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13화 (113/206)

113. 태백시를 떠나다.

스승님과 나는 긴 이야기를 했다. 전생의 이야기까진 하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어렸을 때 이런 능력이 생겼다고만 알려드렸다.

그렇다고 해도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도 매우 길다. 비록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능력은 별로 없지만, 내 이야기를 스승님은 집중해서 끝까지 들어주셨다.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스승님은 한참을 가만히 계시다가 입을 떼셨다.

“고생이 많았구나. 내가 너라고 했어도 누구에게도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믿어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이제야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이제 주변 구경이라도 좀 하시겠습니까?”

스승님에게는 이곳이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일 것이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내 이야기만 들으셨으니 궁금하실 것이 당연했다.

차라리 이곳이 기상연구소였다면 보여드릴 것이 좀 더 많았을 텐데 폐허가 되어버린 태백시는 정말 구경시켜 드릴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스승님은 모든 것이 신기하신 것 같았다. 수십층 고층빌딩이 무너진 콘크리트 건물의 잔해 같은 것도 저쪽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구경임에는 분명했다.

나는 스승님을 공벌레들이 아직 열심히 파먹고 있는 아귀의 잔해로 모셨다.

“저것이 그것이냐?”

“네, 이쪽 세상에 남아있는 악마입니다.”

“오, 세상에”

거대한 아귀의 잔해는 많은 부분이 사라졌지만 아직은 살을 파먹기 바쁜 공벌레들이 뼈를 남겨둔 덕분에 그 거대한 덩치를 유추할 수 있었다.

“저것을 너 혼자 상대했다는 말이냐?”

“네,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좀 위험했었다.

“이렇게 덩치만 보자면 대단히 강했을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가늠이 되지 않는구나.”

“중급 마수 중에서 최상급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내 경험으로 볼 때 대형 마수를 혼자 상대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다음부터는 무모하게 혼자 싸우기보다 나와 함께 하자꾸나.”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 혼자뿐이었던 세상에 한명이 더 추가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에 뭔가 가득 찬 기분이 들었다.

물론 제이시나 폴켄도 이곳의 존재를 알지만, 등을 맡길 수 있는 힘을 가지진 못했다.

“그럼 너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전 이 악마들의 힘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딘가에는 부교주도 있을 것 같고요. 이곳을 탐색하면서 힘을 길러야겠지요.”

그리고 광검제라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지만 그것도 말씀드리지 않았다. 많은 것을 공개했음에도 여전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많았다.

“그럼 당분간은 계속 밤에 이동해야겠구나.”

“네, 저 녀석들이 식사를 마치면 이동할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지난번 깨달음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했으니까 숙달할 시간도 필요하고요.”

나는 여전히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는 공벌레들을 가리켰다. 스승님은 잠시 고민하시더니 답을 내셨다.

“언제까지 도둑고양이처럼 밤에만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그럼 어떻게 할까요?”

“오전 수련을 빼줄 테니 낮에 움직이도록 해라.”

“그럼 슬라이트나 다른 친구들이 의심을 할 텐데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마.”

이러면 내 시간이 훨씬 많아진다. 스승님께 이야기한 것이 좋은 선택처럼 느껴졌다.

나의 성장은 슬라이트를 비롯한 호적수들과 대련에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성장을 경험하는 곳은 바로 지구였다.

그러면 이제 한 가지가 남았다. 기왕 이곳에 오셨으니 지구의 마나 맛을 한번 보셔야 하지 않겠는가?

“스승님 이제 이곳에서 연공을 해보시죠.”

“그렇지! 그게 남아있었지!”

스승님은 아이처럼 흥분하셨다. 역시 이 사람은 천생 무인이다.

뭐가 그리 바쁘셨는지 아무 데나 털퍼덕 앉아 스승님이 연공에 들어가자 나도 근처에 자리를 잡고 오늘의 연공을 시작했다.

대폭 향상된 오러의 회전속도 덕분에 나는 연공이 예전보다 몇 배는 빨라졌다. 덕분에 내가 연공을 마치고 깨어났을 때도 스승님은 아직 연공 중이셨다.

그런데 스승님의 좀 달라 보였다. 내가 아니면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조금 젊어지셨다고 해야 하나?

이미 7성에 오르면서 40대 중반 정도로 보일 만큼 상당히 젊게 변하셨지만, 평소보다 약간 더 젊어지셨다고 해야 하나?

나는 조용히 스승님의 연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꽤 긴 기다림 끝에 스승님이 눈을 뜨셨다. 스승님은 눈을 뜨자마자 감탄하셨다.

“이것은 정말 굉장하구나.”

“뭔가 느끼신 것이 있습니까?”

“마나의 질이 다르다. 아니 아예 다른 마나라고 해도 되겠다. 네가 만들었던 영약이 효과가 좋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구나. 이것은 공기 자체가 영약이나 다름없다.”

겉으로는 잘 표시가 나지 않지만 지금 스승님은 굉장히 흥분하고 계셨다.

“그 정도입니까?”

확실히 효율이 많이 차이가 나긴 하지만 나는 익숙해져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그렇게까지 효과가 있다고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좋은 것을 너만 알고 있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스승님이 드물게도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타박하자 나도 장난스럽게 과장된 동작으로 사죄했다.

“그런데 스승님 뭔가 달라지신 것은 느끼지 못하셨습니까?”

“응? 나는 잘 모르겠구나 뭔가 이상이 보이더냐?”

“아주 미세한 차이이긴 합니다만 젊어지셨습니다.”

스승님은 검을 뽑아 검면에 비춰 외모를 확인하셨다.

“나는 잘 모르겠구나.”

“아주 미세한 차이입니다.”

“마나의 길을 열어주듯이 이곳의 마나에 오래 노출되면 그런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난 왜 동안이 아닌 거지? 동안을 말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슬라이트는 몰라도 자칼은 나보다 동안으로 보인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외모로만 생각하면 알 수 없지만 형의 외모를 생각하면 집안 내력이 좀 노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의 마나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건가?

“이곳은 정말 대단하고 신비한 곳이다.”

“네, 그렇지요.”

“지난번 네가 만든 영약의 효과를 보고도 말했지만, 비슷한 말을 또 해야 하겠구나. 이곳의 가치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다. 이곳이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이용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당장은 수없이 많은 기사와 마법사들이 실력을 향상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는?

“세상의 균형이 무너집니다.”

“그렇다. 이미 이곳에 들어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곳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 내가 대단한 현자나 학자는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왕국에 널려있는 6성 기사들을 전부 7성 기사로 승급시킨다고 생각해보자. 당장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피와 비명으로 가득한 세상은 이미 겪은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자꾸나.”

“네”

스승님과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동이 트기 시작할 때였다. 나와는 다르게 스승님은 불면증 같은 것이 없으신 분이다.

경지에 오른 무인치고는 평소에 잠도 꽤 많은 분이다. 잠이 드신 스승님은 결국 오전에 깨어나지 못하셨다.

그사이에 나는 한동안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는 대련을 하고 있었다.

먼저 기대했던 스테이시와의 대련은 조금 일방적으로 끝이 났다. 스테이시의 캐스팅 없는 연사 마법은 나에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일전에 슬라이트와 스테이시의 대련을 보지 못했다면 모르겠으나 이미 전법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물론 대련이 아니고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결투였다면 스테이시도 치명적인 마법을 사용했을 테니 결과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대련에서는 쉽게 스테이시의 마법을 파훼할 수 있었다.

[그건 반칙이에요.]

대련이 끝난 후 스테이시가 항의했다.

“뭐가?”

[올라프 후작님처럼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 말이에요.]

오늘은 재생력을 믿고 올라프 후작처럼 온몸에 오러를 두르고 전차처럼 밀고 들어가는 방법을 사용해 보았다. 스테이시의 전법의 대처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올라프 후작님도 반칙인가?”

[몰라요. 아무튼 반칙이에요.]

그럼 다음엔 지글러 후작을 흉내 내서 마법을 전부 회피하는 전술을 써보도록 해야겠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스테이시와 대련을 마치자 6성에 오르고 난 후로 칼을 갈고 있던 야생의 슬라이트가 나타났다.

그리고 슬라이트의 뒤에는 자칼이 반쯤 숨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기꺼이 도전을 받아주었다.

“둘이 한꺼번에 덤벼라.”

“건방진!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마”

슬라이트와 자칼이 이를 악물고 덤벼들어 시작했다.

같은 경지라고 해서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은 6성의 경지지만, 슬라이트와 자칼 그리고 나 사이에는 꽤 차이가 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성장’이 붙어있다. 이제 성장에 관해서는 천재들에게도 그리 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

공격적이고 화려한 기술을 쓰는 슬라이트와 방어적이면서 기본에 충실한 자칼의 조합은 이보다 더 좋은 대련 상대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 둘이 상식을 파괴하는 미친 천재 놈들이라는 것이었다.

대련 초반에는 압도적인 내 우세였다. 중반까지만 해도 그랬다. 내가 적당히 힘을 빼주고 상대해줄 정도였다. 그것을 느꼈는지 둘은 더욱 이를 갈며 덤벼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놈들이 내 움직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내가 ‘성장’을 통해 강해지는 속도보다. 아무 능력도 없는 이놈들이 성장하는 속도가 더 빠른 모양이다. 이거 어떻게 보면 변이체보다 무서운 놈들이 아닐까?

적당히 상대해줄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진심으로 힘을 내서 대련을 금방 끝내버렸다. 시간을 더 끌어서 이놈들이 적응할 시간을 줬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깝네”

“응”

이놈들이 내 의도를 눈치채고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다음에는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지 말아야겠다.

대련을 끝내고 둘러보니 정원사들은 여전히 나의 선택을 받기 위해 소처럼 일하고 있었다. 덕분에 황무지 같았던 저택의 마당이 귀족이 사는 집처럼 보이고 있었다.

“오늘도 수고가 많아요.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걱정 마십시오. 왕궁처럼 꾸며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듯이 던진 말에 반응이 아주 좋다. 일이 끝나고 나면 둘에게 기다리고 있을 미래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겠지만 자업자득이 아니겠는가?

오후에는 잠에서 깨어난 스승님과 함께 지구로 들어갔다. 스승님께서는 직계 제자에게만 전수하는 기술을 가르친다면서 지하의 개인 수련장에서 따로 수련한다는 핑계를 만들어오셨다.

낮에 들어온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고 태백시에서는 처음이었다. 태양이 하늘 위에 있을 때 본 태백시는 밤에 볼 때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악마를 막아내지 못하면 우리 세상도 이곳처럼 된다는 것이구나.”

스승님이 끝없이 펼쳐진 폐허를 둘러보며 한탄하듯이 말씀하셨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러니 마신교를 막아야 하죠.”

지구는 그렇게 멸망했다. 기껏 새로 태어난 세상이 다시 그렇게 되는 꼴을 볼 수는 없다.

“마신교의 교주라는 자는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살아있을 겁니다. 제가 본 악마들은 아주 질긴 녀석들이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강한 마왕의 강림체라는 녀석인데 아무리 대륙 한부분이 날아갈 정도였다고 해도 죽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큰 피해를 보고 어딘가 숨어서 회복하고 있을 수는 있겠지요.”

미국에서 핵을 맞고도 멀쩡하게 걸어 나왔다는 변이체도 있었다.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마왕이라 불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살아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럼 이제 어쩔 생각이냐?”

“바로 이동해야지요. 스승님이 함께 계시는데 두려운 것이 있겠습니까?”

아귀의 시체가 꽤 남아있어서 공벌레에게는 미안하지만 붙잡아 지하실로 밀어 넣고 스승님과 태백시를 떠나기 시작했다.

멸망한 지구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이제 혼자가 아닌 둘이다. 언젠가 셋이나 넷이 될 수도 있을까?

언젠가 변이체들을 모두 해치우고 나서 지구에 새로 집을 짓고 믿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들이고 작은 마을을 만들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상상도 잠시 해보았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아주 먼 훗날이 되겠지만, 상상만으로도 조금 즐거워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