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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12화 (112/206)

112. 첫 번째 믿음

“그것까지 벌써 알아냈는가? 따로 정보를 주는 사람이 있는 건가?”

“아닙니다. 저 스스로 알아낸 것이죠. 이 시기에 갑자기 경력과 실력이 뛰어난 정원사가 지원했다는 것이 의심스러워서요.”

약간의 우려와 달리 왕세자는 금세 표정을 풀었다. 왕세자는 이 왕자에 관한 것보다 내가 정보를 입수한 방법에 대해 흥미를 보였다.

나에게 정보를 준 것을 슬레이프 백작이 윗선에 알린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왕세자의 반응을 보면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진짜 놀란 것은 스승님이었다.

“새로 들어온 정원사가 세작이라는 말이냐?”

“예,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내가 잘못한 부분이었다. 나에게 거의 무조건적인 믿음을 주고 계신 스승님에게 나는 감추는 것이 너무 많다.

“둘 중의 누가 세작이냐?”

“둘 다입니다.”

내 말에 스승님과 왕세자가 모두 놀랐다. 스승님은 그렇다 쳐도 왕세자는 왜 놀라는 거지?

“크레이브가 보낸 세작은 하나일 텐데?”

“네, 이 왕자님이 보낸 세작은 한 명이죠. 다른 하나는 왕세자님도 모르셨던 겁니까?”

사실 이쪽이 더 큰 건수이다. 둘째 왕자가 뭘 노리고 세작을 침투시켰던지 어차피 그것은 왕국 내부의 문제다.

“다른 세작이 있는 줄은 나도 몰랐네. 다른 하나는 어디에서 보낸 세작이던가?”

진짜 몰랐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꽤 큰일일지도 모른다.

“제멜아크입니다.”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왕세자의 손이 잠시 멈췄다. 이건 얘기가 다르다. 엄연히 다른 국가의 첩자인 것이다.

잠시 멈췄던 왕세자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증거는 있는가?”

“아뇨.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합니다. 직접 조사해보시면 알게 되시겠죠.”

“그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확실하겠지. 하지만 조사는 해보겠네.”

“물론 그렇게 하셔야지요.”

잠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왕세자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생각이 많아야 정상일 것이다.

“누구냐? 누가 제멜아크의 세작이더냐?”

스승님이 정적을 깨뜨렸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지금 스승님이 대단히 분노하고 계시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에드몬드입니다.”

스승님이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달려가서 에드몬드의 목을 베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진즉에 일어났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께서 그동안 잘 막아주신 덕분에 조금 늦은 감이 있지요.”

“하지만 그것이 뚫렸지. 가장 뚫리지 않아야 할 상대에게 말이야.”

왕세자도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에드몬드라는 자는 어째서 그리 쉽게 감시망을 피할 수 있었던 거지?”

“일단 경력 중에 왕궁에서 일했던 것이 크다고 봅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검증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왕궁에 있을 때도 세작이었던 것인가?”

왕세자가 조금 흥분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제의를 받은 것은 아주 최근이니까요. 그리고 딱히 수상한 구석이 없는 사람입니다. 돈을 탕진하거나 한 사람도 아니고요.”

왕세자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사람이 왜 제멜아크의 제의를 받아들였단 말인가?”

“돈 때문이죠.”

“방금 돈이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지 않았었나?”

“아닙니다. 탕진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었죠. 하지만 곧 큰돈이 필요한 사람이긴 합니다. 딸이 아카데미에 들어갈 예정이거든요.”

왕세자가 하! 하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데 자네는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있나? 이곳에서 나간 적이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사이코 메트리로 기억을 읽어서요. 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나름대로 조사도 열심히 했고 도와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슬레이프 백작인가?”

“아닙니다. 그랬다면 왕세자님이 모르셨을 리가 없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지. 슬레이프 백작이 나 모르게 자네를 돕진 않을 것이야.”

사실 모르게 도와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어쨌든 다른 누군가를 찾아봐야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럼 자네의 궁금증을 해결해 줘야겠군. 크레이브의 세작을 알고도 방치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는 것이겠지?”

“네, 그렇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제가 어떻게 대처할지 계획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폐하의 뜻이네.”

그럼 내가 손을 댈 수 없는 문제 아닌가?

“폐하와 내가 크레이브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네”

사실상 차기 왕권이 정해진 곳에서 이 왕자의 이런 행위는 반역이다. 그런데도 방치한다는 건가?

“내 결정이었다면 근본부터 뿌리를 뽑았겠지. 그런데 폐하께서는 아직 크레이브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시네. 지금 크레이브가 가진 세력으로 무슨 일을 꾸며도 큰 손해 없이 감당이 가능하고 한번 크게 실패한다면 크레이브도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지.”

국왕의 뜻이 그렇다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좋은 결정처럼 생각되진 않았다.

“그럼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세작인 걸 알고도 자네가 중요한 정보를 넘길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네만?”

그거야 당연히 그럴 계획이었다. 하지만 좀 멀쩡한 정원사들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짐을 나눠 주셨군요.”

“그것은 미안하게 생각하네. 그럼 제멜아크의 세작 쪽은 내가 처리해주면 되겠나?”

“그쪽도 당분간은 그냥 내버려 뒀으면 합니다. 제가 떡밥을 조금 뿌려놨더니 둘 다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거든요. 잘하면 나중에 역정보를 흘려서 잘 써먹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내 대답에 왕세자는 정말 흡족하다는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참 탐이 나는 인재일세. 지금이라도 한자리 줄 수 있네만 어떤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지금은 관직보다는 수련에 관심이 더 많아서요.”

이번엔 스승님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게 일타쌍피라고 하는 건가?

“이번 일은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자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네 덕분에 우리 정보조직도 정신을 차리겠지.”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만”

“뭔가?”

“우리 쪽 세작들은 제멜아크의 어느 수준까지 잠입해 있습니까?”

“그것은 비밀 이네만... 이번에 신세를 진 일이 있으니 특별히 알려주지. 가장 깊은 곳까지 닿아있다고만 말해주겠네”

그럼 라이브러쉬의 세작은 제멜아크의 국왕 근처의 측근이라는 건가? 적어도 정보전에서는 이쪽이 앞서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잊었는데 전해줄 중요한 소식이 있네.”

보상 문제와 같이 전해줄 중요한 소식이라면 뻔한 것이다.

“던전에 뭔가 변화가 생겼습니까?”

“그렇다네 제멜아크쪽에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야 지난번에 얘기가 나왔었지만 정말 작심한 모양이야. 우리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로 빠르게 준비하고 있네. 그래서 생각보다 원정일도 많이 당겨질 걸세”

오히려 빠르면 좋다. 그리고 앞에서 제멜아크쪽이 던전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도 조금은 바라고 있다. 그럼 그곳에서 허비할 시간이 줄어들 것이다.

“오히려 빠르면 좋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주면 다행이고 따로 우리가 지원해줄 것은 없겠나?”

딱히 던전에 들어갈 때 지원받아야 할 것은 없었다. 없다기보다는 알 수가 없다. 제국에서 만든 악랄한 던전 안에 무엇이 있을 줄 알고 미리 준비하겠나.

“그럼 혹시 가능하다면 보고에서 받을 물건을 미리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귀한 것은 다 모아놨다는 왕실의 1급 보고다. 그 안에 어떤 물건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

“흠, 폐하께 허락을 받아야겠지만 아마 어렵지 않을 걸세.”

“스승님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상관없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곳에서 받는 물건은 모두 스승님의 소유다.

“그럼 그것은 내가 폐하께 말씀드려서 미리 받을 수 있도록 추진하도록 하지.”

왕세자는 그 외에 몇 가지 사안에 대해 말을 더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스승님이 따로 나를 부르셨다.

“빅터야.”

“네, 스승님”

“내가 너에게 그렇게 미덥지 못한 존재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말이 나올 것을 예상했었다. 스승님이 좀 더 크게 화를 내셔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여전히 너는 나에게 비밀이 많구나.”

“죄송합니다. 이번 건은 스승님께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습니다.”

“나는 너에게 많은 것을 받았다. 그래서 너에게 궁금한 것이 많지만 항상 너를 믿어왔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실망스럽구나.”

“죄송합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스승님은 나를 절대적으로 믿어주셨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스승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

“너는 매일 밤 수련을 따로 하고 있지?”

“네, 그렇습니다.”

밤마다 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매우 많으실 테지만 묻지 않던 스승님이었다.

“그럼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수련해도 되겠느냐?”

당연하게도 그냥 함께 수련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구의 존재를 스승님에게 알리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고민이 되느냐?”

“예,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무엇이 너를 고민하게 만드느냐?”

“전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스승님은 말없이 잠시 나를 지켜보셨다. 위협적이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담담히 바라보실 뿐인데도 등에서 땀이 났다.

“그럼 이렇게 하자. 너에게 무슨 비밀이 있든 간에 내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기로 맹세하마.”

기사의 맹세, 분명 스승님과 같은 기사라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지킬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어렵겠느냐?”

땀이 더 많이 흐르기 시작한다. 당장이라도 스승님을 믿는다고 대답하고 싶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지난 삶에서 굳어진 생각과 경험이 마치 금제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그···.”

턱이 덜덜 떨리지만, 간신히 입을 뗐다. 스승님도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신 모양이다.

“네가 그 정도로 어렵다면 괜찮다. 내가 괜한 호기심을 부렸다.”

스승님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나는 아직 대답하려 하고 있었다. 턱에서 시작된 떨림이 점차 온몸으로 번져간다. 어쩌면 이것은 금제보다 더 지독한 것일지도 모른다.

온몸에서 뿜어지는 땀이 줄줄 흘러 옷을 적시고 흐르는 땀이 턱으로 쉴새 없이 떨어졌다.

“괜찮은 것이냐?”

스승님이 깜짝 놀라 일어서 나를 부축하셨다. 경련하듯이 덜덜 떨리는 몸을 스승님의 손이 닿자 조금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시죠.”

마침내 입이 떨어졌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어찌나 힘을 썼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동시에 몸의 떨림과 터져나오던 땀도 멈췄다.

“괜찮은 것이냐?”

“네, 이제 괜찮습니다.”

뭔가 시원한 느낌이 든다. 오랫동안 나를 옥죄고 있었던 올가미를 하나 벗어낸 느낌이다.

“오늘 밤에 저와 함께 그곳에 가시죠.”

“그곳?”

“가보시면 압니다.”

“기대하마.”

밤이 되어 스승님과 함께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나만이 들어올 수 있었던 지하 2층으로 스승님과 함께 내려왔다.

“이곳에 오는 것은 처음이구나. 이곳에서 매일 수련을 하는 것이냐? 특별한 장치는 보이지 않는다만.”

스승님은 기척을 지우는 뭔가 특별한 장치나 마법이 설치되어 있는 줄 아시는 모양이었다. 철권단이나 슬라이트도 일단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특별한 장치는 없습니다. 잠시 제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나는 의아해하고 있는 스승님의 손을 잡고 통로를 건넜다.

“허어···!”

통로를 건너자마자 스승님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만 할 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셨다. 비록 남은 것이 거의 없는 폐허지만 누가 봐도 저쪽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은 정신을 조금 차리자마자 질문을 쏟아내셨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곳이냐?”

“지구라고 불렀던 세상입니다.”

“지구? 대륙에 그런 곳이 있었더냐?”

“아노더스 대륙이 아닙니다. 아예 다른 세상이지요.”

스승님이 단번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스승님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믿지 못할 것이다.

“다른 세상이라고?”

“예, 악마에게 멸망한 세상이지요.”

이제부터 스승님에게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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