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돌개미
태백시를 빠져나와 남서 쪽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일단 목적지는 안동시로 정했지만 바로 그곳에 바로 길을 찾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냥 방향을 그쪽으로 잡았을 뿐이다.
“아까 그 도시뿐만이 아니라. 이곳은 정말 황량하구나.”
폐허가 된 태백시를 벗어나서도 황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끔 보이는 아주 오래된 고목을 제외하고는 풀 한 포기도 없고 벌레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세계다. 마치 서서히 생명을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
몇그루 남지 않은 고목들마저 사라지면 그렇게 지구에서는 모든 생명이 사라질 것이다.
“악마를 막아내지 못한 대가겠죠.”
“그래, 과거에 용사들이 마왕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다고 우리 세계도 이렇게 변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랬을지도 모른다. 비록 침공하는 방식이 달랐지만, 결과는 같지 않았을까?
스승님과 서너시간을 빠르게 이동한 후에 저녁이 되자 챙겨왔던 재료로 간단한 요리도 했다. 본래 요리에는 소질이 없지만 이번에 거물 손놈들을 맞이하며 요리를 준비하며 간단한 스튜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 재료를 따로 챙겨뒀었다.
물론 여기에는 고향의 맛도 첨가했다. 어지간히 똥손이 아니라면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다행히 내 손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허허! 이건 나름 별미로구나.”
스승님이 즐거워하셨다. 야외에서 먹는 고향이 맛이 들어간 스튜, 이것은 마치 야외에서 먹는 라면과 같은 마력이 있었다.
갑자기 라면이 먹고 싶다. 지구에 남아있는 라면은 당연히 없을 것이고 개발을 해야 하나? 한번 마사와 제이시에게 제품 개발을 의뢰해 봐야겠다.
그렇게 즐거운 저녁을 먹고 집으로 귀환했다. 저녁을 이미 대충 때웠다는 말에 조금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대충 넘어갔다.
나 혼자였다면 슬라이트 놈이 귀찮게 굴었을지도 모르지만, 스승님이 함께였으니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
다음 날은 오전부터 지구로 넘어가 어제와 달리 조금 느긋하게 걸었다. 주위는 여전히 살풍경한 광경만 보여주고 있었지만, 거의 흔적만 남아있다시피 한 철로나 도로도 스승님에게는 나름 신선한 경험인 듯 했다.
기차 철로의 흔적을 보시고서
“이곳도 마도 기차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라고 하시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자동차의 잔해를 보시고서
“이곳에도 마동차가 있었던 것인가? 나름 발전된 문명이었던 모양이다.”
라고 하시는 말씀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지구가 아노더스보다 월등한 문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기차나 자동차가 저쪽 세계의 마도 기차나 마동차보다 월등한 기계였을까? 성능만 따지자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마도 기차나 마동차는 공해가 없는 이동 수단이다.
태평양에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쓰레기 섬이 생겨나고 대기오염으로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외출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었다. 어쩌면 변이체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지구의 인간들은 스스로 멸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과학 문명이 만들어낸 무기로는 변이체들을 막지 못했지만 다른 것을 발전시킨 아노더스는 용사들이 아무리 규격 외의 인간들이었다고 해도 두 번이나 막아냈으니까. 이쯤 되면 아노더스가 좀 더 발전된 세계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나름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곤 흔적만이 아스라이 남아있는 아스팔트 포장길과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돌덩이들 그리고 가끔 보이는 고목들이 전부인 풍경이 이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런 풍경을 옛날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결코 최근의 기억이 아니었고 아주 오래전 기억이다. 그리고 결코 기분 좋았던 기억이 아니었다.
“스승님 잠시만요.”
스승님을 일단 불러세우고 주변을 둘러봤다. 사실 볼 필요도 없었다. 범위가 훨씬 넓어진 초감각으로 모두 느끼고 있었으니까.
돌덩이들, 내가 느끼는 기시감은 바로 돌덩이들 때문이었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일정한 크기와 모양의 돌덩이들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
스승님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아공간에서 꺼내두지 않았던 악마 추적기를 꺼냈다. 스승님과 함께 여행하는데 무슨 큰일이야 있겠나 싶은 생각도 있었고 범위가 넓어진 초감각이라면 악마 탐지기가 별로 필요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한마디로 방심했다. 악마 추적기를 꺼내자마자 나침반 형태의 추적기의 바늘이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지 않고 쉴 새 없이 빙글빙글 돌며 진동을 보내고 있었다.
변이체가 아주 가까이 그리고 스승님과 내 주위의 전 방향에 널려있다는 뜻일 것이다.
“악마가 가까이 있습니다.”
내가 말을 하기 무섭게 주변에 널려있던 돌덩이들이 마치 기지개를 켜듯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세기도 힘들었다. 수백 아니면 수천일지도 몰랐다.
여태까지 아무 신호도 보내지 않고 있던 위험감지가 격렬하게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대격변 이후로 생존하며 나에게 수많은 위험이 찾아왔지만 그중 가장 위험했을 순간을 뽑으라고 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이번과 같은 이유다. 위험감지는 내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간혹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다.
생존자들에게 모든 변이체는 죽음의 사신과 같다. 그런데 어떤 변이체는 피하기 수월한 것이 있고 어떤 것은 어려운 것이 있다.
그중 가장 피하기 어려운 변이체가 바로 스승님과 내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지금과 같이 완전히 돌이 되어 숨을 죽이고 있다가 완전히 포위되었다고 생각할 때쯤 움직이기 시작하는 녀석들이다.
일명 돌개미라 불렸던 변이체들이다. 변이체 중에서는 특이하게 집단으로 움직이는 녀석들이다. 개체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은 녀석들이라 변이체들이 약해지고 사라지는 와중에 이 녀석들이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예상을 완전히 박살 내고 그야말로 돌이 되어 그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돌개미는 아마도 개미가 변이체로 변이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생긴 것은 개미와 전혀 닮지 않았다. 일단 외부가 진짜 돌로 덮여있고 크기는 진돗개 크기 정도다. 거기에 4족의 굵은 다리가 달려있다.
둔중해 보이지만 움직이는 것은 변이체답게 무척 빠르다. 그래서 한번 포위된 인간은 빠져나가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나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과거에 해낸 적이 있지만 같은 포위되었던 30여명의 생존자는 그렇지 못했다.
이 녀석들이 나에게 가장 까다로웠던 좀은 돌로 변해있을 때 위험감지가 이 녀석들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놈들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스승님은 검을 꺼내며 오히려 즐거워하고 계셨다.
“저도 예상 못했습니다.”
조금 놀랐지만 나도 여유가 있다. 아무리 돌개미의 숫자가 많다고 한들 내 곁에는 스승님이 계시다. 돌개미도 확실히 괴물이긴 하지만 7성 기사는 그보다 더한 괴물이다.
그리고 난 과거의 강한수가 아니다. 이제 예비 괴물 정도는 되는 빅터 하네스다.
수가 많다고 하지만 개체 하나로 보면 변이체 중에서 거의 최약체에 가까운 녀석이다. 그렇게 알고 있긴 하다. 물론 과거에는 이 녀석들과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다. 강한 전투 능력을 가진 생존자들도 이 녀석들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이야기를 했기에 숨길 것 없이 슈바르거트를 꺼냈다.
“오, 그것이 광검제의 검이더냐?”
“그렇습니다.”
“과연 겉모습부터 다르구나.”
하긴 그렇긴 하다. 검신이 시뻘건 색인 검은 어디서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그래서 바깥에서는 영원히 쓰지 못할 것 같지만, 이곳에서는 문제없다.
“온다.”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일어난 수백의 돌개미들이 준비 운동도 필요 없는지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스칵! 스칵!
7성 기사는 수십 년을 굶주려 미친 듯이 달려드는 돌개미들의 사이를 마치 산책하듯이 걸어 다니며 토막을 내기 시작했다.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하나의 돌개미가 토막이 나서 바닥을 뒹굴었다. 물론 그렇다고 금방 죽는 녀석들이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움직이진 못한다.
나 역시 슈바르거트에 오러를 잔뜩 먹여 돌개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스승님처럼 여유 있게 움직이며 멋들어지게 사냥하진 못한다. 그래도 달려드는 녀석들을 차례로 토막 내주는 것은 가능했다.
“백룡이 방어!
거기에 나는 백룡이라는 아주 좋은 방패도 있다. 커다란 방패가 된 백룡이가 사각지대에서 달려드는 녀석들을 강하게 밀쳐냈다.
“호오, 그것이 영지의 던전에서 얻은 물건이라고?”
“네, 지난번에 왕궁에서 보여드릴 때는 저도 사용법을 몰랐습니다.”
“좋은 물건이다. 하지만 너무 의지하는 습관을 들이진 말거라.”
우리는 전투하며 대화할 여유까지 있었다. 그래도 물량의 힘이라는 것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처음엔 수백 정도로 보였던 돌개미들이 어디서 튀어나오는 것인지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모양이다. 땅속에 숨어있던 녀석들도 있었어.”
나보다 여유가 있는 스승님이 먼저 알아차리시고 전해주셨다. 나도 조금 늦게 초감각으로 근처를 쓸어보니 아직도 땅속에 잠자고 있는 녀석들이 꽤 많았다.
“아직 많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길을 뚫으마. 따라오거라.”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수십겹으로 둘러싸인 돌개미의 포위망을 스승님이 뚫기 시작하셨고 나는 스승님의 등 뒤를 지키며 따라가기 시작했다.
전에는 도망치느라 바빠서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돌개미 놈들은 마치 군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스승님이 포위망을 뚫는 만큼 합류하는 녀석들이 그곳을 메꾸고 있었다.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협동하며 일종의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자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이것들이 만약 진짜 개미에서 변이한 녀석들이라면 이 녀석들을 조종하는 여왕개미 같은 것도 있지 않을까?
스승님을 따라가며 나는 이 생각을 스승님에게 말씀드렸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과거 마왕의 침공 때도 지휘관급의 악마가 있었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이 녀석들이 비록 열등해 보이지만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럼 내가 시간을 끌어볼 테니 네가 찾아보겠느냐?”
“네, 한번 해보겠습니다.”
초감각을 사용한다면 여왕개미를 찾는 것은 내가 스승님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스승님이 한방향으로 포위망을 뚫던 것을 멈추고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속도를 내기 시작하셨다.
스칵! 스칵! 스칵!
주변에 있는 놈들을 무차별적으로 빠르게 베기 시작하자 돌이 잘리는 소리가 연속으로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나를 보호하듯이 스승님이 빠르게 움직여 나에게 부담을 줄여주는 동안 나는 초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만약 정말로 돌개미들의 지휘관이 여왕개미라면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진 않을 것이다. 본래의 습성대로 땅굴 깊숙한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땅속의 돌을 찾아낸다. 녀석들이 완전히 돌로 변해 있을 때는 그것이 진짜 돌인지 아니면 돌개미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먹이가 나타났는데도 참을 수 있을까? 내가 아는 변이체라는 놈들은 절대 그럴 수 없다. 분명 어딘가에서 깨어나 있을 것이다.
초감각이 주변의 땅속을 샅샅이 탐색한다. 깊이, 더 깊이 헤집었다. 초감각이 닿는 거리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보통의 돌개미보다 몇 배는 큰 녀석이 느껴졌다.
“찾았습니다!”
나는 소리쳤다. 찾기는 했지만 내 실력으로는 단번에 닿을 수 없는 너무 깊은 땅속이다. 시간과 여유가 있다면 파낼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상황이 녹록지 않다.
“그런데 너무 깊습니다.”
“어디냐?”
나는 달려드는 녀석을 하나 베어낸 후 단검을 하나 꺼내 여왕개미가 숨어있는 곳의 지점을 향해 힘껏 던졌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중간에 돌개미들이 몸을 던져 막아냈다. 확실히 여왕개미가 녀석들의 약점은 맞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
“백룡이 바늘로”
아귀를 쓰러뜨리는 데 큰 공을 세웠던 백룡이의 투장 모드가 발동되었다. 거대한 바늘로 변한 백룡이가 내 오러를 잔뜩 빨아먹고 쏘아져 나갔다.
백룡이를 막기 위해 몸을 날리는 돌개미들의 몸은 백룡이를 막아내기에는 너무 약했다. 돌개미들의 단단한 암석 재질의 몸을 종이처럼 뚫고 나간 백룡이가 내가 노린 장소에 정확히 도착했다.
“좋아 확인했다. 이제 네가 나에게 시간을 벌어다오.”
스승님의 지시에 백룡이를 다시 부르고 나는 스승님과 나에게 달려드는 돌개미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스승님이 검을 치켜세웠다. 저 자세는 며칠 전 공작이 보여주었던 거대한 오러의 검을 만들었던 바로 그 자세였다.
“한번 보니 나도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더구나.”
스승님이 싱긋 웃으며 집중하기 시작했고 푸른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급격하게 몸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