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전승자-122화 (122/206)

122. 잘못된 결심

이공간.

마법사들에게 꿈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일종의 도시 전설 같은 것이다.

자신만의 작은 차원을 만드는 기술, 이것을 마법이 아니라 기술이라 부르는 것은 마법만으로는 만들지 못하는 영역이라서 그렇다.

아공간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아공간은 이 세계에 주어진 공간 중 일부를 잘라내어 그곳에 물건을 저장하는 것이고 이공간은 엄연히 다른 차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는 그것을 말년에 만들어낸 것도 아닌 700번 대에서 그것을 구현한 것이다.

그것도 여태까지 그런 대단한 물건을 만들었었는지 제대로 발표가 된 적도 없다. 숨기려고 했거나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내가 여태까지 기억에서 지켜본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라면 후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이런 일 정도는 대단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용사들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인간들이 아니었다.

777번이 미레이 반 스트라이더 개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숫자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노더스에서는 보통 7을 행운의 숫자라고 여기지 않는다.

“777번이 혹시 너희들 사이에서 조금 더 특별한 형제야?”

-아닐걸? 9번이나 0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799번인 나를 좀 더 소중히 여기도록 해.

“그렇다면 999번이 백룡이가 더 소중한 게 아닐까?”

-백룡은 나와 이미 한 몸이 되었으니 799999번인 거라고.

“알았어. 그럼 다른 정보는 없는 거야?”

아스트로퍼와 의미 없는 말장난하기보다는 다른 정보를 원했다.

-혹시 이거 알아?

“뭔데?”

-백룡에게 들어서 안 것인데 주인님이 형제를 1000번까지 만드셨다지?

“아마도 그럴걸. 그 이후의 숫자는 나온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우리 형제는 1000개가 아니야.

“번호를 부여받지 못한 보물들도 당연히 있겠지.”

-그게 아니라 건너뛴 번호가 꽤 많아.

그럼 스트라이더 시리즈는 천개가 아니라는 말이 되는 건가?

“그 번호에 맞춰서 만들다가 실패하거나 하면 번호를 건너뛰는 건가?”

-정답이야. 어떻게 알았지?

장인들이 그런 식으로 물건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전생에 들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스트라이더 시리즈의 숫자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절반? 아니면 그 이하일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럼 공석인 번호가 얼마나 되는 거야?”

-엄청나게 많을걸. 나도 전부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700번 대에서 실제로 제작된 형제는 스물도 되지 않아.

그럼 대략 5분의 1 이하인가 스트라이더 시리즈는 그럼 200개 이하라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나를 좀 더 소중히 하도록 해.

“알았다. 일단 다시 들어가 있어 내가 부르지 않으면 가능하면 나오지 말고. 네가 제멜아크 쪽에 보여서 좋을 것이 없어.”

-헹!

아스트로퍼는 아이처럼 혀를 삐쭉 내밀었지만 시킨 대로 다시 사라졌다. 아스트로퍼를 안으로 돌려보낸 이유는 숙소 주변에서 움직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전보다 훨씬 넓어진 초감각의 범위는 최대로 펼치면 우리 숙소 주변을 넘어 둘째 왕자의 숙소까지 모두 감지할 수 있을 정도다.

경비를 위해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을 제멜아크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방에서 나와 스승님에게 가서 얘기하니 스승님도 주변에 나타난 움직임을 감지하고 계신 것 같았다.

“괜찮겠습니까?”

“별로 걱정할 것 없다. 일종의 시위인 것이지. 저들도 우리가 그것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음?”

“다른 목적이 있겠지요.”

교란 작전. 전생의 나도 몇번인가 써보기도 하고 당해보기도 했다. 쉘터와 약탈자 혹은 쉘터와 쉘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을 때는 마치 전쟁처럼 여러 가지 전술을 쓰곤 했다.

더욱이 상식을 뛰어넘는 이능력을 가진 생존자들이 생겨난 후부터는 더욱 그런 성향이 강해졌다. 인간의 적응력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이능력자들의 능력을 간파하고 그것의 약점을 귀신같이 파고드는 천재 전략가 같은 인간들이 있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대격변 이전에는 군인이 아닌 평범한 직업을 갖고 살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밖을 내다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도 했지만 두 명 혹은 셋이 한 조로 숙소의 주변을 배회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멜아크의 병사들이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경비 업무라고 하겠지만 움직이는 동선이 경비하고는 좀 달랐다.

이곳에 있는 스승님의 감각을 교란하려고 하는 의도가 분명히 전해졌다. 다만 이곳에 그 정도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스승님뿐만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스승님 혹시 바이런 후작을 만나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갑자기 말이냐?”

“낮에 보니 두 분이 하실 말씀이 많으신 것 같던데요.”

“그건 그렇지. 주책맞게도 잠시 피가 끓어오르더구나.”

천생 무인인 양반이 타국의 7성 기사를 처음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가서 대화라도 좀 나누세요. 어차피 서로 검을 맞댈 일이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다만 괜찮겠느냐?”

“스승님이 이곳에 계시지 않아야 본색을 드러낼 겁니다.”

주변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스승님이 사라진다면 분명히 뭔가를 시작할 것이다.

“위험하지 않겠느냐?”

“설마 직접적으로 위협을 하거나 해를 입힐 생각은 없을 겁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그랬겠지요. 원하는 게 따로 있는 듯 한데 스승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신다면 이때다 하고 일을 시작하겠지요.”

“알겠다. 다만 조심하거라 그리고 섣불리 움직이지 말거라.”

“예, 만에 하나라도 제가 위험할 일이 없다는 것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스승님은 싱긋 웃으시더니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곧바로 외출할 준비를 하셨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어도 내심 흑기사를 만나는 것을 고대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스승님이 밖에서 대기 중이던 제멜아크의 기사에게 고든 바이런 후작을 만나러 갈 수 있냐는 의사를 전달하자 정말 빠르게 답이 왔다. 당연히 승낙이었다. 이 일과 상관없이 고든 바이런 후작도 스승님을 따로 만나기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고든 바이런 후작에게서 스승님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보기엔 좀 달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골수까지 무인이다.

내가 만나봤던 지글러 후작도 그렇고 올라프 후작도 약간 그런 기질이 있긴 하다. 7성 이상의 경지를 이룬 무인들은 대부분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7성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스승님과 고든 바이런 후작은 순수한 무인에 가까웠다.

스승님이 숙소를 떠나자마자 곧바로 신호가 왔다. 여태까지 숙소 주위를 어지럽게 순찰하던 병사들의 움직임이 정상적인 움직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다.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순찰을 하던 병사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한명이 떨어져나와 둘째 왕자의 숙소로 들어갔다.

어떻게 보면 별로 이상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왕자의 숙소는 제멜아크의 기사들로 이루어진 경비대를 지나 라이브러쉬부터 따라온 왕자의 호위 기사로 이루어진 경비를 지나쳐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순찰 중에 떨어져 나온 일반 병사가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이것을 지켜본 사람은 없다. 나도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초감각으로 감지해낸 것이다. 숙소 내부까지는 감지해낼 수가 없었다. 명색이 왕족이 머무르는 곳이라 그 정도 방비는 해둔 것이다.

일단 둘째 왕자가 제멜아크와 연계하여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출발하기 전에 왕실에서 전해진 서신에 분명히 그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었다.

라이브러쉬 내부에서 자신을 도와줄 힘 있는 조력자를 찾기 어려워진 둘째 왕자는 그 힘을 외부에서 찾기로 한 모양이었다. 왕실의 정보로는 아직 접촉단계라고 하였으나 내가 봤을 땐 이미 그것을 넘어선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것은 아무리 왕자라고 해도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명백한 반역 행위이며 매국 행위다.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전해진 국왕의 직인으로 밀봉까지 되어 스승님에게 전해진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있었다.

[비상 상황에 한하여 노엘 브라스 백작에게 모든 원정대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옥새까지 찍혀있는 검증된 문서였고 의미심장한 문장이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원정대라고 명시되어있다는 것이다. 말은 모든 원정대라고 했지만, 분명히 둘째 왕자를 겨냥한 말이었다.

이것은 여차하면 스승님이 둘째 왕자의 목을 쳐도 된다는 허가증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가능하면 곤죽이 되도록 패버리는 한이 있어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스승님과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왜냐 국왕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허락이 있었다고 해도 자식을 죽인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반역을 저지른 왕자라고 해도 반역을 막아내고 왕자를 처단한 신하는 국왕에게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때 우리 숙소 쪽으로 굉장히 빠르고 은밀하게 누군가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왕자의 숙소와 다르게 우리 숙소는 제멜아크의 기사들만 경비를 서고 있을 뿐 자국의 호위는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 몇천명이 모여있는 곳에서 기사들의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 쉽게 접근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접근하는 이가 창문을 열고 저택 내부에 들어서서 스스로 기척을 흘리기 전까지 슬라이트나 자칼도 감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뒤늦게 침입자가 들어왔음을 느끼고 슬라이트와 자칼이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왔고 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다.

거실에는 침입자로 보이는 인물이 아주 느긋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슬라이트와 자칼은 반대편에 서서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괜찮다. 우리 편이다. 얘기는 미리 들었잖아.”

내가 말을 하자 그제야 슬라이트와 자칼이 조금 경계를 풀었다.

“이분이 그분인가?”

“정말 그분이신가요?”

슬라이트와 자칼이 확답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묻자 침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박자 늦게 방에서 나온 스테이시도 나오자마자 메시지를 작성하느라 바빴다.

[굉장하세요. 제가 미리 만들어둔 탐지 마법을 그렇게 쉽게 통과하는 분은 처음 봤어요.]

사실 이 침입자의 방문은 미리 이야기가 되어있던 일이다.

“빅터 하네스입니다. 노엘 브라스 백작님은 잠시 출타 중이시라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전달하실 내용은 저에게 말씀하시거나 맡겨주시면 됩니다.”

“알고 있다.”

방문자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짧게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품에서 서신을 한 장 꺼내 나에게 건넸다.

방문자는 평범한 병사의 복장이었다. 제국의 특무대처럼 특수한 복장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본래 실력을 숨기는 그런 물건은 지니고 있는 듯 하지만 그 외에는 진짜 자기 실력이라는 것이다.

얼굴도 평범한 젊은 병사였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초감각으로 피부에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법이 아니다 정밀한 가면이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인피면구가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마주하기가 국왕보다 어렵다는 사람이다. 라이브러쉬 왕국 대외첩보부장, 일단 직책은 그것이다. 작위도 백작이지만 영지는 없다. 그리고 누구도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 사람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는 오직 국왕뿐이다.

“이 왕자님이 잘못된 결심을 하셨다. 내가 건네준 것은 그 증거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확정이다. 그리고 아예 증거까지 있다고 하니 둘째 왕자의 운명은 결정된 셈이다.

잠시 시차를 두고 있다가 그 말뜻을 알아차린 슬라이트를 비롯한 아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렇군요.”

나야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니 큰 충격은 없었다.

“알고 있었나?”

“의심은 하고 있었습니다.”

“필요한 정보가 있나?”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 있었다. 이 사람이라면 그것을 해결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윌리암 와일러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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