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정원사 고르기
-정원사를 조심. 선택에 주의.
쪽지에 적힌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정원사를 조심하라고? 현재 우리 집은 정원사가 공석이다.
마침 정원사가 절실하게 필요하기도 하다. 빈 토지와 나무들을 관리할 사람도 필요하지만, 지구에서 가져온 씨앗을 심어서 키울 사람도 필요하다.
나는 농사에 문외한이다. 희철이가 모아놨던 씨앗 뭉치에 무슨 씨앗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기껏해야 쌀이나 콩 정도는 알아보는 정도다. 하지만 그 외엔 하나도 모른다.
어쨌든 슬레이프 백작이 괜한 헛소리를 이런 식으로 전할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곧 채용공고에 지원할 사람이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선택에 주의하라는 것은 둘 중의 하나는 괜찮다는 뜻일까? 두고 보면 알게 될 일이다.
이래저래 일이 많았던 하루였다. 슬라이트는 저녁 내내 쫓아다니며 귀찮게 했지만 내가 알려준다고 녀석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미친 천재 놈이 진짜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알려주기 싫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알려주고 싶어도 방법을 모른다. 슬라이트도 변이체의 능력을 흡수하는 체질이었다면 지구로 데려가 성장을 시키는 것도 생각해 봤을 것이다.
밤이 찾아오자 지구로 넘어가 낮에 얻은 것을 몇번이나 반복하며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진심으로 원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만으로도 강해질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구에서 하는 수련은 어차피 모든 곳이 폐허이니 이곳에서는 무언가를 부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혹시나 큰 소리를 듣고 떠돌이 변이체가 찾아올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은 오히려 바라고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약해진 떠돌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수련을 마칠 때쯤 들러보니 공벌레들은 어느새 아귀의 시체를 거의 다 처리하고 있었다. 공벌레들이 아귀를 모두 먹어 치우고 나면 태백시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행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정표들이 사라져서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곳으로 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침반으로 방향이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내가 한국 지리에 능통한 그런 사람도 아니다.
애초에 태백시까지 도달한 여정도 그렇게 계획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끝없이 도망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평소보다 조금 빨리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일어나 평소처럼 식사하고 차를 마시며 쉬고 있을 때 집사가 찾아왔다.
“며칠 전 정원사에 지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면접을 잡아놨습니다. 참관하시겠습니까?”
슬레이프 백작의 예고가 있었기에 예상한 일이었다.
“몇 명인가요?”
“둘입니다.”
“집사님이 봤을 때는 어떤 사람들 같습니까?”
“둘 다 경력도 훌륭하고 문제 없어 보였습니다.”
집사에게 걸릴 정도면 슬레이프 백작이 경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요. 제가 직접 보도록 하죠.”
“직접 말씀입니까?”
“네, 이번엔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어지간하면 거의 모든 것을 집사에게 일임했던 내가 직접 면접을 본다고 하자 집사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전 수련에는 결국 슬라이트의 등쌀에 못 이겨 오랜만에 단체 대련을 실시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 것은 내가 아니라 스테이시였다.
나와 대련하기도 전에 슬라이트와 자칼이 스테이시의 마법에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신나게 두들겨 맞고 패배했다.
꼬꼬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낸 마법은 정말 굉장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위력 자체가 더 뛰어나지도 않고 마나의 소모도 더 크지만, 캐스팅이 필요 없고 연속으로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은 마나량 자체만 충분하다면 접근전을 해야 하는 기사들에게는 천적과 다름없었다.
여태까지도 스테이시가 두들기고 기사들이 두들겨 맞는 전개는 같았으나 보통은 마지막에 스테이시가 마지막에 승부를 포기하고 패배를 시인하는 그림이었다면 이번엔 승자가 바뀐 것이다.
슬라이트가 받은 충격은 대단해 보였다. 적어도 이 중에서 나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최고라고 여겼는데 그 공식이 깨진 것이다.
자칼도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으나 대련이 끝나자마자 구석에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을 보면 분한 모양이었다. 소심하다고 해서 승부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쉽게도 스테이시와 나의 대련은 이뤄지지 못했다. 앞의 대련 때 스테이시가 소모한 마나가 너무 커서 포기한 것이다.
나도 스테이시의 무차별 폭격을 한번 경험해보고 싶었으나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 후에 집사가 정원사 후보들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나는 집무실에서 두 정원사를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에드몬드라고 합니다.”
“저는 로인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겉모습만 멀쩡하고 속은 시커먼 인간들을 나는 아주 많이 보아왔다.
둘 다 아주 작은 적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은 보통 셋 중의 하나를 의미한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거나 아니면 그것을 감출 정도로 고도의 훈련을 받았거나 아니면 진짜로 무고한 사람이다.
집사가 준비해둔 두 사람의 이력을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에드몬드씨는 경력이 굉장히 화려하시군요?”
“예, 운이 좋았습니다.”
에드몬드는 정말 이력이 화려했다. 남작가의 정원사로 시작해 백작가의 정원사를 거쳐 왕궁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었다.
“이렇게 경력이 좋으신 분이라면 요즘 오라고 하는 곳이 많았을 텐데요.”
요즘은 좀 열기가 식었지만, 여전히 실력 있는 정원사를 구하지 못해서 난리인 상황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건이 잘 맞지 않았습니다.”
“그럼 이곳은 조건이 맞습니까?”
“공고하신 금액은 다른 곳에 비해 모자라지 않지만 저는 그것보다 더 받기를 원합니다.”
이 사람이 내가 주의해야 할 사람이라면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내가 월급 올려주기 싫어서 고용하지 않겠다고 하면 끝인 것 아닌가?
“좋습니다. 경력이 훌륭한 분이니 금액은 조정이 가능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몬드는 약간의 예절까지 몸에 익힌 듯 했다. 왕궁에서까지 일했으니 이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이 너무 능숙해 보이는 것이 조금 거슬렸다.
“로인씨는 경력이 짧으시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도 정원사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모든 것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로인은 에드몬드에 비해 훨씬 젊었다. 대신 자작가 한곳에서 3년을 일한 것이 전부였다.
슬쩍 두 사람의 손을 보았다. 둘 다 확실히 거친 일을 오래 한 사람의 손이다.
“로인씨도 오라고 하는 곳이 많지 않았나요?”
“경력이 짧아서 그런지 대우가 신통치 않았습니다.”
조금 두루뭉술한 대답이다. 지금까지 답으로만 보면 로인이 좀 더 주의해야 할 사람에 가깝다.
“우리가 제시한 금액은 조건에 맞습니까?”
“네, 그 정도면 전 만족합니다. 뽑아주시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슬레이프 백작의 쪽지가 있었기 때문에 수상해 보이는 것이지 사실 로인의 답변이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두 사람 중 누가 주의해야 할 사람인지 이렇게 봐서는 확신할 수 없다. 둘 중의 하나가 뭔가를 노리고 들어온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뽑고 나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 집은 정원사가 공석이 된다는 것을 떠올렸다.
“지금 저택에 할 일이 많습니다. 앞으로 더 많아질 예정이고요. 그러니 두 분 다 채용하도록 하지요. 에드몬드씨의 급여는 다음에 집사와 협상해주세요.”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 모두 채용하면 해결된다. 만약의 경우 한명이 사라진다 해도 한명이 남게 된다.
면접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며 앞으로 해야 할 일에 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당장 저택 주변을 둘러싸도록 나무를 심는 작업도 하다만 상태였고 정원 꾸미기는 엄두도 못 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텃밭도 꾸밀 예정이니 정원사 둘로도 일손이 모자랄지 모른다.
“소문의 그 작물은 심지 않으시는 겁니까?”
앞으로 할 일에 대해 듣던 에드몬드가 질문을 했다.
“그것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워낙 유명한 일이니까요. 지금 왕도의 정원사 중에 그것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한 일이지만 갑자기 토끼 꼬리풀에 대한 질문을 하니 에드몬드가 수상해 보인다.
이래서 의심을 심는 것이 적을 붕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얘기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의심을 품고 사람을 대하니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그것은 상황을 봐서 나중에 다시 시작할 예정입니다. 당장은 아닙니다.”
“키우기 어렵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성공한 곳이 하나도 없다는 말도 있고요. 그렇게 키우기 어려운 겁니까?”
에드몬드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전에 근무하던 정원사도 별 수고 없이 잘 키웠습니다. 별로 어렵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잘못해서 그 귀한 작물을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에드몬드는 정말로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에 로인은 얼굴에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말 한마디가 나올 때마다 의심스러운 사람이 바뀌는 상황이다.
그때 저편에서 아이브 공주가 오늘은 조금 늦게 출근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공주의 품에 안겨 있었고 졸졸 따라오던 똘똘이가 먼저 뛰어와 나에게 꼬리를 흔들며 반갑다는 표시를 했다.
그래 내가 주인인 것은 그래도 잊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똘똘이가 집사의 앞에 배를 까뒤집고 누웠다. 조만간 진짜 주인이 누군지 알려줘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예를 표하십시오. 공주님이십니다.”
집사가 두 정원사 후보에게 말을 하자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정확한 예법으로 무릎을 꿇고 공주를 맞이했다.
에드몬드야 왕궁에서 일했으니 그렇다 치고 로인도 예법에 밝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집사의 앞에서 잠시 재롱을 부리던 똘똘이가 무릎을 꿇은 정원사 후보들에게 다가가 둘의 냄새를 맡더니 갑자기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으르르르! 알! 알!
평소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짖거나 으르렁거리는 법이 없는 똘똘이다.
똘똘이가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쥐는 못 잡아도 왕실 특무대는 잡았던 경력이 있는 똘똘이가 이번엔 정원사 둘 모두에게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래봐야 매우 하찮지만,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사납게 짖어대는 똘똘이가 거슬렸는지 에드몬드가 손을 들어 똘똘이를 쫓으려고 했다.
“괜찮습니다. 물지 않아요.”
일단 에드몬드를 말린 후 똘똘이를 안아 들었다. 이상하게도 처세술이 좋은 똘똘이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다.
어쩌면 슬레이프 백작의 뜻은 둘 모두를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브 공주가 살짝 인사만 하고 우리를 지나쳐 저편으로 사라지자 똘똘이도 공주를 따라갔고 정원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 다 예법이 익숙하시군요?”
“네, 왕궁에서도 일했었으니까요.”
“어머니가 고위 귀족가의 하녀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교육받았습니다.”
나름 둘 다 이유는 있었다. 고용주로서는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나는 둘의 저택 바깥까지 배웅하기로 했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를 살폈다.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뭔가 배운 사람이라면 걸음걸이에서 표시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둘 모두에게 어떤 특징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복장을 살피던 중에 한가지 생각난 것이 있어 물어보았다.
“두 분은 장비를 가지고 다니지 않으시는군요?”
전에 고용했었던 운 없는 정원사 벤프리가 특이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는 항상 도구를 몸에 지니고 다녔었다.
“오늘 직접 일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에드몬드는 완전히 빈몸인 모양이었는데 로인은 품에서 작은 가위를 하나 꺼냈다.
“나무의 잔가지를 자를 때 쓰는 녀석이죠.”
작은 가위지만 한눈에 봐도 제법 고급품이었다.
“좋아 보이는 가위군요. 잠시 그 가위를 제가 좀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로인은 스스럼없이 가위를 건넸고 나는 받자마자 가위에 깃든 기억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