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원정 준비
“너 만나는 사람마다 그렇게 이름을 물어봐야 하는 거냐?”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그럼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줄래?”
-알겠어요.
아스트로퍼는 이번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스승님은 그런 나와 아스트로퍼를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지켜보고 계시다가 말씀하셨다.
“나는 노엘 브라스라고 한다.”
-반가워!
아스트로퍼가 어린아이처럼 팔짝팔짝 뛰며 손을 흔들어 스승님에게 인사했다.
“그래 반갑다. 제자를 잘 부탁한다.”
-제자? 빅터 하네스가 노엘 브라스의 제자야?
“그래”
-알았어. 빅터 하네스는 내가 맡을 테니 안심하라구!
이걸 그대로 놔두면 끝이 없을 것 같아 멈춰야 할 것 같았다.
“아스트포퍼 잠시 들어가 있을래?”
-알았어!
아스트로퍼의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그래도 이런 지시는 잘 들어서 다행이다.
“재미있구나.”
스승님은 마치 손녀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 모습이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의 실물과 똑같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그런 표정을 지으실 수 있으실까?
“나도 용도를 몰랐던 물건일세. 뛰어난 물건은 주인이 정해져 있다더니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 같군.”
국왕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어쨌든 좋은 검을 얻는다는 목적을 이뤘으니 나로서는 만족이다. 평소에 말이 많은 검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이것이 만약 진짜 스마트워치를 생각하고 만든 물건이라면 여러 가지 다른 기능도 있을 것이다.
“내가 갑자기 보고를 여는 시간을 앞당긴 이유를 짐작은 하겠지?”
“출발할 때가 생각보다 앞당겨진 모양이군요.”
스승님의 대답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멜아크쪽이 잔뜩 몸이 달아오른 모양이야. 그쪽에서도 예상 이상의 전력을 모았네. 아마 자네들에게 차례가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네.”
그렇다면야 환영이다. 그곳에 어쩌면 스트라이더 1000번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것은 아니니까.
“그래도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지. 출발은 앞으로 3일 후라네. 많이 앞당겨졌지, 레안드로가 직접 서신을 보냈을 정도이니까 말이야.”
제멜아크의 국왕이 직접 서신을 보냈을 정도라니 제멜아크가 급하긴 급한 모양이다.
“제멜아크의 원정대에 왕세자가 참가하기로 했다고 하네.”
“사활을 걸었군요?”
그 위험한 곳에 왕세자가 직접 들어간다고 나설 정도니 제멜아크에서 이번 던전 탐색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왕세자만 보낼 수는 없었는지 거기에 고든 바이런 후작이 참여하네.”
“흑기사가 말입니까?”
흑기사 고든 바이런 후작은 라이브러쉬 왕국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질 정도로 이름 높은 제멜아크의 기사다. 이미 적은 나이가 아니긴 하지만 8성에 곧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유망한 7성 기사다. 라이브러쉬로 비교해보자면 지글러 후작과 에인프라흐 공작을 섞어놓은 역할을 제멜아크에서 하고 있다.
제멜아크에서 꺼낼 수 있는 카드 중에서 가장 강력한 카드를 꺼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 우리 왕국의 매일 싸돌아다니는 누군가와는 다르게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그 흑기사가 이번 원정에 참여하네.”
“실력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큰 문제는 없겠군요.”
흑기사라는 조금 무서운 이명과 다르게 고든 바이런 후작의 성격은 매우 온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 레안드로와도 합의했지만 저쪽에서 딱히 위협이 될만한 행동을 하진 않을걸세. 그래도 각별히 주의해주길 바라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인원이 하나 더 있다네. 가브리엘 스피노자라고 하는 젊은 친구지.”
누군지 모르겠다.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애초에 타국이다. 흑기사 같은 유명인이나 알지 다른 귀족들까지 모두 외울 정도로 내가 한가하지도 않고 그런 정보를 쉽게 접할 수도 없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스승님도 모르는 이름인 듯 하다. 나만 무식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자네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겠지. 하지만 제멜아크에서는 요즘 꽤 이름을 날리는 젊은 친구라네 우리 라이브러쉬의 빅터 하네스와 비슷한 친구라고 할 수 있지.”
갑자기 내가 거기서 왜 나와?
“천재인 모양이군요.”
스승님은 한술 더 뜨신다.
“아니 전 천재가 아닌···.”
내가 부정하려고 할 때 국왕이 내 말을 끊었다.
“맞네 제멜아크에서 요즘 아주 인기가 수직상승하고 있는 젊은이지 나이는 20살이지만 5성 기사에 3 서클 마법사라고 하네 거기에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천재라고 하더군. 누구와 정말 비슷하지 않은가? 그가 왕세자의 참모로 붙었네.”
나야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거지만 그 사람은 진짜 천재인 것 아닌가? 하여튼 세상에 천재가 너무 많다.
“다른 사람들이야 얼추 파악된 상태지만, 그 젊은 친구는 어디로 튈지 모르니 주의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국왕이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그래도 국왕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멜아크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망나니 왕자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젊은 천재가 4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제가 최대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하군. 어려운 임무를 맡겼어.”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왕국의 일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타국에서 적보다 아군을 더 경계해야 한다니 어려운 임무가 맞긴 하다. 스승님의 어깨가 무거우니 내가 슬라이트나 자칼이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꽉 붙잡고 있어야겠다. 왕자는 뭐... 그건 스승님에게 맡기도록 하자.
“그리고 만약의 하나라도 말이야. 우리 차례가 왔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놓은 것이 있네.”
그러고 보니 전에 지글러 후작이 비슷한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자네들 제국의 유산을 공략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다 부숴버릴 수 있는 무력? 아니면 지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런 것들이지만 국왕이 생각하는 답은 그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 간편한 수단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제국의 유산은 인간이 공략할 수 없도록 만든 곳이다. 다만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한다.
“유산을 상속할 수 있는 자격입니까?”
“정답이네. 역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르군.”
내가 제출한 답에 국왕은 만점을 줬다.
그리고 국왕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공간에서 작은 보석함을 하나 꺼냈다.
“이게 열쇠일세.”
그리고 보석함을 열자 그 안에서 아주 작은 유리병 하나가 나타났다. 투명한 유리병의 안에는 피처럼 붉은 액체가 들어있었다.
“가이브아크 직계 혈족의 피일세. 아마도 세상에 남은 마지막 물건이지.”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 것이 여태까지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저것이 있었다면 던전을 공략하며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 차례가 온다면 이것을 사용하도록 하게. 물론 쓰지 않게 된다면 돌려줘야 하네.”
“왕자님께 맡기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받기에는 너무 귀한 물건입니다.”
스승님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무리 믿지 못할 아들이라고 해도 그쪽은 직계고 우리는 그저 같은 왕국 소속의 귀족일 뿐이다.
“내가 직접 말하긴 민망하지만, 둘째에게 이걸 맡긴다면 녀석이 다른 마음을 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일세.”
“그렇다면 잘 보관하고 있다가 돌려드리겠습니다.”
스승님이 국왕에게 보석함을 받아서 내게 넘겨주셨다. 왜 이걸 나에게 떠넘기시는 걸까.
“네가 가지고 있도록 하거라. 그게 안전할 것 같구나.”
만약의 경우 나는 지구로 도망갈 수 있으니 그것을 생각하시는 걸까? 일단 군소리 없이 물건을 받아 챙겼다.
“모든 준비는 이쪽에서 할 테니 자네들은 3일 후에 출발하기만 하면 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그냥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네.”
국왕의 마지막 말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국왕이 생각하는 최상의 결과는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제멜아크와 문제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국왕은 이후에도 우리가 만나야할 제멜아크의 중요인물과 관계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해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서류를 한가득 넘겨주었다.
국왕과의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자 식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왕실의 보물창고를 털고 왔으니 무엇을 가져왔는지 궁금하긴 할 것이다.
“그럼 나부터 꺼내놓을까?”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승님이 2급과 3급 보고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꺼내놓기 시작하셨다.
“이건 2급 보고에서 고른 갑옷이다.”
스승님이 꺼내신 것은 짙은 갈색의 가죽 갑옷이었다. 물건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한눈에 봐도 좋은 물건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급 마수의 가죽이군요.”
갑옷을 본 슬라이트가 바로 답했다. 저놈은 어렸을 때부터 이 정도는 질리게 봤을 테니 안목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래, 빅터가 마땅히 갑옷이 없기에 골라봤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보통 갑옷이라면 이제 필요하지 않지만, 기사의 검을 막아줄 수 있는 갑옷이라면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딱히 마법이 걸린 물건은 아닌 것 같더구나.”
“괜찮습니다.”
나는 스승님이 가져온 갑옷을 곧바로 입어보았다. 상급 마수의 가죽을 어떻게 가공했는지 생가죽처럼 부드러웠고 움직이기도 편했다.
“딱히 조정할 필요도 없겠구나. 내 눈이 아직 틀린 것 같지 않아서 기쁘다.”
기사로서 평생 검과 갑옷을 만져온 스승님이다. 스승님보다 전문가는 왕도에서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냥 엄살인 것을 알지만 스승님의 나이를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시려왔다.
“축하한다.”
“축하드립니다!”
구경하던 슬라이트와 철권단들이 나에게 한마디씩을 건넸다.
“다른 한 가지는 딱히 고를 물건이 생각나지 않아 이것을 골랐다.”
스승님이 이번에 꺼낸 물건은 활이었다.
“잘 만들어진 활이다. 간단한 바람 마법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제가 들어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도련님”
이번에도 슬라이트가 나섰다. 슬라이트가 활을 들고 이래저래 시위도 당겨보고 하는데 배운 적이 있는 것인지 자세가 나쁘지 않았다.
“좋은 활이다. 그런데...”
그거야 그렇겠지 2급 보고에서 가져온 물건이니 당연히 좋은 물건일 것이다. 뭔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이거 엘프가 만든 활이다.”
“음?”
엘프가 만든 물건이 밖에서 유통이 되는 것이었던가? 그럼 2급 보고가 아니라 1급 보고로 갔어야 하는 물건 아닌가?
“엘프가 만든 물건이 희귀하지만 오래된 귀족가문에서는 꽤 가지고 있다. 보물 취급을 받고 있기에 사용하지 않으니 보기 힘들 뿐이야. 그중에서도 이건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백작님께서 바람 마법이 걸렸다고 하셨지만, 바람 마법이 걸린 것은 아닙니다. 엘프가 만들어서 바람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뿐이지요.”
“그렇군요. 제가 미처 몰랐던 사실을 도련님께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쓸데없이 아는 척을 했습니다.”
괜히 한번 아는 척을 하러 나섰다가 얼굴이 붉어진 슬라이트가 활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슬라이트 녀석 안목이 보통이 아니다.
역시 명가의 자식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면에서는 내가 슬라이트나 자칼에 비해 많이 모자라다.
“저... 잠시 제가 그 활을 만져봐도 될까요?”
그때 또 다른 누군가가 나섰다.
“뮤어?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나선 이는 뮤어 아이번이라는 이름을 가진 철권단원이다. 2성에 오르긴 했지만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스승님이 판단한 단원이었는데 항상 뒤에서 조용히 있던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평소의 성격을 생각하면 갑자기 이런 데서 나서는 것이 매우 의외인 인물이었다.
“저 활에서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 만지는 것이야 뭐 어렵겠어?”
내가 활을 들어 뮤어 아이번에게 건네주자 활을 잡자마자 뮤어 아이번의 눈이 이상하게 변했다.
검은색 눈동자가 사라지고 흰자만 남은 눈을 보고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뮤어 아이번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비슷한 반응이었다. 심지어 슬라이트는 검까지 뽑으려고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글쎄, 나도 저런 것은 본 적이 없구나. 그러나 느끼지는 마나를 보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구나.”
깜짝 놀라는 바람에 나는 그것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스승님은 이미 뮤어 아이번을 두르고 있는 마나까지 확인을 하신 모양이었다.
“승급입니까?”
“그것은 아니다. 깨달음의 일종이긴 한 것 같은데 두고 봐야 알 것 같구나. 저런 마나의 움직임은 나도 처음 보는 경우다.”
우리는 마치 눈을 허옇게 뜨고 활을 잡은 채로 멈춘 뮤어 아이번을 가운데 두고 조용히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