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17화 (117/206)

117. 아스트로퍼

“이건 어때?”

스트라이더 시리즈가 늘 그렇듯이 제작자인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누군가에게 방금 막 완성시킨 검을 내밀고 있었다.

다만 내가 여태까지 보아왔던 스트라이더 900번대가 아닌 550번이라 그런지 상당히 젊은 모습이었다.

“이건 뭔데?”

샹글레의 검을 받아든 사람은 다름 아닌 지르크 폰 가이스트, 광검제였다. 광검제의 외모는 이때도 똑같았다.

“바람 마법을 부여한 검이야.”

광검제가 받아든 검을 아무렇게나 휙휙 휘두른다. 그러자 검에서 엄청난 돌풍이 일어나며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작업실을 아수라장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의외로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그런 것쯤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저 광검제가 하는 것을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기대하고 있는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를 배신이라도 하듯 광검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아주 짧고 간결했다.

“별론데?”

“그래?”

광검제의 평가에도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개의치 않았다.

“응, 내가 쓰기엔 별로야.”

“그럼 그건 황제에게 비싸게 팔아먹어야겠다.”

기억이 끝났다. 잡자마자 아주 좋은 검이라고 생각했는데 광검제가 별로라고 하니 고르려던 마음이 사라졌다. 일단 시간과 기회는 남아있으니 더 좋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것을 선택해도 된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내가 조심스럽게 검을 다시 내려놓을 때 옆에서 국왕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 검은 별로인가?”

이 양반은 기척을 없앨 수도 있는 건가? 다가오는데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아니요. 좋은 검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더 좋은 것을 찾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검을 찾는 것이라면 내가 하나 추천해줘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한껏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는 국왕이 추천해준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국왕은 몇 걸음 옆으로 옮겨가더니 그곳에서 새하얀 검신을 가지고 있는 검 앞에서 멈췄다.

“이것은 어떤가?”

다가가 살펴보니 하이버니아의 송곳니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검이었다.

“그냥 보기만 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이버니아의 전설을 모르는가?”

하이버니아의 전설은 꽤 유명한 옛날얘기다. 워낙 여러 가지 전설이 있고 이야기마다 외모를 묘사하는 것인 전부 달라 생김새가 정확히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국이 생기기도 훨씬 전 아주 오래전에 대륙에 살았었다는 거대하고 강력한 생물이었다. 지구로 치면 전설로 전해지는 용이나 드래곤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압니다만 그것과 관련이 있는 물건입니까?”

“말 그대로 하이버니아의 송곳니를 깎아서 만든 검이라네 이 보고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물건이지.”

국왕의 말이 정말이라면 이 검은 몇천년 전의 물건이다. 그리고 하이버니아가 실존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슬라이트가 말해준 1급 보고에서 가장 좋은 물건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일까? 하지만 내겐 쓸모가 있는 검이 필요하지, 가치가 높은 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하이버니아의 송곳니는 형태부터도 현재는 잘 사용하지 않는 고대의 검 형태였다. 보통 검보다 꽤 길이가 긴 검이었지만 막상 들어보니 무게가 그리 나가지는 않았다. 금속은 아니다. 무언가의 뼈로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런데 검을 든 순간부터 좋은 검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슈바르거트도 보통의 다른 검보다 검신이 긴 편인데 하이버니아의 송곳니는 그것보다 한 뼘은 더 길다. 그리고 너무 가벼웠다. 결정적으로 검의 중심이 잘 맞지 않는다. 검 자체로 잘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전설의 하이버니아를 볼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지만, 기억을 읽는 것도 참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좋은 검이다.

내가 하이버니아의 송곳니를 내려놓자 국왕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폐하께서 추천해주셨지만 저에겐 맞지 않는 검은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보고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네.”

“저는 가치 있는 물건보다 쓸모있는 물건을 원합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하고 더 좋은 검을 찾기 시작했다. 1급 보고에는 생각보다 검이 많지 않았다. 그 중 몇 개는 들어보았지만, 검의 길이나 무게가 나와 맞지 않았고 어떤 것은 너무 낡아서 휘두르지도 못할 것 같았다.

구석에 버려지듯이 떨어져 있는 낡은 검도 한 자루 있었다. 전생에 읽었던 소설에서 보면 이런 검들이 녹을 벗겨내면 전설의 신검이 되곤 하는데 이것은 살펴보니 정말로 그냥 녹슨 검이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1급 보고의 거의 끝부분에 도달했을 때 눈에 띄는 검 한 자루가 있었다.

-스트라이더 789번 프레이기스

믿고 쓰는 스트라이더 시리즈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아도 결국 550번의 샹글레의 검을 선택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새로운 스트라이더 시리즈의 검이 나타난 것이다.

프레이기스는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아주 화려한 손잡이를 가지고 있는 검이었다. 그냥 딱 봐도 최소한 보검이다. 하지만 가치로 따지자면 국왕이 추천해주었던 하이버니아의 송곳니가 수천 배는 더 비쌀 것이니 내가 고르는 기준은 가치가 아니다.

그건 그렇고 하이버니아의 송곳니를 거절했을 때부터 말없이 계속 따라다니는 국왕이 무척 신경 쓰였다.

그러나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프레이기스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도 샹글레의 검을 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이것은 다른 기능이 없다고 해도 검 자체로도 매우 잘 만들어진 검이다. 도대체 제국의 장인들을 얼마나 닦달해야 이런 보물들을 1000개나 만들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제 국왕이 제시했던 1시간까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잡념을 비우고 곧바로 기억을 읽었다.

이번에도 등장인물은 같았다. 도대체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와 광검제는 같이 동거라도 한 것일까? 아무리 같은 용사였다고 하지만 어떻게 거의 모든 기억에 같이 등장하는 거지?

“이건 어때?”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프레이기스를 광검제에게 건넸다. 광검제는 검을 받아서 들고 지난번처럼 아무렇게나 검을 마구 휘둘렀다. 그러자 검에서 초록빛이 뿜어져 나오며 광검제의 몸을 감쌌다.

“좋네.”

광검제에게서 좋다는 말이 나왔다. 진짜로 대박을 하나 건진 건가 생각하는 순간에 광검제가 턱짓으로 한쪽 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저게 더 좋다.”

광검제가 가리킨 곳에 있는 물건이 시선을 끌었다.

“저거? 네가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는데 안 쓴다며”

“내가 생각했던 것과 좀 달라서 그래. 그래도 잘 만들었어.”

광검제가 가리킨 곳에 있던 물건이 시선을 끌었다. 거기서 기억이 끝났다.

그렇지만 광검제가 더 좋다고 했던 물건은 검이 아니다. 그래도 광검제가 제작을 의뢰했던 물건이라니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바로 옆에 그 물건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스트라이더 799번 아스트로퍼

프레이기스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것이 놓여있었다. 워낙 눈에 띄는 물건이라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태는 나에게는 아주 익숙하다. 이쪽 세계 사람에게는 그냥 특이하게 생긴 팔찌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저것이 무엇을 만들려고 했던 것인지 알고 있다.

넓적한 사각형의 평면에 금속 체인의 밴드가 달려있는 물건, 바로 스마트 워치였다. 광검제가 지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이코 메트리는 두 번을 사용했다.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기회는 한 번이다. 만약 실패한다 하더라도 여차하면 프레이기스를 골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아스트로퍼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아마도 스마트 워치를 만들려고 했다가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 물건의 근처에 다가갔을 때 반지 형태로 변해 있던 백룡이가 움직였다.

갑자기 뱀으로 변해 손목까지 타고 올라온 백룡이가 온몸을 사용해 아스트로퍼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아스트로퍼와 백룡이의 재질이 비슷해 보였다.

“저걸 고르자고?”

백룡이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호오? 자네가 아니라 그것이 물건을 골라주는 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따라다니기만 하던 국왕이 도발하듯이 끼어들었다.

“의견을 참고할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검이니까. 이것을 고르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아스트로퍼를 집어 백룡이가 있는 팔목에 착용하자 말릴 사이도 없이 백룡이가 아스트로퍼에 스며들듯이 들어가 버렸다.

“어? 뭐해? 나와”

잘못하면 이건 반품도 되지 않는단 말이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룡이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아스트로퍼에 전원이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는 그저 사각형의 금속판이었던 부분에서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한 작은 아가씨가 튀어나왔다. 그것이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다.

-안녕? 나는 아스트로퍼야.

외모는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를 완전히 빼닮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아스트로퍼라고 소개했다.

“아, 그래. 반가워 그런데 백룡이를 나오라고 해주겠어?”

-그건 안돼. 그 아이가 지금 내 전원을 공급해주고 있거든.

“그러니까. 다시 전원을 꺼야 할 것 같아.”

-그건 싫은데?

인공지능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의외로 지능도 좀 있는 것 같다.

“호오, 그것이 그렇게 쓰는 물건이었던가?”

옆에서 구경하던 국왕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안녕? 너는 누구야?

아스트로퍼가 국왕에게도 인사를 했다.

“나는 호드라스 라이브러쉬라고 한다. 이 나라의 국왕이지.”

-그렇구나? 라이브러쉬는 공작가문인줄 알았는데 정보를 수정해야겠어.

아니 이거 생각보다 지능이 꽤 높은 것 같다. 광검제가 잘 만들었다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주문 제작까지 해놓고 가져가지 않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허허! 그것참 신기한 물건이군. 자네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면 나에게 양보하지 않겠나?”

“그러고 싶습니다만 일단 저 안에 들어간 제 물건이 나온다면 말이죠. 백룡아 빨리 나와.”

다시 한번 백룡이를 불러봤지만 백룡이는 나올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이러면 어쩔 수 없이 아스트로퍼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네 이름은 뭐야?“

아스트로퍼가 이번에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빅터 하네스다.”

-그래 빅터 하네스 입력했어. 너는 지금 좋은 검을 찾고 있었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백룡이가 알려줬어.

이것들은 서로 소통도 가능한 건가? 이걸 만든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가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였는지 실감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이와 비슷한 물건이 있다는 소문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찾을 필요가 없어.

“왜?”

-잘 봐

팔목에 감겨있던 아스트로퍼가 마치 백룡이처럼 형태를 변화시키더니 부피를 키우며 은색의 검으로 변했다.

손잡이를 잡아보니 그야말로 나에게 딱 맞춰진 검이었다. 단점은 백룡이가 크기를 키웠을 때보다 마나를 훨씬 많이 잡아먹고 있었다.

-이럼 된 거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려는 찰나에 다시 국왕이 끼어들었다.

“내가 다른 검을 추천해줘도 되겠나? 이번엔 정말 좋은 검을 추천해주지.”

국왕의 표정이 진지했다. 그렇다면 아까는 좋은 검이 아닌 것을 알고도 추천했다는 건가? 이래서 세상 믿을 놈이 없다는 것이다.

“아닙니다. 그냥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더 고른다고 해도 이보다 더 좋은 검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백룡이가 다시 분리되는지도 의문인 상황이다.

“아쉽구먼”

입맛을 다시는 국왕을 보니 역시 아스트로퍼를 고른 것이 맞는 선택 같이 느껴졌다.

보물을 고르는 일은 이렇게 끝이 났다. 들어갔던 순서의 역순으로 다시 나와 국왕의 집무실로 돌아오니 일을 벌써 마치신 건지 아니면 아직도 출발하지 않으신 건지 스승님이 계셨다.

“벌써 일을 마치셨습니까?”

“그래, 생각보다 금방 끝났구나.”

스승님의 안부를 묻는 순간.

-안녕? 너는 이름이 뭐야?“

다시 스마트 워치 모양으로 돌아가 있던 아스트로퍼가 갑자기 튀어나오며 스승니므이 이름을 물었다. 역시 광검제가 얘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냐?”

“제가 고른 물건입니다.”

-물건 아니야. 아스트로퍼야!

앙칼지게 따지는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모습을 똑 닮은 홀로그램을 보며 나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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