“예, 허락해주신다면 말입니다.”

연이은 강자들의 대련을 보고 입력하는 동안 ‘성장’이 열심히 일했다. 그 성과가 아주 조금이지만 느껴지고 있었다.

“한번 보도록 하지.”

왕자는 거만한 자세로 다시 앉으며 해보라는 듯이 턱짓했다.

이 자식 왕자만 아니었으면 죽여버렸을 것이다. 유체화가 사라진 것이 뼈아프다. 지구의 살아남은 변이체 중에 꼭 유체화를 가진 녀석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그럼 보여드리도록 하지요.”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멀찌감치 떨어졌다. 박살 난 연무장이지만 그래도 내 검을 보여주는 것에는 아무 문제 없었다.

연무장으로 향하는 도중에 슬라이트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냐? 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는 거냐?’

슬라이트의 뜻이 전해져 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슬라이트와 눈빛만으로도 뜻이 통했다는 것에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이내 털어버리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검을 꺼내 들었다.

나는 원했다. 지글러 후작처럼 빠르기를, 올라프 후작처럼 단단하고 강력하기를, 스승님처럼 완숙해지기를, 공작처럼 완벽해지기를 바랐다.

성장이라는 능력은 말 그대로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었다. 강한 열망에 따라 나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능력이 아니더라도 노력하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글을 잘 쓰기 위해 매일 노력하지만 모두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타고난 재능, 노력의 방향, 환경 모든 것이 결합한 결과다.

하지만 이 ‘성장’이라는 능력을 그런 것을 모두 건너뛰게 해주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아귀가 사람 흉내를 내던 것이 바로 그것의 영향이다. 변이체 놈들은 어떤 것을 생각할까?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사람을 잡아서 죽이고 먹는 것.

사람만을 생각하다 보니 사람과 비슷하게 변한 것이다. 도플갱어처럼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닌 진짜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이었다.

아귀를 그대로 놔두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면 정말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능력이었다.

비록 내가 능력의 쓰임새를 알아채고 일을 시키기 시작한 것은 정말 짧은 시간이다. 실제로 지금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편린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아주 작은 편린이라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아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 따위 알아보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후 공작이 했던 것처럼 머리 위로 검을 치켜들었다. 공작이 보여줬던 하늘 끝에 닿을 것처럼 보였던 환상의 검, 그것은 어떻게 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으니 따라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머지 기술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모두 두 눈에 담아두었다.

지난번 깨달음 이후로 몇 배나 빨라진 오러의 흐름을 감속하지 않고 돌리기 시작했다. 오러홀 안의 6개의 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치 차의 엔진을 바꾼 느낌이다.

6개의 별이 만든 힘을 다리에 집중했다. 지글러 후작이 이런 식으로 했던가?

땅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물론 지글러 후작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흉내는 낼 수 있다. 전보다 최소한 두배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다리에 집중했던 힘을 이번엔 양팔로 돌렸다. 신체 강화와 더불어 오러의 힘이 괴력을 만든다. 치켜들었던 검으로 땅을 내리쳤다.

콰앙!

역시 올라프 후작의 괴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파괴력이 몇 배나 상승했음은 분명하다. 땅을 내리친 반동으로 높이 뛰어오른 나는 검을 다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검에 오러를 집중한다. 슬라이트가 선물로 줬던 이 검은 슈바르거트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충분히 훌륭한 보검이다.

슈바르거트처럼 탐욕스럽게 오러를 빨아들이는 것이 아닌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검에 오러를 불어넣는다. 크게 더 크게 검 주위로 생성된 선명한 오러의 검을 만들어서 확장시킨다. 물론 한계는 있다. 나는 공작이 아니다.

3미터 정도로 늘어난 오러의 검을 땅에 착지하며 휘둘렀다.

샤아악!

오러로 이루어진 대검이 공기를 가르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검을 회수하며 곧바로 대검에 둘러진 오러를 압축하기 시작했다.

3미터에 이르던 검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짧아진 오러의 검에 아슬아슬하게 한겹이 더 씌워졌다. 지금의 나로서는 이것이 한계다. 하지만 당장 어제만 해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리고 그 검을 움직였다.

느리게 더 느리게.

단순히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평생 휘둘러온 검에서 찾아낸 나만의 검로를 따라 움직인다. 상대가 피하지도 막아낼 수도 없는 검로를 찾는다. 검에는 나의 모든 힘을 담는다.

스승님의 검과는 감히 비교할 수는 없다. 평생 휘둘러온 검에 바친 시간과 노력이 다르다. 그러나 나의 모든 힘과 정신을 쏟아부은 최고의 일검이다.

그 느린 검이 완전한 호선을 그리고 마침내 멈춰섰다.

“후우우”

멈췄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제대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저편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스승님을 시작으로 공작과 두 후작이 크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알고 치는 것인지 모르고 그냥 따라 하는 것인지 한박자 늦게 그것에 동참했고 특히 슬라이트는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뒤편에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는 둘째 왕자도 마지못해 손뼉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좋지 못했다. 심지어 적의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잘 감추고 있다가 갑자기 왜? 나에게 그렇게 이빨을 드러내서 좋을 것이 없을 텐데?

왕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것이다. 대격변 이후의 집단생활에서 나에게 적의를 드러낸 사람치고 장수한 사람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장하다.”

스승님이 먼저 다가와 격려를 해주셨다. 스승님의 얼굴에 드러난 미소를 보니 그래도 망치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20년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네?”

이어서 에인프라흐 공작이 혼잣말하듯이 말했고 두 후작도 한마디씩을 건넸다. 특히 올라프 후작은 크게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내 등짝을 그 큰 손으로 마구 두드리며 소리쳤다.

“자네 혹시 북부에 올 생각은 없는가?”

“근위 기사단을 놔두고 그 촌구석에 뭐 하러 가겠냐.”

“뭐야?”

옆에서 지글러 후작이 깐죽대자 올라프 후작이 눈을 치켜떴지만 이미 지글러 후작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물론 두 곳 모두 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가더라도 아버지가 관리하는 스승님의 영지가 있는데 내가 왜 다른 곳으로 가겠나.

마지막으로 나는 둘째 왕자 앞에 섰다.

“부디 만족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더 뭔가 해보라고 해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왕자도 바보가 아닌 이상 더 시킬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아까부터 왕자는 나에게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럴듯했다.”

왕자의 대답을 듣고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확실히 적의를 보이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상대가 나는 적으로 간주한다면 나도 적으로 대하면 된다.

“다행입니다.”

과연 둘째 왕자는 이번 원정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까? 여러 가지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무래도 슬라이트의 큰형인 슬레이프 백작의 신세를 좀 더 져야만 할 것 같다.

약간의 환담을 더 나눈 뒤에 왕자를 시작으로 손님들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둘째 왕자가 돌아가자마자 귀신같이 아이브 공주가 나타나 남아있는 손님들과 인사를 나눴다. 어지간히 자신의 오빠와 마주치기 싫었던 모양이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방금 그것이 뭐였냐며 귀찮게 하는 슬라이트까지 가까스로 떼어낸 후 혼자가 되었을 때 슬레이프 백작이 악수할 때 넘겨주었던 작은 쪽지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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