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16화 (116/206)

116. 보물 찾기

국왕을 따라 왕궁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국왕을 따르는 수행 인원은 없었다. 호위 기사는 국왕 본인이 강하니 없어도 된다 치지만 수발을 들 사람조차 따라붙지 않는 것은 조금 특이하게 생각됐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는 관리나 고용인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국왕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며 국왕의 자리도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국왕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이 넓은 왕궁과 수많은 사람 중에 편하게 국왕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혹은 국왕이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왕비와 왕세자 정도가 전부 아닐까? 왕실 외부의 사람이라면 에인프라흐 공작이나 지글러 후작이 전부일 것이다.

외로운 자리다. 막중한 책임이 걸린 자리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저 자리를 노리는 야망가들은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냥 준다고 해도 사양한다. 뭐하러 그런 힘들고 어려운 길을 택하겠나. 나와 내 주변 사람들 챙기기도 힘든 세상이다.

“그러고 보니”

말없이 앞에서 잘 걸어가던 국왕이 갑자기 멈추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검지 손가락으로 정확히 내 이마를 찔러 왔다. 아무 적의는 느껴지지 않지만 찌르는 속도가 심상치 않다.

8성 기사가 손가락으로 찌르면 바위도 뚫린다. 무방비하게 저것에 찔리면 죽는다는 소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여 국왕의 손가락을 피했다. 아마 돌개미의 능력을 흡수해 초감각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국왕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음을 알았다. 처음부터 국왕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방금 그 동작은 무엇이었을까?

“자네 눈을 떴군?”

국왕이 눈웃음을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환상을 봤을 뿐입니다.”

방금 그것은 지난번 우리 집에서 대련 때 에인프라흐 공작이 하늘에 닿을듯한 검을 보여준 것과 같은 환상이었다.

“이것은 경지와 상관없는 일종의 재능이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자도 있고 자네처럼 나중에 눈을 뜨는 사람도 있네.”

언제 내가 그런 재능에 깨우친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기만 해도 아시는 겁니까?”

“아니 나라고 해도 그렇게는 못 하지 아르옌이 알려주더군.”

에인프라흐 공작의 이름이다. 너구리 같은 노인네 역시 지난번 검을 보여줄 때 나만 반응한 것을 봐두었다가 국왕에게까지 말을 한 모양이다.

“그런 재능을 가진 자가 많이 있습니까?”

“많다고 볼 순 없네. 그런 재능을 가진 자들이 보통 뭐라고 불리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검귀라고 불리네. 자신보다 몇 단계 위의 경지를 가진 사람도 쓰러뜨리고는 하지. 그래서 이상한 길로 빠지는 사람이 많아.”

역사책만 봐도 검귀라 불렸던 사람이 수십명은 나온다. 그리고 검귀라 불렸던 검사들은 끝은 대부분 좋지 않다.

“자네야 이미 경지에 오른 사람이고 좋은 스승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 눈을 뜬 사람 중 바른길을 걷게 된 사람들은 다른 이명을 얻는다네”

“그것은 무엇입니까?”

“검성이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답이었다. 이미 에인프라흐 공작이 검성이라고 불리고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피한 것은 예상외였네.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거든. 자네의 눈은 조금 더 특별한가 보군. 아니면 반응이 좋은 건가? 어쨌든 그것도 좋은 재능이네.”

“폐하와 공작님은 눈을 뜨셨군요.”

“그렇지. 하지만 지글러나 올라프 그리고 자네 스승인 노엘도 눈을 뜨진 못했지. 아니 반쯤 떴다고 봐야 하나?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되네 자네는 조금 일찍 눈을 뜬 셈이지.”

그런데 이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라고 느껴졌다. 만약 상대가 공작이나 국왕이라면 조금 전의 그 환상에 꼼짝없이 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렇군요. 몰랐던 것을 깨우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 지금 그것이 생각보다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지?”

뭐지 독심술인가?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네. 나도 다 겪었던 일이니까. 어떻게 일찍 눈을 뜬 자들이 자신의 경지보다 높은 자들을 꺾고 검귀가 되는 줄 아는가?”

“모르겠습니다.”

“잘 보게 두 번은 보여주지 않으니.”

국왕이 빈손을 들었다. 그리고 팔만을 움직여 마치 검을 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나를 노리는 위협적인 움직임은 아니었다.

단지 팔만 움직일 뿐이지만 국왕의 움직임은 다른 강자들과 또 달랐다. 굳이 비슷한 사람을 꼽자면 자칼과 비슷했다. 자칼이 마치 거북이 같은 느낌이라면 국왕은 거대한 성벽에서 칼이 튀어나오는 느낌이다.

국왕은 일부러 아주 천천히 움직여줘서 그런지 몰라도 검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초감각이 진화해서 생긴 능력과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국왕은 그렇게 몇 번 더 검로를 보여주고는 멈췄다.

“보았는가?”

“예, 감사합니다.”

“검을 길을 보았는가?”

“예, 보았습니다.”

“자네는 나나 아르옌보다 적응이 훨씬 빠르군. 우리는 처음 눈을 떴을 때 이것이 뭔지도 몰랐는데 말이야.”

“잘 알려주신 덕분입니다.”

나도 국왕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면 오래 걸렸을지도 모른다.

“검의 길을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세. 지금 여기서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집에 가서 내가 보여준 것을 따라 해보게.”

“아···!”

“그래서 바로 검귀라 불리는 것일세.”

곧바로 이해했다. 내가 지글러 후작이나 올라프 후작을 쉽게 따라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성장’의 능력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성장을 통해 눈을 뜨게 되어 여러 사람의 검술을 쉽게 흉내낼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내가 왜 자네에게 이런 것을 알려주는지 알겠는가?”

“그저 황송할 뿐입니다.”

“자네 입장에서 보면 불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이해하고 있네, 하지만 나나 왕세자나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네. 부디 라이브러쉬를 위해 그 힘을 사용해주게나.”

“명심하겠습니다.”

이른바 미래에 대한 투자인 걸까? 내가 미래의 에인프라흐 공작이 되어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쁜 제안은 아니다.

큰아들인 슬레이프 백작이 열심히 일하는 덕분이기는 하지만 에인프라흐 공작처럼 자유롭게 여행이나 다니면서 책임없는 권력을 누리는 것도 제법 괜찮은 미래다.

“그럼 가지”

국왕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기나긴 왕궁의 복도를 지나고 왕궁의 정원을 지나 도착한 곳은 따로 지어져 있는 장식 하나도 없이 단단해 보이는 구조물이었다.

입구를 지키고 있던 기사 둘이 국왕을 보자마자 경례를 올렸다.

“수고가 많아. 문을 열어주게.”

국왕의 명에 기사들이 육중해 보이는 철문을 열자 좁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들어가지.”

국왕과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사들이 곧바로 문을 닫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좁고 긴 복도가 어둠에 휩싸였다.

“여기까지는 딱히 비밀인 것도 아니네. 이곳까지 들어왔던 세작도 몇번이나 있었지.”

어둠 속에서 국왕이 말했다. 그러나 국왕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다.

벽을 열고 그곳에 있는 기관을 이리저리 작동시키니 낮음 소음을 내며 복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암테일 영지의 던전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여기까지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국왕은 마치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이윽고 움직이던 복도가 멈추는 순간 주변이 밝아졌다. 그리고 복도 끝에 출구가 보였다.

“가지”

국왕을 따라 복도를 벗어나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거대한 문 가운데 있는 작은 구멍에 국왕이 손을 집어넣었다가 빼자 거대한 문이 좌우로 열리기 시작했다.

“나만이 열 수 있는 문이라네.”

국왕이 싱긋 웃으며 자랑하듯이 말했다. 국왕이 손을 넣었던 곳이 내부구조는 초감각으로도 쉽게 읽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 같은 이들을 대비한 장치가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왕실의 보물창고에 도둑질할 생각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는 이곳까지 오면서 3번을 속았다네”

진짜 독심술인가? 아니면 그런 아티팩트라도 가지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건 안 알려주지. 잘 생각해보게나. 하하!”

국왕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계략에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도둑질할 것도 아닌데 괜히 그런 것에 심력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국왕이 즐겁게 웃으며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말없이 따라 들어갔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봤던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해보니 바로 던전에서였다. 암테일 영지의 던전의 시험 중에 탐욕의 시험을 치를 때 보았던 방의 구조와 똑같았다.

“여기가 라이브러쉬 왕국의 1급 보고라네”

진열된 수백개의 물건들 앞에 선 국왕이 마치 물건을 소개하는 영업사원 같은 자세를 취했다.

“혹시 이곳은 제국의 유산이었습니까?”

“한눈에 알겠는가? 맞네. 아주 오래전 우리 선조님들이 발굴한 제국의 유산이지. 왕궁은 사실 그 위에 지어진 것일세.”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라이브러쉬도 애초에 왕족이 아닌 제국의 귀족 가문이었다. 다른 가문을 압도하고 왕이 되려면 그만한 힘이 뒷받침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제국의 유산이었던 모양이다.

“정확히 824종의 보물이 있지. 골라보시게 시간은 한 시간을 주지”

그러면서 입구 앞에 있던 탁자 위의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이러려고 미리 준비해둔 모양이다.

갑자기 시간제한을 두는 건가? 아니 국왕이 직접 기다려주는 것이니 오히려 넉넉히 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824종이나 되는 건가? 보물이 많다고 얘기를 듣긴 했지만, 내 예상보다 훨씬 많다. 이러면 고르는 데 문제가 생긴다.

보물을 보는 안목은 없으니 나는 사이코 메트리에 의지해야 한다. 기회는 3번이다. 무리한다면 4번까진 가능하겠으나 며칠 앓아누울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자자,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기만 할 건가? 시간은 이미 흐르고 있다네”

국왕이 장난스럽게 독촉하자 나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조는 한번 봤던 만큼 아주 낯설지는 않다는 것이 조금 유리한 부분이었다.

‘슬라이트가 중간쯤에 제일 좋은 것이 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신빙성은 낮다고 봤다. 그런 좋은 물건이 중간쯤에 있다는 것을 공작이 알았다면 본인이 가지고 나가지 않았을까?

나는 빠르게 진열대 사이를 오가며 물건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설명은 없지만, 다행히도 보물들에 이름은 표시되어 있었다.

윙갈로움의 투구, 아므세데스의 금장 방패 등 역사책에서 이름은 봤던 위인들의 이름이 붙은 물건이 보였다. 하지만 저것들이 무슨 능력을 가진 것들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내가 천재도 아니고 봤던 기억이 있는 것이지 책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진 못한다.

그 외에는 언뜻 보기에도 흉흉한 기운을 뿌리고 있는 창이나 인간의 유골로 만들어진 의자 같은 것도 있었다.

모두 나에겐 쓸모없는 것들이다. 일단 나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이라고 치면 역시 검이다. 지구에서는 슈바르거트를 사용할 수 있으나 아노더스에서는 슬라이트가 선물로 줬던 검이 가장 좋은 검이다.

그래서 검 위주로 찾다 보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마치 위치로 슬라이트가 말해줬던 중간쯤이다.

-스트라이더 550번 샹글레의 검

스트라이더 시리즈라고 하면 일단 일정 이상의 품질을 약속하는 보증수표나 다름없다. 물건에 걸린 마법은 둘째치고라도 물건 자체가 상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건에 손을 대도 괜찮겠습니까?”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라는 것만 명심하게”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국왕이 허락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검의 품질을 살피는 것처럼 스트라이더 550번을 들어 올렸다.

검을 들자마자 알 수 있었다. 손에 착 감기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이것은 좋은 검이다. 어떤 마법이 걸려있는 줄은 몰라도 그냥 검 자체로 좋은 검인 것이다.

검에 집중했고 곧바로 스트라이더 550번에 저장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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